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의 우상(idol), 두 신화의 마침표 ①
홍석만 편집장/ 사진 정운 기자
현재 대한민국을 이끄는 두 가지 신화는 다른 무엇보다 박정희와 노무현 신화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혀서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세를 실현했다는 박정희 성공 신화. 월남전에 파병되거나, 독일에 광부, 간호사로 나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열사의 땅 중동에서 건설 역군으로 일하며 목돈 쥐어 볼 수 있었던 시절, 경부고속도로로 유통의 혈맥을 넓히고 포항제철 건설로 상징되는 중화학 장대형 산업 육성으로 한국 경제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19년 동안 과연 한국 경제는 ‘신화적’으로 성장했을까?
한편 고졸 출신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인물 자체로 신화가 된 노무현. 조‧중‧동과 검찰 등 기득권 세력에 맞서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이룬 정치 개혁의 순교자로,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살다 갔다는 노무현의 신화는 얼마나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일까?
신화가 신화인 이유는 반드시 허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정말로 경제 신화의 주역이 될 수 있는지, 노무현이 정치 개혁의 신화를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한국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두 신화의 실체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확인한다. 이 기획은 박정희 신화(시즌 1)와 노무현 신화(시즌 2)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 글은 전체 기획의 소개 글이다.
- 박정희 신화의 허와 실
① 박정희 신화 vs 노무현 신화
② 박정희 경제 신화의 진실
③ 새마을 운동, 농촌은 과연 잘살았을까
④ 박정희 체제의 유산
⑤ 아버지를 배신한 박근혜?
박정희 신드롬에서 노무현 신드롬으로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발로 박정희의 인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일종의 신드롬으로 불렸다. 물론 이런 일이 저절로 이루어지진 않았다. 강준만은 박정희 신드롬을 <조선일보>, 조갑제, 군사 독재의 후신들에 의한 박정희 미화라고 비판했다. 조석곤은 이 신드롬을 ‘박정희 신화’로 규정하며, 일종의 영웅 사관이라고까지 평가했다. 하지만 부채질한다고 모두 불이 붙는 것은 아니다. 독재의 후예들에 의해 신격화되는 것도 사회적인 호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박정희 향수는 가벼운 바람에도 불길이 일었고 38년을 이어 오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전·현직 대통령 신뢰도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2007년에 시행된 역대 대통령 신뢰도 조사에서 52.7%가 박정희를 1위로 꼽았다. 당연히 노무현 정부에 대한 반발 심리로 자극된 박정희 향수였다. 이런 박정희 신드롬은 신자유주의로 인한 경제 위기와 외주화, 비정규직화 등 불안정 노동의 확산과 함께 불타올랐다. 2007년 말 대선에서 박정희 경제 신화의 후계자로 치장한 이명박 후보는 2위 정동영 후보의 두 배 가까운 득표를 하며 압승을 거둔다. 그 효과는 이명박 정부 초기까지도 이어졌다. 2008년 7월 <서울신문> 여론 조사에서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 73.4%가 박정희를 꼽았다. 이어 이승만 8.4%, 김대중 7.0%, 노무현 5.1%다.
이렇듯 2009년 5월 이전까지 정치인으로서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대통령 퇴임 당시 지지율도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퇴임 이후 박연차 비리에 휩쓸리면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검찰 수사까지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이 운명하기 불과 보름 전인 2009년 5월 중순 여론 조사에서도 75.6%가 대한민국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뽑았고, 김대중(12.9%), 노무현(4.4%) 순이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운명 이후 상황은 급반전했다. 노 전 대통령이 운명하고 한 달 후인 2009년 6월 신뢰도 조사 결과 박정희 38.1%로 여전히 1위를 달렸지만, 노무현 36.0%, 김대중 10.7% 순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호감도가 급상승해 오차 범위 내에서 박정희와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즈음 이명박 정부하에서도 경제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박 전 대통령의 신뢰도도 영향을 받았다. 2012년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 같은 조사에서 노 전 대통령은 35.3%로 31.4%에 그친 박 전 대통령을 최초로 역전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 집권 기간 노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을 약 10%포인트 격차로 계속 앞서 왔다.
이런 신뢰도를 반영하듯이 2009년 5월 이후 주요 정치 사안에서 두 신화를 둘러싼 공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나라당 광역단체장이 13명에서 6명으로 줄어든 2010년 6.2 지방 선거 당시 한나라당의 패인에 대해서 <중앙일보>의 박보균 편집인은 “노무현 신화에 매료된 젊은 세대의 지지를 되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무현 신화에 다시 기습당한다”고 평했다. 노 전 대통령이 운명한 지 1년 이후 치러진 선거였다. 산 한나라당과 죽은 노무현의 싸움이었다. 2012년 대선은 박 전 대통령 장녀인 박근혜 후보와 노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인 문재인 후보의 대결이었다. 누가 봐도 박정희와 노무현의 대리전으로 치러진 대선이었다. 막판까지 엎치락뒤치락했고 박근혜 후보는 고전 끝에 당선됐다.
