사회주의 후보 버니 샌더스의 돌풍과 미국 좌파운동

버니 샌더스의 돌풍=99%의 정치적 표현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젭 부시 간의 양강대결이 예상되는 미국 대선에서 예상외의 복병 버니 샌더스 후보가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7월부터 본격 유세전에 돌입한 이후 7월 1일 위스콘신 매디슨에서 1만명, 7월 18일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서 1만1000 명, 7월 20일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8000명, 25일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즈에서 4500명에 이어, 8월 8일에는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1만5000명이 모였고, 8월 9일 오리건 주 포틀랜드 유세에는 약 2만8000명이 참석한 것으로 집계됐다. 힐러리 클린턴의 최대 유세규모(8월 6일 5500명)를 가히 압도하는 규모다.

유세장의 열기도 뜨겁다. 유세장을 채운 청중들은 유세 시작부터 'Feel the Bern'(버니를 느껴보세요)이라는 구호를 외쳐대고, 샌더스가 무대에 오르면 우뢰와 같은 환호가 터져나온다. 샌더스가 이번 선거는 “억만장자들에 저항하는 정치혁명”이라고 주장하면 청중들은 "버니! 버니! 버니!"라고 연호하면서 유세장의 열기를 끌어올린다.

뿐만 아니라, 선거자금 모금과 조직화에서 샌더스 캠페인은 획기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선거자금의 경우 2015년 1/4분기에 공화당 젭 부시 후보의 1억300만 달러,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4750만 달러에 비해 샌더스 진영은 1500만 달러를 모금했다. 대기업의 거액기부에 의존하는 주류 후보에 비해 턱없이 적은 금액이지만 압도적 다수의 풀뿌리 소액 기부금으로 확보한 기부금인 만큼 액면가 이상의 가치가 있다.

버니 샌더스의 돌풍=99%의 정치적 표현

그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작은 주인 버몬트 주의 무소속 상원의원이다. 상원에서 유일한 무소속이자 유일한 사회주의 의원이다. 버몬트의 주도인 벌링턴 시장으로 정치경력을 시작한 버니 샌더스는 하원 8선을 거쳐 상원에 입성했다. 보수적인 버몬트에서는 유명한 사회주의 정치인이지만, 전혀 전국적 정치인도 아니고, 미국의 진보진영도 그의 친노동 표결 경력 정도만 아는 수준이었다.

지난 4월 민주당 경선 출마를 선언할 당시만 하더라도 아무도 버니 열풍을 예상하지 못했다. 억만장자들에 맞선 정치혁명이란 슬로건 아래 주식회사 미국을 향한 버니 샌더스의 공격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공공의료, 무상 고등교육, 최저임금 인상 등 현안에 대한 진보적 입장과 경제적.인종적 불평등 해소를 외치고 있다.

버니 샌더스가 막강한 힐러리 클린턴에 맞서 선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핵심적으로, 경제위기와 그로 인한 사회적 양극화에 맞서 사회경제적 정의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중산층이 몰락하고 빈곤이 확대되는 경제적 양극화 상황에서 민주-공화 양당의 후보가 99%를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조차 1%의 기업권력 앞에 고용과 임금, 보건의료와 교육 등 생존권과 복지문제에 무기력한 상황에 대한 99%의 절망과 저항을 버니 샌더스가 대변하기 때문이다.

샌더스와 노동조합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샌더스 열기가 뜨겁다. 버니를 지지하는 노동자들(Labor for Bernie)이란 지지모임이 만들어져 5000여명의 평조합원들이 가입했다. 미국노총(AFL-CIO) 남캘리포니아 등 일부 지역본부와 수백개의 노조 지부들이 샌더스 캠페인을 지지하고 있다.

한편 차기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하길 희망하는 랜디 웨인가튼 위원장의 미국교원노조(AFT)은 조합 내 논의과정 없이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후보로 선정했다가 일반조합원들의 반란과 저항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 밀려 AFL-CIO 지도부는 대선후보 승인 결정을 연기했다.

샌더드 열풍과 미국 좌파

과거 1980년대 제시 잭슨과 무지개 연합(Rainbow Coalition), 2007년 녹색당 랠프 네이더 선거운동을 경험한 미국의 좌파들에게도 샌더스 열풍은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다. 보수 양당체제 아래서 주변화되고 파편화돼 있는 좌파들은 샌더스의 선전에 놀라면서도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에 힘겨워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내 활동을 강조하는 미국 공산당 등 구좌파들은 샌더스 선거운동에 거리를 두고 있다. 민주당 안팎에서 진보적 민중운동을 건설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면서도, 사실상 민주당 후보에 대한 지지로 귀결되는 행태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다른 그룹들로부터 전형적 ‘차악주의’(lesser-evilism)란 비난을 받았다.

