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헌호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장 인터뷰
천용길 <뉴스민> 기자
경북 구미에서는 택시를 타고 “삼성, LG 공장으로 가 주세요”라고 말하면 혼쭐이 난다. 한두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형 공장이 밀집한 이 도시는 타지 사람들에게 ‘박정희의 도시’로 알려졌지만 사실 ‘노동자의 도시’이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도시’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빽빽한 공장 숲에 새겨진 대기업 로고에 숨겨져 있다. ‘LG 계열사에서 일한다’거나 ‘삼성 협력 업체에서 일한다’고 직장을 소개하지 소속된 하청 업체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주·야간 교대 근무는 기본, 잔업과 특근을 마다하지도 못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도시’인 구미 공단에 비정규직 노조는 없었다. 지난해 5월 구미4공단 아사히초자화인테크코리아의 하청 업체 지티에스 소속 노동자 138명이 아사히 사내 하청 노동조합(현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을 결성한 것이 처음이다. 단체 협상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원청 업체 아사히는 지티에스와 도급 계약을 해지했고, 해고 예고 통보가 날아왔다. 약 1년, 두 번의 희망퇴직서 작성을 거부한 23명의 조합원은 공장 앞에서 농성을 이어 가고 있다. 여기서 그만두고 직장을 옮겨도 하청 비정규직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이들 대부분은 구미 공단에 청춘을 바쳤다. 차헌호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장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한국합섬에 입사한 상주의 청년, 노동조합을 만나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스물셋 청년은 1995년 한국합섬에 입사하면서 구미 공단에 첫발을 디뎠다. 섬유 공장이 호황이던 시절이었다. 더불어 구미의 노동운동도 성장했다. 그해 12월 2일 한국합섬 공장에서 작업 중인 노동자 2명이 산업 재해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안전 교육 없이 탱크로리 안에 질소를 넣고 작업을 지시한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 한국합섬노조는 한국노총이었어요. 사망 사고가 발생하면서 민주노조로 전환하는 투쟁이 시작됐죠. 구속자도 나오고 분신도 하고. 그 투쟁이 구미에서는 굉장히 컸어요. 일이 힘들고 또래 친구들이 다 하니까 저도 노조에 가입한 거죠.”
한국합섬노조는 1996년까지 파업 투쟁을 이어 갔다. 45명이 구속됐고, 2명이 분신을 할 만큼 파장이 일었다. 천 명 가운데 한 명의 조합원으로 파업을 경험한 차헌호 지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온전히 승리한 투쟁은 아니었어요. 현장에 들어가서 싸움을 계속했고, 그 투쟁 끝나고 그만둔 사람도 많았고…. 일이 엄청 힘들었는데 파업을 하니 좋았어요. 특히 문화제요. 돼지도 잡고 노래도 부르고 신이 난 거죠. 당시 같은 조 사람들끼리 어울려서 공장 사수 중에 몰래 나가 먹을 것을 사 오기도 했어요.”
노동조합의 경험은 신선하고 즐거웠지만, 차헌호의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한국합섬에서 만 1년을 일하고 1996년 직장을 옮긴다. 한국합섬 바로 건너편 새로 지어진 금강화섬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최신 설비라 일이 더 편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몇몇 친구들과 함께 옮겨 2년 동안 별생각 없이 열심히 일했다. 섬유 업계는 계속 호황을 누렸고, 회사 매출도 늘어났다. 물론 노동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금강화섬에서도 1999년 10월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그는 금강화섬노조 결성과 함께 대의원이란 직책을 맡았다.
“노조 결성 무렵 한국합섬노조 동지들이 연대를 왔어요.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 대의원이나 간부가 되어 있더라고요. 1996년 파업할 당시 차광호 동지가 C조 대의원이었고 저는 B조였어요. 그런데 광호 형이 부위원장이 되어 왔어요. 연대 집회 자리에서 ‘여기 이 자리에도 한국합섬 파업 투쟁을 경험한 동지가 있다’며 저를 지목했고, 사람들은 제가 노조 활동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생각한 거죠.”
대의원을 맡으면서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구미는 섬유 공장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활동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한국합섬, 코오롱은 노조원이 각각 1천 명, 금강화섬도 300명이 넘었다.
