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안에서 자연과 함께

[기획특집] 우리는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6)

생태적 위기의 세계적 확산

산업혁명 이후 제조업 중심의 산업 발전은 자연에 대해서 대규모로, 전 지구적 영향을 미쳤다. 산업혁명으로 줄어든 농지로 늘어난 도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농지의 지력은 고갈되었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남미의 구아노까지 수입했다. 이 때문에 구아노 수출국 페루가 경제적 급변동과 전쟁까지 겪은 일은 마르크스도 언급한 잘 알려진 사례다. 20세기를 지나면서 생태적 위기의 세계적 확산 특히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의 전가는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선진국의 산업폐기물을 자국영토에 내다버리게 해주는 대가로 부를 축적하는 주변부의 부패한 정치인들부터 후쿠시마 원전까지 사례는 수없이 많고 다양하고 복잡하다.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에도 변화가 있긴 하지만 큰 틀은 그대로다. 중심부 노동자들은 북지국가 시기와는 비할 수 없이 불안정해진 고용과 낮아진 임금으로 살아가기 위해 소비재를 값싸게 파는 월마트가 필요하고 월마트는 단가를 맞추기 위해 중국 노동자들의 값싼 인건비가 필요하다. 그렇게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고 그 공장에 전력을 공급할 수많은 화력 발전소와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된다. 한국은 미세먼지와 원전 사고 위험 앞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그리고 우리는 또 세계의 다른 어딘가로 이 고통을 전가한다.

서구 노동운동 생태 인식 부족

생태 문제는 노동자 계급과 마찬가지로 근대적 산업화의 결과물이다. 노동의 해방과 생태 위기 극복은 처음부터 연결된 과제였지만 서구 노동운동은 이런 인식이 부족했다. 중심부 노동자 계급은 생태적 위기를 야기한 산업발전의 경제적 과실을 자본가 계급과 불평등하게나마 공유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생태적 위기를 인정하고 자본주의적 생산력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하거나 축소하는 대안은 서구 남성 노동자 계급에게는 경제적 이익과 사회적 특권의 포기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생태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는 주류 노동운동 밖에서 제기되었다. 흔히 신좌파라고 불리는 다양한 흐름들 중에서도 생태주의와 여성주의가 가장 두드러졌는데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했던 서구의 사민주의나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이 두 이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생태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본질적 한계를 가졌다는 비판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1980년대에 와서 마르크스의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왜곡된 실천이 생태 문제에 대한 무능을 초래했다는 반성이 일어났다. 이 흐름은 자본주의가 인간착취와 소외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생태적 위기의 주 원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과학적 분석과 극복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과제가 생태 문제에도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 철학이 가진 주객의 상호작용으로서의 인간관, 소외론, 인간 자연 관계를 신진대사로 해석하는 관점 등의 이론적 자원을 이용해 생태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대안 제시가 시도되었다. 폴 버킷, 제레미 포스터 등의 작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 이후에는 철학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을 넘어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부문별 연구도 축적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생태 위기와 기존의 대안들을 어떻게 볼까?

인간과 자연 떼어놓는 이원론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의 생태학자들이 첫 번째로 지적하는 생태 위기의 철학적 원인은 인간과 자연을 이원론적으로 보는 세계관이다. 이는 생태주의자들이 근대 서구의 자연과학과 산업의 세계관이라고 이미 비판해 온 것이고 마르크스주의도 그 비판에 동의한다. 이원론은 인간과 자연을 전혀 다른 실체로 보는 입장이다. 자연의 주인이라고 자처한 근대인들은 자연을 이윤추구나 욕망 충족을 위한 대상으로만 취급하고 착취했다. 더 잘 착취하기 위해 작은 조각으로 쪼개고 원하는 모습으로 재조립하기를 반복했다. 근대 자연과학의 방법론인 분해와 조립은 이렇게 확립되었다. 그 과정의 초기부터 환경 문제는 발생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충분한 발전은 그 문제마저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외면해왔고 이 믿음은 지금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 혹은 근대세계 전체가 가진 이런 세계관을 인간중심주의라 부른다.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에서 철저히 인간의 편을 드는 관점이다.