반면 민주당 내 활동이나 민주당과의 연계를 거부하는 좌파세력들(트로츠키주의 ISO 등)은 버니 샌더스 선거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한편 독자노선을 추구하고 있는 미국 녹색당은 질 슈타인 후보를 내세웠고, 그녀는 끝까지 완주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버니 샌더스의 돌풍과 정치적 메시지는 미국 정치를 풀뿌리로부터 흔들고 있고, 99%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돌풍이 보수 양당체제를 대체할 진보적 제3정당의 결성으로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왜냐면 민주당 문제란 미국 좌파의 근본적 딜레마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현재 파편화된 좌파들로서는 99%의 정치적 표현으로서 샌더스 신드롬을 조직적 성과로 가져갈 만한 주체적 역량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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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스코프스키

    [구 진보정치]실용주의의 나라,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가 없는가?'


    독일의 사회학자 좀바르트가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가 없는가?’라는 글을 쓴 건 1906년의 일이다. 이후 100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의 정치, 사회학자들은 미국에서 진보정당이 뿌리내리지 못 한 것에 대해 주목해왔다.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은 대체로 미국 ‘예외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미국은 정치, 사회경제적으로 유럽과는 다른 독특한 조건을 형성, 발전해왔으며, 이 같은 객관적 조건이 사회주의운동에 커다란 제약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가 중 진보정당이 중앙 의회진출을 못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그 다음으로 진보정당이 약세를 보이는 곳이 한국이다) 그런데 미국 ‘예외주의’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와 같은 예외적 조건들은 다른 나라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척박한 토양(객관적 조건)’ 때문인가, ‘종자(주체)’가 문제인가 하는 논쟁이다.

    정당의 숫자로만 따지면 진보정당의 '종합 박물관'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정말 없는가? 정당의 숫자로 따지면 진보정당의 '종합 박물관'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트로츠키노선, 마오노선의 정당으로부터 신좌파, 사회민주주의, 녹색당에 이르기까지 진보정당의 범위에 드는 정당은 현재 20개가 넘는다. 각 당의 당원 숫자는 대개 수 백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들 가운데 5개 정당이 지난 2004년 대선에 후보를 냈다. 득표 결과는 참담하다. 노동자세계당(WWP, 마르크스 레닌주의, 1959년 창당) 1천3백표, 사회주의평등당(SEP, 트로츠키노선, 1953년) 1천8백표, 사회주의노동자당(SWP, 트로츠키노선, 1938년) 1만표, 미국사회당(SPUSA, 사회민주주의, 1973년) 1만표, 녹색당(GPUSA, 1984/2001년) 11만9천표. 모두 소수점 이하의 득표이다. 당시 공화당의 부시 후보는 6천2백만표, 민주당의 케리 후보는 5천9백만 표를 얻었다.

    이렇듯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수많은 정당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들에게도 사회변혁의 부푼 기대를 한껏 가졌던 희망의 시대, 찬란한 과거가 있었다. 문제는 왜 그들은 역사와 현실에서 패배자가 되어, 이 갑갑한 미국사회를 더욱 절망의 사회로 만들었는가하는 것이다. 그 쓰라린 좌절과 실패의 역사는 비단 미국의 진보정당운동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오늘과 내일이 될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의 최근 탈당사태와 실용주의를 내세우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을 보면서, 그 같은 우려를 떨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미국 진보정당운동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필요가 충분히 있다.

    1850년대 미국에서 맑스주의자 출현

    미국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출현한 것은 1850년대이다. 조셉 위드마이어가 1853년 '미국노동자 동맹'을 조직했고, 1859년 프레드리히 조르게가 '공산주의자 클럽'을 만들었다. 위드마이어, 조르게는 유럽에서 마르크스, 엥겔스와 함께 활동하다,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독일계 이주노동자를 기반으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벌였다. 미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리는 위드마이어는 남북전쟁 시기 북부군 대령으로 참전하기도 한다. 조르게는 1870년대 뉴욕에서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의 총서기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소련 비밀정보원, 리하르트 조르게가 그의 손자이다. 이들의 흐름은 1876년 ‘사회주의노동당(SLP)’으로 이어졌다. 이 당은 초기에 독일어를 공용어로 하는 독일계 정치서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 했으나, 1890년대 다니엘 드 레온이 지도자로 등장하면서 사상과 노선을 중심으로 한 정치정당의 면모를 갖추었다. 미국 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인 이당은 ‘정통 마르크스- 드 레온주의’를 표방하며,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01년 미국 사회당 창당

