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어떻게 역사의 주인이 되는가

[기획특집] 우리는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8)

인간이 자신의 삶을 결정할 어떤 능력도 가능성도 없다면 장기판의 말이나 기계의 부속과 크게 다른 존재가 아닐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의 유명한 장면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기계의 부속처럼”되는 일은 인간성의 심각한 훼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채플린보다 더 급진적으로 자본주의의 인간성 상실을 비판한 마르크스주의마저도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로 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인간을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의지 없는 꼭두각시로 본다는 혐의다. 인간의 자유의 완전한 확대, 해방을 위한 길에서 정작 인간 자신은 정해진 역할만 수행해야 한다면 그것은 너무 비극적인 역설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은 결정론, 환원론이라는 비판을 지금도 받고 있다. 경제적 변화로 모든 사회현상을 다 설명한다면 환원론이고 경제적 변화가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역사적 과정들이 정해진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면 결정론이다. 비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대답을 통해 우리 인간이 어느 정도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자.

사회를 받쳐주는 토대, 경제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비판을 받는 이유는 세계의 변화의 원인을 경제적 토대에서 찾기 때문이다. 토대는 사회를 건축물에 비유한 표현이다. 건축물이 무너지지 않고 서 있으려면 기초가 있어야 한다. 인간사회가 건축물이라면 경제는 그 기초 같은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수십 층의 고층 건물을 지으려면 튼튼한 토대가 있어야 한다. 토대가 없다면 그 위에 세워지는 건축물도 없다. 정치부터 종교, 문화에 이르는 경제 외의 여러 활동을 역시 건축물에 빗대어 상부구조라고 부른다. 경제로부터 아무리 자립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활동이 가능하려면 인간은 육체적 생존을 유지하고, 집단을 이뤄야 한다. 정치인에게 세비도 줘야 하고 조각가도 돌을 다듬을 근력을 유지하려면 밥은 먹어야 한다. 인간이 육체적 생존을 유지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고 자식을 낳아 다시 사회구성원으로 기능하게 양육하는(재생산) 행위의 총합이 경제다. 경제라는 토대는 상부구조의 외적 한계를 이룬다. 즉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어떤 활동도 경제라는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 경제가 토대가 된다고 말하는 것과 사회의 모든 현상을 경제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토대는 그 위에 다른 구조물이 서 있도록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건물에 상가, 주택, 문화시설, 종교시설이 들어가려면 맨 밑에 기초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초가 건물 위층의 평면과 용도와 입주자들의 행동을 모두 규정하지는 않는다.

냉정하고 솔직하게 말해보자. 특히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경제가 모든 부문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자본가들은 이윤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첫 회에서 언급한 쓸모 중에 으뜸은 경제적 쓸모다.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이 경제적으로 가치 있기 위해 모양과 기능을 바꾸도록 강요받고 있다. 경제가 상부구조의 토대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묘사한다는 의미도 있다. 종교 지도자나 저명한 예술가가 현대 사회의 배금주의를 비판할 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똑같은 말을 마르크스주의자가 하면 갑자기 상부구조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정신주의자가 되는 이들이 많다. 경제가 사회의 토대이며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명제는 그래야 한다는 당위의 명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다. 우리 삶의 다양성과 자율성은 그런 현실을 인정한 뒤에 가능하다.

생산력, 생산관계, 생산양식

경제가 사회의 토대라는 명제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토대라는 비유적 표현의 정확한 개념은 생산양식이다.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두 개념의 종합이다. 생산력은 한 사회가 가진 부의 모두를 의미한다. 물질적 생산물, 생산 수단 그리고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들의 유무형의 능력(근력, 지식, 기술, 노하우 등)이 모두 생산력 개념에 포함된다. 생산관계는 생산을 둘러싼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 생산과 생산물의 분배를 위해 인간들이 어떤 관계를 맺는가이다. 농경사회를 예를 들면 산출되는 농산물, 토지, 경작에 필요한 가축과 농기구, 농사기술과 농업노동력 등의 합이 생산력이다. 토지는 누가 소유하고 농사일은 누가 하며 생산물은 어떻게 분배하는지 등의 사회적 관계(계급관계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안정적으로 하기 위한 제도나 관행 등을 모두 생산관계라고 한다. 이 둘을 통일시켜 한 사회의 경제 활동의 총체를 설명하는 개념이 생산양식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한 생산양식이 다른 생산양식으로 바뀌면서 일어난다. 근대 이후의 역사 서술에서 대체로 받아들인 고대(노예제), 중세(봉건제), 근대(자본제)라는 시기 구분은 마르크스의 생산양식 개념에서 유래한 것이다.