“당시 구미는 큰 집회를 하면 2천 명이 모이기도 했어요. 금강화섬노조도 상근자만 4명이었고. 그러면서 고민을 시작했어요. 노조가 현장에서 임금 더 받고, 근로 조건을 개선하는 활동만 할 것인가. 조합주의를 벗어나서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해야 하지 않는가. 노조를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걸 알게 된 거죠. 학교에서는 전혀 배우지 못했던 노동자 철학을 공부하면서 놀랐어요. 노동자로 살아가는 게 가치 있는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지 스스로 깨우친 거죠. 아, 저는 지금도 노동자들이 꼭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금강화섬 565일간의 폐업 투쟁에서 노동운동 길을 묻다
2003년 차헌호는 설립 4년 차 금강화섬노조 지도부 선거에서 사무장으로 출마해 당선된다. 이 시기 그는 잊을 수 없는 두 가지 경험을 한다. 당시 3조 3교대로 돌아가던 근무를 4조 3교대로 바꾸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월 매출 100억이 넘는 공장을 3일 동안 정지시켰다. 노조 결성 후 첫 파업이었다. 이 파업 과정에서 차헌호는 조합원 대중의 힘을 믿게 됐다.
“파업 이틀째 공장에 들어가서 충격을 받았어요. ‘사고를 쳤구나.’ 쉴 새 없이 돌아가던 기계들이 모두 서 있는 걸 보니 두렵기도 했어요. 회사는 파업을 계속하면 공장 가동이 어렵다고 압박했고 지도부도 흔들렸어요. 파업 3일째 쟁의대책위에서도 의견이 분분해지기 시작했죠. 그래서 파업 3일 차 저녁, 조합원 300명을 모아서 파업 지속 여부를 물었어요. 투표했는데 ‘끝까지 파업하자’는 의견이 90% 정도 나왔어요. 이 투표 결과를 본 회사가 1시간 후에 4조 3교대에 합의하자고 했어요. 결국 조합원의 힘으로 파업을 더 밀고 나가서 승리한 거죠.”
승리의 경험만이 그에게 배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해 10월 금강화섬에서 폐업설이 흘러나온다. 동시에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의 분노가 분출하던 시기였다. 2003년 11월 9일 열린 전국노동자대회는 그야말로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었다. 배달호, 김주익, 이현중, 이해남, 이용석, 곽재규…. 손해 배상 가압류로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고, 해고와 구속이 빈번히 일어났다. 비정규직 문제도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차헌호도 전국노동자대회 선봉대로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그는 집행 유예로 풀려났지만, 금강화섬노조 조합원 1명은 징역 3년을 살기도 했다. 동시에 565일간의 폐업 투쟁이 시작됐다.
회사는 2004년 3월 문을 닫는다. 인수 업체가 나타났고, 고용과 노동조합, 단체 협약 승계를 요구하며 공장 사수 투쟁에 나섰다. 280명의 조합원이 처음부터 함께한 정리 해고 투쟁, 세 차례에 걸친 상경 투쟁, 인수 업체를 찾아다니면서 벌인 투쟁, 공장 사수, 점거 농성 등….
“처음부터 공장을 점거하고 1년 7개월 동안 공장에서 한 번도 나가지 않았어요. 마지막까지 공장에 41명이 남아 있었죠. 패배한 투쟁이라고들 이야기해요. 사실 폐업 투쟁은 전망이 없어요. 해산될 가능성도 크고. 장기간 막연한 싸움을 하는 거죠. 상대가 잘 보이지 않는…. 그래서 노조에서도 잘 지원하지 않죠. 결과적으로 보면 패배했지만 내용적으로는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를 포함해서 몇 명은 이 투쟁을 통해서 다시 노동자로 살아가는 걸 결심하게 됐죠. 그래서 후회가 없었어요. 시원하게 한판 잘 싸웠어요.”
2005년 12월 화학섬유연맹 위원장의 직권 조인으로 금강화섬 투쟁은 끝이 난다. 공장 사수 투쟁을 맡았던 차헌호에게도 수배가 떨어졌다. 그렇게 수배 생활이 시작됐다. 앞서 구속돼 집행 유예 3년을 받아서이기도 했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폐업 투쟁 기록을 책으로 엮어 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3개월을 꼬박 동료가 출근하고 나면 빈집에 들어가 글을 썼다. 그렇게 나온 책이 565일을 기록한 《공장은 노동자의 것이다》이다. 책을 출간하고서야 수배 생활을 마쳤다.
현장 노동자로 살고 싶었다
그는 2006년 9월 29일 구속돼 약 9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다. 그해 대구교도소에서 포항건설노조, 대구건설노조, 울산건설노조 노동자들이 함께 옥살이를 했다. 이들은 포항건설노조 무력화 저지와 하중근 열사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함께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차헌호 지회장은 2007년 6월 7일 집행 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된다. 석방 후 민주노총 구미지부 등에서 상근자 제안을 했지만 차헌호는 모두 거절한다.