    19세기 초, 중반 산업혁명을 거친 미국은 19세기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한다. 그 시기 미국사회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도 무척 주목했을 정도로 거대한 계급투쟁의 용광로였다. 5.1 국제 노동자의 날의 기원은 1886년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에서 유래한다. 3.8 세계여성의 날은 1908년 뉴욕 여성노동자들의 시위에서 출발했다. 이와 같은 노동계급의 투쟁 열기와 함께 1901년 ‘미국 사회당(SPA)’이 창당됐다. (2007년 11월 나는 ‘1912년 미국대선을 뒤흔든 사회주의 트로이카(진보정치 349호)’라는 글을 썼다. 그 글은 미국 사회당을 주제로 한 글이었다.)

    20세기 초 사회당은 오늘의 민주노동당과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진보연합정당’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당의 정강, 정책 내용, 당원의 증감 속도와 숫자, 중앙과 지방 의회에서의 정치 진입 과정과 속도, 노동운동을 비롯한 대중투쟁과의 결합도 등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또 미국의 건국시기부터 흘러 온 ‘자유주의’와 함께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가 등장, 미국사회를 휘감던 시대상도 그렇다. 그런데, 6%의 대선 득표를 기록한 사회당은 대선 두 달 후인 1913년 1월, 11만 당원 중 2만 명이 탈당하는 사태를 맞는다. 당의 최고 지도부인 7명의 집행위원중 하나인 빌 헤이우드에 대한 제명 파동 속에서 빚어진 일이다. 유명한 장애 여성이자, 사회당 당원인 헬렌 켈러는 당시 이렇게 절규한다.

    “나는 하나가 되어야할 당이 두 파벌로 갈라져 서로 비열한 싸움을 벌인다는 기사를 읽고 몹시 낙담하였다. 그것도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왜 노동자들의 처절한 요구 앞에서 당 전술의 차이를 거론해야 하는가? 수많은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하루 종일 노동함으로써 가슴이 병들고, 신체가 파멸되어가고 있는 지금에...” (1913년 1월 4일자 뉴욕 콜지 기고문 ‘단합을 호소한다’ 중에서)

    20세기초 미국 사회당 지금의 민주노동당 많은 공통점

    ‘진보연합정당’인 사회당에는 크게 4가지의 경향이 나타났다.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빅터 버거, 모리스 힐퀴트, 유진 뎁스, 빌 헤이우드로 구별되는 노선이다.

    빅터 버거는 1911년 이후 여러 차례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인물로 ‘밀워키 사회주의’ 라고 불리는 ‘정파’를 이끌었다. 위스컨신주 밀워키에 기반을 둔 사회민주주의 경향으로 ‘산업자본의 유물인 더럽고 오염된 사회를 청소하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친환경적인 지역사회건설, 공중보건의료, 교육을 중시하며, 의회와 공직진출에 공을 들였다. 모리스 힐퀴트는 1899년 사회주의노동당에서 탈당해 나온 ‘캥거루파’의 지도자이다. 이들은 뉴욕을 기반으로 독일계, 유대계 이민노동자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사회당내 사회민주주의자의 구심점 역할을 한 힐퀴트는 의회주의노선과 ‘미국노동총연맹(AFL)’과의 연대를 중시했다. 새뮤얼 곰퍼즈가 주도한 ‘AFL’은 백인숙련노동자만을 구성원으로 한 직능별 조직으로 연맹의 상층은 ‘실용적 노동조합’, 자본가와의 ‘계급협조’를 추구했다.

    유진 뎁스는 1893년 철도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듬해 전국 철도총파업을 주도했다. 그는 사회당의 대선주자로 5차례 출마했다. 1912년 대선에서 6% 지지(90만 표) 획득은 현재까지 미국 진보정당들이 거둔 성적 중 최다 득표율이다. 그는 의회주의 보다는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 무게 중심을 둔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AFL’의 반대세력인 ‘세계산업노동조합(IWW)’과의 연대를 강조했다. 빌 헤이우드는 1903년에서 1905년까지 이어진 ‘콜로라도 전쟁(광산노동자 대투쟁)’을 이끌고, 1905년 'IWW'를 조직했다. 'IWW'에는 비숙련 노동자, 일용직 떠돌이 노동자, 다양한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했고, ‘단일한 산업노조’를 지향했다. 이들은 정당을 통한 의회 정치활동을 거부하고, 파업과 태업 등 현장에서의 ‘직접 행동’을 투쟁노선으로 삼았다. 미국 노동운동사의 획을 그은 '빵과 장미의 파업(1912년 로렌스지역 파업)' 등 수 많은 투쟁을 이끌었다.