인간과 자연을 떼어놓고 설명하는 이원론은 인간의 반대편에 자연을 놓고 두 항에 다른 관념들을 계속 더해 나간다. 인간중심, 근대사회, 문명, 물질주의, 남성, 서양 등이 한 계열을 이루고 그 반대편에 자연중심, 전통사회, 원시, 영성(정신)주의, 여성, 동양의 계열이 배치된다. 앞의 계열은 개별성, 능동성, 욕망, 과도함,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을 특징으로 가진다. 그 반대편 계열은 연결(망, 네트워크), 수동성, 절제와 평화로운 공존을 특징으로 가진다. 여기에 얼마든지 다른 특징들을 덧붙일 수도 있다. 일부 생태주의는 두 계열에 가치평가를 더해 선악의 이분법으로 생태위기를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자연은 원래 선한데 악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망쳤다는 신화적 서사가 등장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생태주의 일부를 비판하는 것은 그것 스스로가 다시 이원론에 빠지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 자연중심주의, 근본생태주의

이원론 구도로 문제를 설정하면 해결책은 세 가지 밖에 없다. 인간과 자연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절충하는 것. 인간중심주의는 생태 위기 자체를 부인한다. 자연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현실에 대한 인간의 고집스러운 외면이 오늘날 생태의 위기로 드러났다. 또 인간중심주의는 생태위기를 가장 가혹하게 겪는(생태 문제는 모든 인류에게 균등하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재난을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삼는 행태를 이르는 ‘재난자본주의’ 개념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수많은 자연 재해가 중심부와 주변부에서 극적으로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주변부 민중의 관점과는 실천적으로도 어울릴 수 없다.

반대편에 있는 극단적 자연중심주의는 보편적인 인간의 관점일 수가 없다. 이 입장은 생태 문제를 야기한 인류의 절멸이 위기의 해결책이라거나 인류의 등장과 멸종도 큰 자연적 과정 가운데 일어나는 일일 뿐이라 본다. 사실에 부합할 수는 있어도 인류에게 옳은 해결책은 아니다. 이런 극단보다 그나마 현실적인 생태 친화적 해결책은 절충적이지만 자연중심, 전통사회, 원시, 영성(정신)주의, 여성, 동양을 서구 근대 문명의 대안으로 강조한다. 근본생태주의가 대표격인 이 입장은 근대 이후 지배적이었던 인간중심주의를 교정하고 완화한다는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일부 근본생태주의자들은 근대가 성취한 높은 생산력, 그를 뒷받침한 근대 과학과 기술, 중앙집중적 국가와 근대 민주주의 등의 근대적 정치제도까지 전면 거부한다. 예를 들어 근대 국가의 정치적 대안으로 전근대적 촌락공동체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했던 공동체들은 평화롭고 평등하며 안락한 곳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근대적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가부장적인 소집단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 이 예처럼 근본생태주의의 어떤 경향은 정치적 보수주의로 귀결되는 위험이 있다. 인류의 기대 수명을 비약적으로 연장시킨 예방접종의 전면 실시를 국가 폭력에 의한 강제 치료라고 보는 주장도 논의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 관점은 인간중심주의의 동전이 다른 면이라는 점이다. 자연 위에 독립적으로 군림하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현실의 자연은 처음부터 인간을 포함한 것이고 특수하게 진화한 인간은 자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현실이다. 현실의 인간 자연 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관념화된 인간과 자연의 대립 구도로는 생태 위기의 실상을 볼 수 없다.

그러면 둘의 절충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이원론을 전제한 양적 절충 역시 비현실적이다. 생태 위기의 심각성이 첫 번째 이유다. 현 체제의 지속을 전제로 하는 절충적 해결책이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개념이다. 이 개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들 중 어떤 것도 계획대로 실행되지 않는다. 각국 정상들이 아무리 합의하고 서명해도 미국이나 거대 독점자본의 몽니 앞에 무력할 뿐이다. 현재도 지구에 가해지는 생태적 압력은 거의 나아지지 않고 있다. 생태적 지속 가능성이나 지속적 성장 둘 다 실현되지 않고 있다. 투기적 이윤추구의 수단이 되어버린 탄소배출권 거래처럼 생태위기마저 새로운 상품의 소재가 되는 세상이다. 두 번째 이유는 양적 절충은 실제로는 위기와 고통을 없애거나 줄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분배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지금 살고 있는 인간들 사이의 그리고 미래 세대와 현재 세대 사이의 고통 할당의 문제를 생태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더구나 고통을 분담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주변부 하층 민중의 관점을 가진다면 이 대안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