“금강화섬 투쟁이 끝날 때쯤 구미 지역 노동운동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어요. 코오롱도 싸움을 시작했고, 화학 섬유 업종 경기가 나빠지면서 노동운동도 힘을 잃어 가고 있었죠. 구미 지역에서 상근하는 것보다 현장의 노동자로 살고 싶었어요. 노동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노동자가 돌아갈 곳은 노동 현장이었다. 그는 아사히 계열사에 입사했다가 3개월 만에 잘렸다. 이후 지게차 면허증을 땄고, 제일모직에 들어가 2년을 일했다. 그는 LG에 입사하고 싶었다. 구미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가 일하지만 민주노조가 없는 곳. 하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하청 업체였지만 입사할 때 국민연금 납부 내역 제출을 요구했다. 이전 근무 내역(한국합섬, 금강화섬)이 다 나와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노조가 있던 사업장에 근무했던 이들은 여기서 걸러졌다. 할 수 없이 다른 일자리를 찾았고, 2009년 9월 아사히글라스 하청 업체인 지티에스에 입사한다.
“회사에서는 리더였어요. 일반 회사로 따지면 반장이었죠. 일하면서 너무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말 한마디 하지 못했어요. 실수했다고 색깔 있는 조끼를 입히는 문제, 임금을 가지고 장난치는 문제 등…. 특히 사람을 무시하는 걸 보기 힘들었죠. 한번은 회사가 지급하는 작업복 질을 떨어뜨린 적이 있어요. 이를 문제 제기했다가 관리자들한테 6 대 1로 엄청 갈굼당했죠. 그때 생각했어요. 역시 혼자 싸워서는 안 되는구나.”
그렇게 6년이 흘렀다. 반장까지 올라갔고, 야근에 특근까지 하면 빠듯하지만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었다. 그렇지만 노동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그가 불편한 진실을 못 본 채 하기는 어려웠다.
2015년 노조를 만들었고, 지티에스 소속 노동자 약 160명 가운데 138명이 가입했다. 노조 활동 경험이 있던 그가 위원장을 맡았지만 과거 경험을 앞세워 나서지 않았다. 그는 6월 30일 자로 징계 해고돼 공장 출입도 불가능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해고된 다음 날인 7월 1일 아사히글라스는 지티에스에 도급 계약 해지를 통보했고, 지티에스는 희망 퇴직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제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나서는 것보다 노동자들이 다수의 힘을 발휘해 스스로 싸워 보고 승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전에는 관리자가 부당한 지시를 하거나 인격 모독을 해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머리띠를 묶으면서 일하고 구호를 외치고 노동자로서 자신감을 얻는 거죠.”
20대는 정규직으로, 30대는 폐업으로 직장을 잃었고, 40대는 하청 비정규직으로 살고 있다. 정규직이던 그가 비정규직이 되어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의 삶의 궤적을 보면 구미 지역 산업 변화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변화도 알 수 있다. 노동자 집회를 하면 2천 명이 모이던 1990년대를 지나 100명이 모이기도 어려운 현재. 차헌호 지회장은 “금강화섬 투쟁할 때도 비정규직 운동 이야기를 했어요. 당시에는 정규직이어서 머리로만 이해한 것 같아요. 비정규직이 되어 보니 기존 노조운동이 정규직 중심이라는 걸 여실히 느껴요”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금강화섬 투쟁은 그에게 일종의 ‘나침반’이다. 예전 경험은 완장이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교훈이 됐다.
“1년 7개월 동안 조합원들과 지지고 볶으면서 함께하는 법을 배웠어요.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지는 못하지만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았어요. 문제가 될 만한 사안들은 먼저 공개하고 의논하는 것, 힘들 때 힘들다고 이야기하고,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솔직히 이야기하고, 과하게 희망을 불어넣지 않고 현실 그대로 인정하며 투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술을 마시지 않아 조합원들과 긴 시간 이야기를 못 한다는 건 단점이지만 최대한 투명한 노동조합을 하려고 해요.”
이야기를 마친 그가 한마디를 더 꺼냈다.
“이 투쟁은 꼭 이겨야 해요. 구미역 앞에서 선전전을 하는데 자신도 비정규직이라며 음료수 한 상자를 사 들고 와서 ‘꼭 이겼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간 여성 노동자가 있었어요.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대기업 로고에 가려져 주눅 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어날 때 구미는 비로소 ‘노동자의 도시’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