이런 대립은 비단 선거 때만 있는 일이 아니다. 2014년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조차 정부 대응을 두고 ‘노무현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라는 말이 동영상과 함께 떠돌았다. 2016년 살인 가습기 살균제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가운데 정치권 책임 공방도 핑퐁 게임을 했다. 박정희의 후예들은 김대중 정부에서 독성 가습기 살균제를 최초로 허가했으며, 노무현 정부 때 문제가 발생했지만 그냥 덮고 넘어갔다고 주장한다. 반면 노무현의 후예들은 이명박 정부에서 산모와 아기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면서 그제야 역학 조사를 시작했고, 박근혜 정부 들어서 검찰이 수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시간만 질질 끌면서 문제를 해태했다고 했다. ‘오유(오늘의 유머)’ 게시판에서는 박정희와 박근혜를 악마화했고, ‘일베(일간 베스트)’ 게시판에서는 노무현과 문재인을 조롱했다. ‘모든 원죄는 박정희다’, ‘아니다 노무현이다’라는 식으로 정치가 양분되었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어떻게 신화가 되었나
박정희 신화는 무엇보다 굶주림에서 탈출했다는 경제 신화 일색이다. 이 과정에서 독재를 행사하고 빠른 성장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했지만, 어쨌든 한강의 기적을 이뤄 보릿고개를 없앴다는 것이다. 반면, 노무현 신화는 경제 기적과 같은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기득권층에 저항해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킨 흙수저의 성공 신화다. 민주주의 성장, 정치 개혁의 순교자,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바보 같은 짓도 서슴지 않는 ‘바보 노무현’이 바로 그 신화다.
따라서 박정희 신화와 노무현 신화는 ‘정치적 대체재’의 성격을 갖는다. 박정희에 부족한 민주주의가 노무현에게 있고, 노무현에게 부족한 경제 성장의 신화가 박정희에게 깃들어 있다. 이런 조건도 ‘신화되기’의 하나다. 신화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단순히 후대에서 신격화한다고 모든 것이 신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중의 (공통된) 경험에 의해서만 형성된다. 아무리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서 국부로 추앙하고 미화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바로 대중의 경험 때문이다. 박정희 경제 신화는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중을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사회 경제 체제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 신화는 집단적 경험으로 한 세대를 거쳐 지속할 수 있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대중 동원의 첫 번째 예는 월남전 파병이다. 1965년부터 전투 부대를 파병하기 시작해 1973년 철군할 때까지 8년 5개월 동안 월남전에 참전한 인원은 32만여 명에 달한다. 박정희 정부는 월남전 파병 대가로 받은 돈을 개발 자금으로 사용했는데, 참전 수당 2억 5000만 달러, 국군 장비 현대화 지원금 15억 달러, 유상 차관 및 무상 원조 43억 달러 등 67억 달러의 자금이 유입됐다. 당시 수출액이 1억 달러에 불과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엄청난 자금이었다. 명분 없는 전쟁에 개입하면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5,000여 명의 사망자와 1만 5천여 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얻은 결과다.
또한 1973년에 1차 오일 쇼크가 터지자 국내 경제는 타격을 받았지만, 고유가로 오일 머니가 넘쳐 나는 중동에 1974년 이후 100만 명이 넘는 건설 인력을 파견했다. 수년씩 중동에 파견 나간 사람들은 돈을 벌어 집으로 송금했다. 1970년대 이런 중동 붐으로 엄청난 오일 머니가 국내로 들어왔고 이 돈으로 경제 거품이 최초로 나타났다. 부동산으로 돈이 쏠리면서 각종 개발 바람을 일으켰고,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부동산 불패 신화를 만들어 냈다.
박정희식 대중 동원의 백미는 새마을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 정부 주도 농촌 개혁 운동으로 출발했지만 도시까지 번져 ‘하면 된다’는 신화의 밑바탕을 제공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새마을 운동은 농가 부채의 근원이 됐다. 이 과정은 나중에 다시 살펴본다.) 새마을 운동의 가시적인 성과로 초가집이 없어지고 마을 길도 넓어지면서 청년들은 농촌이 아니라 오히려 도시로 나갔다.
박정희 이후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 박근혜 등 실제로 대중을 동원해 정치적 장으로 가져간 대통령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오히려 대통령 당선 이전에는 그 경험을 강력하게 형성했으나 대통령 당선 이후 대부분 순탄한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노무현은 완전히 달랐다. 시작부터 끝까지 대중 동원에 성공했다. 2000년 총선에서 지역 구도 타파라는 명분으로 패배가 뻔한 부산에 다시 출마했을 때, 정치인 최초의 팬클럽이 결성됐다. 바로 노사모다. 노사모는 처음 300명으로 시작했지만 2004년 탄핵 반대 열풍이 절정에 달했을 때 10만 명에 육박했다. 사실상 노무현의 정치 부대 성격을 갖는 이 노사모는 이후 상당한 정치적 자산과 기반이 됐다.