생산양식의 전환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관적, 객관적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 마르크스주의가 경제결정론이라고 비판받는 이유는 생산력의 증대를 역사 발전의 제일 원인으로 꼽기 때문이다. 생산력은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객관적인 물질적 조건이고 생산관계는 사회적 관계이므로 인간이 능동적으로 작용을 미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생산력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란 말은 생산력의 발전으로 세상은 인간의 실천 없이도 저절로 변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역사 발전에서 인간의 주체적 역할을 부인하는 이런 해석을 생산력주의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도 생산력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적 실천이 개입할 수 있는 생산관계가 역사발전을 이끈다고 보는 이들이 있어서 두 입장 사이에 오랜 논쟁이 있었다. 생산력주의는 단순화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면 저절로 사회주의로 넘어간다는 역사관으로 귀결된다. 생산관계를 강조하면 주체적인 혁명적 실천이 더해져야만 세상은 변화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관계는 역사발전의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조건의 문제다.

경제결정론과 의지주의

마르크스 바로 다음 세대의 계승자들 상당수가 생산력주의자였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고도로 발달하면 공산주의 사회가 저절로 올 것이라는 역사 발전의 철의 법칙을 종교적 신앙처럼 믿었다. 공산주의 사회는 객관적 조건의 변화로 인해 필연적으로 온다면 혁명의 주체가 할 일이라곤 그 날이 언제일지 계산하고 그냥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들의 전술이 대기주의라고 불린 이유다. 대기주의는 역사발전의 객관적 원인만을 강조하는 입장의 논리적 귀결이다. 필연적인 법칙을 인식하는 것 외에는 인간이 역사의 과정에 끼어들 여지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임박할 것이라고 자기들 멋대로 생각했던 자본주의 붕괴가 오지 않자 순식간에 자본주의의 옹호자로 전향했다. 믿음이 맹목적일수록 변심도 극단적인 법이다.

이 입장의 정반대편에 의지주의가 있다. 의지주의는 인간 주체의 의지와 실천만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생각이다. 어떤 객관적 조건이 주어지더라도 우리가 온 정성을 다하면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상부구조 영역에서의 주체적 실천이 핵심이다. 근대 정치사상 중에서는 아나키즘이 이 입장을 대표한다. 아나키즘은 객관적 조건을 어느 정도는 고려하더라도 물질적 조건보다는 정신적 조건을, 경제적 조건보다는 정치와 종교를 비판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또 대중들이 자신들만큼의 의지를 가지지 못한다면 소수의 영웅들의 의지만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의지적 영웅주의의 극단적 형태가 테러리즘이다. 20세기 초반의 아나키스트들이 개인적인 테러에 의존해서 세상을 바꾸는 노선으로 기울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이 연재 내내 비판해온 이항 대립적 사고가 다시 등장했다. 경제결정론은 역사의 객관적 조건을, 의지주의는 주관적 조건을 관념론적으로 극단화한 것이다. 이 두 이론을 역사 속에서 생각해 보자. 경제결정론은 객관적 조건의 변화가 원인이 되고 상부구조에서의 변화는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인과관계가 예외 없이 관철된다고 본다. 시간적으로는 객관적 조건이 먼저 변화해야 그 다음에 인간의 의식, 정치, 문화 등이 변화한다. 순서를 뒤집으면 의지주의적 설명이 된다. 경제결정론자들에게 혁명은 때가 돼야 일어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혁명이 실패하는 이유는 올바른 때를 몰라서다.

20세기 초 베른슈타인을 비롯한 수정주의자들은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혁명주의자들의 혁명적 실천을 때 이른 또는 미성숙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것은 먼 미래에나 가능할 것이고 인간은 그 때를 예측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서구인들이 가까운 미래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무시했던 러시아 민중들의 자발적 실천에 힘입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고 룩셈부르크는 결국은 실패한 독일 혁명의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레닌은 제 때를 만났고 룩셈부르크는 성급했던 것일까?

객관 조건과 주체 실천의 변증법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방법인 변증법으로 우회해 보자. 변증법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상호 연관되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고 보는 사고방식이다. 사물과 현상들의 상호 연관은 이항 대립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데 유용한 방법이다. 역사 발전에서도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노력은 연결되어 서로를 끊이지 않고 변화시킨다. 객관적 조건의 변화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주체가 생겨나고 그들의 주체적 노력에 의해서 객관적 조건이 변화되며 변화된 객관적 조건이 다시 새로운 주체적인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 근대의 생산력 증대 특히 대공장의 등장이라는 객관적 조건이 농업에 의존한 봉건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던 노동자 계급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만들었다. 노동자 계급이 노동하는 방식도 변화한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건강, 교육 수준이 향상되었고 노동자들의 더 효율적인 노동 덕분에 생산력은 다시 증대되었다.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운동은 노동조건과 산업구조까지도 변화시켰다.

