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만/ 작가.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소설을 쓴다.
[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들에 개입해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다. 지민은 새 보안 담당자로 부임한 하미강 대위와 함께 가상 현실 속의 평양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홀로 평양을 지키고 있는 김정은을 만난다.
부유하는 노랫소리는 머뭇거리는 지민의 발걸음을 다시 끌어당겼다. 발걸음을 되돌릴까 생각도 했지만 이 아동 백화점 건물 안에서는 지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민은 노랫소리를 따라가기로 했다. 공포 영화에서 보면 늘 이러다가 죽던데…. 지민은 생각했다. 가상 현실 안에서도 죽을 수 있겠지. 모퉁이를 돌아 백화점 2층에 들어섰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이들 모습이 아니었다. 노랫소리는 갑자기 멈췄고 아이들도 멈췄다.
색깔을 모두 잃어버린 공간에 아이들은 마치 오래된 흑백 선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 있었다. 아이들은 하늘로 날려 버릴 듯이 입꼬리를 추켜올리고 양손을 올리고 서 있었다. 지민은 그것이 오래된 영상 자료에서 본 장면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깜부기불과 같은 여명의 희미한 불빛은 아이들의 얼굴에 띤 미소를 더욱 깊게 패어 보이게 만들었다.
“얘들아, 안…녕?”
지민은 아이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서며 처음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을 마주하는 교사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네킹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 옷차림은 제각각이었는데 하나같이 지저분하다는 것이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어떤 아이는 몸에 맞지도 않는 어른 군복을 입고 소매를 접어 올렸고, 여자아이 하나는 제법 괜찮아 보이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다 해어져 살갗이 보일 정도였다. 미소 지은 입의 갈라진 틈으로 보이는 이빨은 검었고 손은 모두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지민 역시 아이들처럼 미동도 않은 채 그들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숨을 쉬거나 눈을 깜빡거리거나 간지럼을 참지 못하고 몸을 뒤트는 아이가 없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한밤이 찾아오고 별이 뜨고 구름이 흘러갔다. 에이도스 안의 시간은 현실의 시간과 상관없이 그렇게 흘러갔다. 지민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해가 뜨고 별이 물러가고 달이 차오르고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불어온 돌풍과 폭우에 유리창이 깨지고 비바람이 몰아닥쳤지만 아이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불어온 바람에 먼지가 씻겨 내려가 검은 물줄기가 되어 바닥에 얼룩을 그리고 다시 햇볕에 말라 바스락거리는 먼지가 되어 공기 중을 떠돌고, 다시 빗물에 녹아내려 얼룩이 되는 동안 아이들도 먼지처럼 탈색되었다. 지민마저 색깔을 잃어 갈 무렵에 에이도스의 외침이 들려왔다.
“지민 씨, 움직여요! 이대로 있으면 신경계 인터페이스가 그대로 고착되어 뇌 손상이 올 수 있어요!”
“어디로 간단 말이야?”
지민이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하얗게 얼굴을 뒤덮은 먼지가 부스스 떨어졌다. 눈꺼풀을 깜빡여 먼지를 떨어내고 시선을 돌려 보았지만 창밖은 무너지고 있었다. 대동강의 물은 끓어 넘치고 하늘은 피 흘리고 있었다.
총성이 울렸다.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지민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가위에 눌리다 막 빠져나온 사람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그는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거리의 단단한 포석은 모두 들끓어 엉망진창이었다. 갈라지고 깊게 파인 도로의 균열을 뛰어넘어 지민은 총성이 울린 방향으로 달렸다.
“지민 씨, 지금 멈춰야 해요.”
“알아, 에이도스. 하지만 지금 이 특이점을 그냥 둘 수는 없어. 이 붕괴 현상은 복제 인스턴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오리지널 인스턴스 안에서도 똑같이 벌어질 일이야. 새로운 행성에 세계를 복원했을 때에도 똑같이 벌어질 일이겠지? 왜 진작에 경고하지 않은 거야?”
“수차례 했어요. 무시당했지만요. 나중에 기록을 살펴봐요. 북한을 빅 프로즌에서 제외시켰을 때 데이터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진공이 된 이 지점이 하나의 특이점이 되어 연쇄 붕괴를 일으킬 수 있다는 리포트를 정확하게 열네 번 보냈거든요?”
가시 돋친 에이도스의 말투에 지민은 자신이 그런 리포트를 받은 적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빅 프로즌에 저장되는 데이터 정합성은 그의 감독 업무이기에 그런 리포트라면 그녀에게 전달해야 마땅했다.
“누군가 리포트를 가로챘어.”