또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 결정에 당내 주류가 반발해 민주당이 분당 위기까지 치닫고, 선거 전날 밤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도 깨지자 인터넷은 선거 참여 열기로 들끓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노란색으로 물결쳤고, 노무현은 인터넷으로 여론을 뒤집은 최초의 대통령 당선인이 됐다. 대중은 이 경험을 통해 자신들이 만든 대통령이라는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다시 2년 후 이어진 탄핵 정국에서 탄핵 반대 여론이 폭증하면서 탄핵 반대 촛불 시위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참여하며 매일 밤 이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당선시킨 대통령을 우리가 지켰다’는 대중의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또 하나 신화적 요소가 가미되는 것이 바로 비극적인 죽음이다. 단순히 경제 성장으로만 보자면 박정희 때보다 전두환 때 성장률이 더 높았다. 그러나 전두환을 경제 신화를 이룬 대통령으로 기억하지는 않는다. 또한 한국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역대 대통령 중 김대중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2009년 9월 별세하지만 신화로 추앙받지는 않았다. 1979년 10.26과 2009년 5월의 사건이 없었다면 두 대통령은 신화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이 “노무현에 대한 마음은 강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를 보는 부모의 심정”이라고 표현하듯이 ‘지못미(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가 바로 노무현 신화의 근원이다.
개발 독재 성장 신화 vs 신자유주의 성공 신화
박정희 집권 당시 정말로 경제가 신화적으로 성장했는지 검토하기에 앞서 확인할 것은 박정희 정권의 기본적인 경제 방향이 수입 대체 산업화와 수출 주도 성장을 택했다는 점이다. 2차 산업을 중심으로, 그것도 경공업보다는 중장대형 산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 주도 성장 전략을 구사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집권 초기 국가 주도의 산업화 전략에서 중기로 넘어가면 재벌 육성 전략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민간에는 포항제철과 같은 중장대형 사업체를 인수할 돈도 없었다. 오히려 고리의 사채를 쓰느라 빚만 늘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조치가 바로 1972년 8.3 조치 즉, 사채 동결 조치다. 모든 사채를 3년간 동결하고 3년 후 5년간 분할 상환 할 수 있게 했다. 이처럼 박정희 경제 신화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2차 산업의 신화’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국가가 주도하여 독점 자본을 양성하고 키워 나갔다는 점에서 케인스적인 신화이며, ‘개발 독재의 성장 신화’라 할 수 있다. (박정희 신화는 이어지는 연재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룬다.)
반면, 노무현 신화는 또 다른 배경을 갖고 있다. 그것은 1997년 외환 위기가 한국 사회 전반에 던진 충격과 산업 재편을 가속하면서 야기한 기존 지배 체제 몰락과 관련이 있다. 독점 재벌 중심의 산업 구조에서 금융 주도의 개방화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조응하는 한국 사회 지배 권력의 재편 과정에서 기존의 권위에 대한 공격과 파괴를 노무현은 날 것 그대로 받아안았다. 그러나 노무현의 위치는 이중적이었다. 개발 독재로 정형화된 구체제에 대한 도전으로서 정치 개혁을 추구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노동자와 민중의 저항을 억압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2004년 탄핵 정국을 돌파한 노무현은 이때부터 국정 운영 기조를 완전히 달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FTA이다. 2005년 실무 협의를 거쳐 2006년부터 한미 FTA를 공식적으로 추진한다. 삼성이 설계한 한반도 금융 허브 전략을 추구하면서, 한미 FTA 등 전방위 FTA 전략과 함께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나아갔다. 또한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면서 민영화 자체는 하지 않지만 공공 부문을 영리화, 시장화하는 데 박차를 가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노무현 정부 당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추진한 의료 영리화 사업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로 인해 노동자와 농민, 도시 서민들의 반발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신자유주의 경찰국가 논란은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됐다. 구조조정, 비정규직화로 노동 현장의 분쟁은 빈발했고 손해 배상과 가압류, 비정규직 확산 등 노동 탄압으로 노무현 집권 초기부터 김주익, 이용석 등 수많은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분신 자결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분신으로 투쟁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질책하기도 했다. 2005년 11월 24일, 노무현 정부의 쌀 개방 정책에 반대하며 시위하던 전용철 농민이 전투 경찰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했다. 2006년 5월 평택 미군 기지 이전 부지 내에서 지역 주민과 인권·시민·노동단체들이 점거하던 대추리 분교를 경찰 1만 3,000명, 용역 업체 직원 1,200여 명, 군인 2,000여 명을 동원해 강제 철거했다. 이처럼 노무현은 기득권층만을 대상으로 투쟁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등 민중에도 엄청난 박해와 탄압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노무현의 성공 신화, 민주주의와 정치 개혁의 신화는 개발 독재의 유산인 구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에서 자유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는 새로운 체제로서 공공 부문의 영리화와 시장화, 금융 시장 완전 개방, 한미 FTA 체결 등 신자유주의 체제의 확립이라는 ‘신자유주의 성공 신화’이다. 지역 구도 타파와 정치 개혁으로 표현되는 구체제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신자유주의 체제 확립을 위해 경찰국가를 통한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억압이라는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계속)
(워커스 11호 201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