마르크스주의는 앞서 본 노선들의 실천적 한계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이원론적 설명이라는 철학적 오류에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 관계에 관해 마르크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진화과정에서 조금 특수하게 진화한 일부일 뿐이다. 자연에 대규모의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특수한 존재이지만, 근본적으로 자연의 일부이다. 인간이 자연 속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 둘을 어떻게 분리할 수 있나? 자연과 인간을 분리해 생각하는 방식은 비현실적이다. 둘을 함께 그리고 관계 속에서 고려하는 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직접적으로 자연존재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똑같이 생명활동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생명체로서의 존재를 유지하지 않는 이상은 그 이외의 어떠한 정신적, 사회적 활동 즉 인간의 고유한 행위도 할 수 없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른 생명종과 같은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생물학적 개체로서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바깥에 있는 자연을 필요로 한다. 먹고 마시고 숨 쉬어야 하며 그것도 다른 인간과 살을 맞대며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존재방식을 이기적 인간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자연 속의 다른 존재들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보면 자연은 존재하는 모든 것끼리의 대립과 투쟁의 장일뿐이다.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생태의 우선성을 강조하면 인간의 활동 자체 그래서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가 생태 위기의 원인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인간의 활동 가운데 어떤 활동만이 생태위기를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어떤 면에서는 대립한다. 조화의 맥락과 대립의 조건을 이해하는 것이 인간을 자연의 대립물로 도매금으로 넘겨버리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다.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상화는 관계의 한 면이다. 그리고 대상화도 맥락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인간과 다른 자연의 상호관계는 긍정적 상호관계일 수도 부정적 상호관계가 될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과 다른 인간, 인간과 다른 자연물의 적대적 상호관계가 자본주의라는 조건에 의해 심화되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자연을 대규모로 파괴하는 인간의 활동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요구하는 이윤의 무한한 추구로 발생했다. 인간이 존재해온 오랜 시간 동안 자연에 영향을 미쳐왔지만 생존 자체를 위해 자연을 이용한 정도는 자본주의 시기 이윤 추구 목적으로 행해진 정도에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라는 역사발전의 특수한 단계에서의 인간 활동이 생태적 위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지 인간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노동의 소외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개념인 노동의 소외를 통해 인간 자연 관계의 왜곡을 설명한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의 방식이다. 노동이 인간과 자연을 매개한다. 노동은 인간이 생존을 유지하고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밖의 대상을 변형시키는 행위다. 인간은 몸, 정신, 도구를 가지고 노동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작용을 가한다. 인간과 자연을 이원론적으로 보고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 자연을 약탈하는 행위로서 노동을 보면 노동 자체가 반생태적인 것이 된다. 노동운동이 생태 위기의 공범이라는 편견도 이런 관점을 아래에 깔고 있다.

마르크스의 생각은 이와는 달랐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상호의존적으로 보았던 마르크스에게 노동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노동은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을 변화시키며 그렇게 하면서 자기 자신의 자연/본성(nature)을 변화시킨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인간적으로 변형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연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인간 스스로가 변한다. 인간의 본성까지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긍정적인 결과물이 인간 잠재력의 발휘다. 원숭이로부터 인간으로의 진화 과정도 노동의 결과라고 마르크스는 설명한다. 진화된 인간이 노동을 통해 스스로의 욕망을 실현하면서 동시에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존재로 발전하는 것이 바로 소외로부터 극복된 자기실현으로서의 노동이다. 이런 역할을 해왔던 노동이 자연을 파괴하고 동시에 노동자를 파괴하게 된 현상을 노동의 소외라고 부른다. 사적소유에 근거한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에 의해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상호관계는 둘 모두에게 파괴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인간-자연 상보적 관계로 돌려놓아야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왜곡된 것은 자본주의라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맺음의 방식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생태적 위기의 극복은 인간을 절멸하거나 최소화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원래의 자연이라는 비현실적 관념에 매달려서 실현할 수도 없다. 우리 인간은 먼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함께 바로 잡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에서 자본주의 철폐와 공산주의 실현은 상호 파괴적이 되어버린 인간 자연 관계를 다시 상호 의존적이고 상보적인 관계로 돌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란 완성된 자연주의 곧 인간주의이면서 완성된 인간주의 곧 자연주의”라고 말했다. 인간과 자연을 완성으로 향하게 하는 관계 맺음의 방식이 공산주의다. 더 건강한 관계는 기존의 파괴적 관계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전제해야 실현될 수 있다. 관계는 그리고 세상은 변화한다.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역사에 주목하는 이유다. 남은 두 회는 역사 철학을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