지민은 어렵지 않은 결론을 내렸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복잡하게 머리 굴릴 필요도 없군. 북한이 빅 프로즌에 가입하지 않아서? 아니, 그것은 핑계야. 의도적으로 고립시켜야 할 세계가 필요했으니까. 그 이름만으로도 공포와 치환되는 단어. 새로운 세상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공포가 되어야 할 존재. 그런 나라가 필요했겠지. 모두의 영원한 적국. 대를 이어 괴물의 이름을 물려받는 나라가 필요했어. 필요하면 언제든 끌어다 쓸 수 있는 공포. 하지만 실체는 장막에 가려져 영원히 알 수 없는 나라로 만들어야 했겠지.
공포는 무지(無知)에서 온다.
지민은 화이트보드에 큼지막하게 써 놓은 문구를 떠올렸다. 잠시 떠오른 과거의 기억을 떨쳐 버리며 지민은 김 주사를 부축하고 달리는 미강에게 달려갔다. 사살 혹은 납치가 임무라고 그랬지?
지민은 필사적으로 김 주사를 보호하려고 총질을 하는 미강의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 그들에게 달려드는 들개, 혹은 늑대 어쩌면 나무나 바위일 수 있는 그 어떤 것에도 놀라지 않았다. 특이점이 일어나는 가상 현실의 공간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한 사람을 증오하고 그를 죽이기 위해 훈련받았던 군인이 사살 대상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지고 있는 광경도 별다르지 않았다.
“세상에! 정 박사! 어디 갔다 온 거예요?”
“화장 좀 고치고 왔어요. 이쯤하고 종료할까요? 밖에 나가서 할 일이 많아졌어요.”
미강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지민을 쳐다보다 그의 등 뒤로 달려드는 들개(혹은 그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를 향해 총을 쏘고는 김 주사를 가리켰다.
“이 사람을 이대로 두고 나가자고요?”
미강의 절박함과 난폭함이 동시에 머무는 얼굴을 본 지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대위! 지금까지 그 총으로 몇 발이나 쐈죠?”
미강은 자신이 손에 쥔 권총을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권총을 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총에는 몇 발이나 장전되죠?”
“아홉 발. 약실까지 열 발. 지금까지 수천 발을 쏜 것 같은데… 총열이 전혀 뜨겁지가 않아요.”
미강이 중얼거리자 지민은 그를 달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처음에는 혼란스러울 수 있어요.”
사실 나도 겨우 두 번째지만. 지민은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에이도스, 종료.”
이틀 뒤 팀장은 지민의 시선을 피해 가며 모니터 위에 떠오른 문서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혼 소송 변호사가 보낸 청구서를 바라보는 표정이었다. 문서의 끝에서 눈을 뗀 그는 여전히 지민의 시선을 피한 채 안경을 벗고 콧등을 주물렀다.
“정 박사, 이건 말이야…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에이도스의 리포트는 저도 봐야 했어요. 특이점 때문에 일종의 진공 상태가 온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일이 다 헛수고가 될 수 있어요. 앞으로 할 일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현상이 평택 섹터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닐 거라고요. 북한과 관련된 모든 나라에 있는 섹터들은 모두 정합성에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라는 거 알면서 그래?”
팀장의 목소리에 짜증이 비치자 지민의 목소리는 더 올라갔다.
“종말을 앞두고 정치요? 지구뿐 아니라 태양계 전체가 깡그리 먼지가 될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정치요? 빅 프로즌 계획은 이대로 가면 없는 것보다도 못한 세계를 만들 거예요! 다른 섹터들의 경고가 아직 없었다는 게 더 이상할 정도라고요.”
“그럼 어쩌자는 소리야? 당장 미국이랑 중국보고 북한으로 쳐들어가 전 인민의 머리카락을 뽑아 DNA 정보를 채취하고, 문서고를 깡그리 털어 빅 프로즌에 강제로 저장해야 한다고 주장할래?”
팀장은 그제야 지민의 얼굴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위험성은 알려야죠! 하나의 세계를 고립된 채로 놔둘 때 다른 세계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 에이도스가 계속 경고했던 지점이 그거라고요. 세계가 새롭게 복원되어도 여전히 남아 있는 빈 공간 때문에 다른 세계들이….”
“그들은 빈 공간으로 놔두지 않을 거야.”
팀장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거두려는 듯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지민은 바로 그 자리에서 반문하지 않았다. 단지 미처 못 들은 척했다.
‘그들?’
팀장은 말을 돌리기 위해 한결 부드럽게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오메가 플랜의 헤드 섹터에서도 북한을 아예 포기하진 않았어. 시간이 걸린다고.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데 밖에서 아무리 문 두드리며 소리쳐 봐야 뭐하나. 열어 주기 전까지는….”
“그럼 좀 더 세게 두들겨 봐야죠.”
지민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방을 나서며 침묵의 도시에서 독재자의 연기를 하며 홀로 살고 있을 남자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