이렇게 변증법적 관점에서 보면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개념적으로는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연결되어 있고 경계도 모호하다. 생산력 발전은 인간 능력이 잠재된 상태에서 온전히 발현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이 다시 생산력을 증대시킨다. 중요한 점은 생산력 개념 안에 인간의 주체적 역량이란 의미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또 인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개발하고 본성을 온전히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른 인간 그리고 자연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 그래서 생산력은 그 자체에 인간들끼리의 그리고 자연과의 상호작용이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역사 발전의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이 상호작용한다면 생산력의 발전 정도만을 기준으로 객관적 조건의 성숙을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 시기를 알려주는 지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역사적 과정 바깥에 다시 현실을 재단할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세계관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세계관이다. 인간의 주체적 실천의 지침은 실천을 통해 객관적 조건과 서로 작용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통해 지표가 만들어지고 그 지표는 실천을 통해서 오류가 드러나면 다시 수정되는, 그런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며 앞으로 나가는 것이 역사 발전의 과정이다. 올바른 혁명의 시기는 언제인가라는 물음의 정답은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

대중은 어떻게 자발적 존재가 되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의 머리가 개머리판에 짓이겨져 살해당하고 시체는 차가운 강물에 던져진 바로 그날 아침, 그는 숙소를 나가면서 ‘베를린에 질서가 지배한다’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남겼다. 그 글은 그해 1월 봉기가 실패로 끝나고 질서가 지배하게 된 베를린의 경험을 해석하면서 1월 봉기의 실패가 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혁명의 성공은 미성숙한 실패의 결과, 때 이른 혁명 시도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지 객관적 조건이 성숙하고 그 조건을 인식한 지도자가 그려놓은 정교한 청사진을 대중이 따라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조건이 갖추어지고 주관적 조건도 성숙한 뒤에 단 한 번의 돌발적인 시도로 성공하는 혁명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 성공한 혁명은 실패한 혁명의 결과이고 모든 최초의 권력 장악 시도는 늘 때 이른 것이다.

기존 체제를 바꾸고 온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기존 체제가 충분히 성숙해서 저절로 다른 세상으로 바뀌는 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기존 체제 안에서 그것을 흔드는 때 이르고 미성숙한 실천에 의해서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어 간다. 조건이 더 성숙되면 다시 때 이른 그렇지만 앞서의 때 이른 것 보다는 조금 더 성숙된 주체적 실천이 가능해진다. 이런 상호작용의 과정 속에서 역사는 발전한다. 때 이른 실천의 과정에서 대중은 진정으로 자발적인 존재가 된다. 혁명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의 자발성은 수많은 때 이른 시도와 그 시도가 가져온 쓰라린 실패 그리고 작은 성공의 경험들의 긴 여정 끝에 얻게 되는 것이고 어느 지점에 도달했다고 해서 멈추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대중의 자발성의 진짜 의미다. 역사의 주체인 대중은 이런 끊임없는 미성숙한 시도를 통해 현실적으로 능동적이 된다. 인간 주체는 완결된 채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객관적 조건 속에서 행위하는 과정 속에서 완성되어 간다.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은 결정론도 의지주의도 아니며 낙관주의도 비관주의도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의미 있는 역사적 변화가 한 사람의 생애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변화의 끝을 볼 이가 자신이 아님을 알면서도 믿음을 가지고 때 이른 실천에 몸을 던지는 삶은 무척이나 쓸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이 역사의 긴 과정에 기여하는 기회라는 일말의 희망으로 그의 가슴은 설레기도 할 것이다. 그날 아침의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돌아오지 못할 것을 어느 정도는 예감하지만 용기와 설렘으로 거리로 나서고 돌이키지 않는 것. 테리 이글턴이 말한 “비관이 아닌 비극”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자의 삶이 그런 것이 아닐까? 이런 태도는 현실을 환상 없이 있는 그대로 보지만 새로운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세계관과 방법론 즉 유물론과 변증법에 꽤 어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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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수

    글쓴이의 열정은 좋으나, 역사학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 경제학 관점 하나로 역사를 바라본 것 같습니다.

    현대 자본주의라 불리는 경제현실도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기반한 면이 있으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이 있습니다.

    전형적인 자본주의 발전단계의 기준이 되는 유럽만 하더라도 발전과정에서 사회적 경제 요소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측면이 있을것입니다.

    개인의 이윤추구와 보이지않는 손에 의한 시장규칙으로 산업혁명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 안에 수많은 사람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을 것이고, 역사학도는 이런 면들을 두루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시장에서 개인의 선의들이 어떻게 작용해 지금의 경제를 이뤘는지,

    사람의 이기심만으로 과연 현재의 경제발전이 이뤄진 것인지

    이런 전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따져보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혁명과 개혁을 나누는 기준은 현재 사회가 절대악인지 아니면 선과 악이 섞여 공존하는 불완전한 상태인지 진단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상황은 물론 어둡고 때론 절망적인 게 맞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아기는 매일 태어나고 우리사회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놓지 않는 사람들의 선의로 지탱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인간관계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웹툰이 유행입니다.

    그만큼 팍팍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경제의 풍요로운 상태는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아닌

    사람의 여러 행위가 빚어낸 상황일 것입니다.

    이 와중에 우리가 어떤 가치를 택해야 하는지 성찰할 수 있게 하는 게 역사학의.몫이 아닌가 싶습니다.

    극소수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의 삶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할 필요도, 터부시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폭넓게 그 시대를 살았던 여러 대중의 역사를 살펴보고 현재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면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노동자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