    1913년 미국 사회당 에이우드 제명으로 2만 당원 탈당

    이들 4가지 경향은 ‘동반 상승’이라는 ‘시너지 효과’를 거두었다. 이에 힘입어 사회당은 1912년 전후의 선거에서 2명의 연방 하원의원, 70명의 시장, 1천명의 선출직 관리, 지방의회, 시의회 의원을 배출했다. 그런데 1912년 대선 직후, 이들 경향은 정면충돌을 일으킨다. 힐퀴트와 버거 세력은 의회주의에 걸림돌이 되는 헤이우드, ‘IWW파’를 당에서 ‘척결’하기로 결심했다. 1912년 11월 당 대회에서 당헌을 고쳐 ‘계급투쟁에서 태업금지’조항을 넣고, 이를 근거로 헤이우드를 1913년 1월 제명했다. 그가 제명되자, 2만 명의 당원이 탈당했다. 이후 사회당의 노선은 현저히 ‘오른쪽’으로 기운다.

    그러나 이 분열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회당은 1917년, 1919년 다시 내분을 겪고 회복 불능의 ‘난파상태’에 빠진다. 제 1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전문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지지문제, 코민테른(제 3 인터내셔널)의 참여문제를 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사회당의 반전 정책에 반기를 든 이들은 탈당을 하고, 민주당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품에 안겼다. 반대로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고, 코민테른의 참여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도 당을 떠났다. 그들은 ‘미국 공산당(CPUSA)’을 창당했다. 당권을 쥔 사민주의세력은 이같이 ‘우왕좌왕’하는 분열과 혼란에 기름을 부었다. 힐퀴트는 “불화와 논쟁으로 얼룩진 무기력한 한 개의 큰 당보다는 수가 적어도 분리된 두 개의 당이 백배 낫다”고 말했다. 앞서 인용한 당의 단합을 호소한 헬렌 켈러, 분당을 재촉한 힐퀴트, 과연 누구의 말이 옳았는가? 민중과 역사의 판단은 명철하고 냉정했다. 사회당은 1919년 10만 당원에서 3년 뒤인 1922년 1만 1천으로 쪼그라든다. 이렇게 ‘진보연합정당’인 사회당은 무너져갔다. 이후 미국의 진보정당운동은 철저하게 ‘정파정당’의 길을 걷는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분당’하고, 분당한 당 안에서 또다시 분당하는 과정을 계속 겪었다.

    미국의 사회주의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을 물어뜯다가 자본주의보다 일찍 ‘죽은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진보정당의 분열과 함께 자본과 권력의 공세가 거칠게 밀려왔다. 자본과 권력은 “노동운동과 파업은 체제를 전복하려는 사회주의자들의 짓이며, 이들은 유럽, 러시아 외래 불순사상의 추종자들이자, 게으르고 불만에 가득 찬 이주민들”이라고 악선전했다. 또 미국의 ‘100%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들을 척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탄압은 고립된 ‘IWW’를 먼저 겨누었다. 1915년 조 힐을 비롯한 ‘IWW’의 지도자들이 잇따라 처형을 당하고, 조직은 급속도로 약화됐다. 힐퀴트, 버거는 의회주의로 순응하며, 자본과 권력의 ‘이념공세’와 탄압을 피하려 했지만, 그러한 시도는 망상이었다. 자본과 권력은 ‘방첩법’과 ‘치안법’이라는 몽둥이를 휘두르는데, 사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가리지 않았다. 제 1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참전을 반대한 이유로 뎁스, 헤이우드는 물론 버거 역시 감옥에 간다. 그는 ‘독일간첩혐의’인 방첩법 위반으로 1919년 20년 형을 받고, 의원직을 박탈당한다. 이어 1920년 1월 2일 70개 도시에서 ‘소비에트 볼셰비키의 첩자’, ‘파업을 선동하는 불법 이주노동자’인 미국 공산당원과 노동자 1만 명이 동시에 체포됐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29년, 대공황이 몰아닥치고 수많은 민중들이 실업과 굶주림에 죽어갔다. 모두가 자본주의의 붕괴위기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았고, 혁명도 오지 않았다. 왜? 사회변혁의 길을 열어낼 진보정당이 분열과 탄압 속에 먼저 ‘파산’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사회주의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을 물어뜯다가 자본주의보다 일찍 ‘죽은 것’이다.




    한익수씨의 견해엔 동의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