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Book of Days①

이재만 작가 / 사진 홍진훤


 

[인물 소개]

지민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에이도스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하미강 오메가 섹터의 격리 구역 보안 담당자로

부임한 해병 장교.

[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들에 개입하여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다.


 

하미강 대위와의 평양 여행 ─ 그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지만 ─ 이후 지민은 온통 북한 문제에 몰입했다. 팀장이 말한 ‘그들’이 누구인지, 의도적으로 북한을 데이터 공백 영역으로 놔두려는 시도에 대해 명확한 증거를 찾으려 애썼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자 지민은 미강과 자연스럽게 데면데면한 사이로 돌아갔다. 흡사 술기운에 잠자리를 같이한 직장 동료를 피하듯이 미강은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지민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지민으로서는 당장 신경 쓰이는 일이 산적해 있어 그런 미강의 변화를 모른 척했다. 지민은 조심스레 다른 지역의 오메가 섹터와 연락할 방법을 궁리했다. 자신같이 복제 인스턴스를 이용해 가상 역사를 만들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각 섹터 간의 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민과 마찬가지로 빅프로즌 계획에 깊이 관여하고 에이도스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연구자들의 신원은 대부분 극비에 부쳐져 그들과 접촉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사건은 엉뚱한 데서 터졌다.

“뭐, 뭘, 번역해요?”

“승정원 일기②요. 드디어 국문 완역본 작업을 마쳤습니다. 다음주에 언론에 정식으로 공개될 거예요. 표지 디자인 때문에 원장님이랑 소장님의 미학적 견해 차이가 너무 심해서… 돋을새김으로 하느냐 음각 후에 금박으로 새겨 넣느냐를 놓고….”

지민은 손을 들어 표지 시안을 보여 주는 연구원의 입을 막았다. 갓 서른을 넘긴 얼굴의 연구원은 태블릿의 전원을 켜고 표지 시안 이미지를 스크린에 띄웠다. 그는 지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승정원 일기의 국역본 표지 디자인 시안들을 화면에 늘어놓았다. 어떤 디자인이 더 마음에 드는지 대답하지 않으면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지민은 한국고전번역연구원 직원들이 가져온 인쇄물과 데이터가 든 하드 디스크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승정원 일기라니. 학부 시절 교양 수업 때 이름만 들어 본 게 다였다.

‘아마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완역본을 볼 수 없을 겁니다.’

지민은 그때 수업을 진행하던 교수가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그 양반이 재작년에 돌아가셨던가? 2100년에야 완역본 작업을 마칠 수 있다던 승정원 일기의 국문 번역 작업이 2062년인 지금 완료되었다는 소식에 지민은 뇌가 아득한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장 희망찬 전망조차도 번역 완료 시기를 2080년으로 잡고 있었다. 매년 예산이 정확하게 집행되고 오류 검증 과정을 일정에 맞춰 잘 수행한다는 전제하에서만. 예정대로라면 승정원 일기의 국문 완역은 지구, 아니 태양계가 멸망할 때까지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번역 기간을 40년이나 단축할 수 있었어요?”

지민의 물음에 고전번역원의 실장 직함이 찍힌 명함 ─ 아마 한 번 보고 다시는 꺼내 보지 않을 명함이었다 ─ 을 내민 남자가 대답했다.

“트리니티라고 부르는 새 시스템 덕분입니다. 오역과 교차 검증에 들어가는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했지요.”

역사 분과의 다른 연구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지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메가 플랜은 에피델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인공 지능 기술로 수익 사업도 벌이고 있었다. 오메가 플랜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각종 상업용 인공 지능 시스템을 개발하여 판매한 뒤 그 수익을 오메가 플랜에 몽땅 쏟아붓고 있었다.

데이터의 정합성을 판별하는 지민의 업무상, 이전에 쓰인 조선 관련 역사서나 기록물에 대한 검증 작업을 다시 수행해야 할 판이었다. 당장 지민의 옆에 앉은 역사 분과 연구원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만 보아도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한 명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전 못 해요, 차라리 죽이세요’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고전번역연구원 직원들이 던져 놓고 간 자료들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접견실 안에서 여덟 명의 역사 분과 연구원들과 지민은 그것을 잃어버린 성궤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분위기는 긴말이 필요 없었다. 한마디로 저걸 열면 우린 죽는다였다.

“순창에서 노비가 벼락 맞아 죽은 것③까지도 기록해 놓은 게 《조선왕조실록》이에요. 《승정원 일기》는 실록의 열 배도 넘는 분량이고요.”

연구원 하나가 볼멘소리를 했지만 그보다 나이가 좀 더 많은 연구원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 중 ‘수용’의 단계에 이른 듯 주섬주섬 자료들을 카트에 챙기며 말했다.

“그래도 인조(仁祖) 이전의 기록은 소실된 게 어디야. 그것까지 있었다면….”

“그러게요. 근데 누가 사라진 임오화변④ 때 일기를 발굴한다든가 하면 어쩌죠?”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연구원들을 따라 자료 보존고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지민의 머릿속은, 새롭게 추가된 《승정원 일기》 국역본이 빅프로즌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느라 바빠졌다. 수작업으로 할 경우 다시 검증해야 할 역사서, 관련 기록물, 소설,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만화, 인터넷 뉴스까지 합치면 몇 년이 더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4일하고 여섯 시간 걸리겠네요.”

방호복을 입은 채로 바닥에 앉아 있던 지민은 에이도스의 말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빨리?”

지민은 멍청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에이도스의 연산 능력과 강력한 추론 능력은 인간의 이해 범주를 뛰어넘는다. 새롭게 추가된 《승정원 일기》의 국역본 자료 중 일부는 이미 에이도스가 분석을 마친 상태였다. 마지막에 추가된 숙종과 정조대의 자료가 다른 자료와 충돌하는 지점을 찾아내면 된다. 충돌은 보통 추가된 《승정원 일기》 자료와 실록의 기록이 서로 상이할 경우 일어난다. 단순한 오기나 누락은 보충을 하면 되지만 어느 한쪽이 다른 정보를 갖고 있을 경우 다른 한 쪽에 배치되는 정보를 주석으로 남기는 형태가 된다. 영화나 만화는 창작자의 재량에 따라 실록을 일부 왜곡하거나 아예 재창작하는 수준으로 바꾼 경우들이 많았다. 덕분에 주석은 하늘의 별만큼 늘어나고 있었다.

방대한 조선사 자료의 주석을 더 늘리는 데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은 국어학 분과 연구원들이 심심풀이로 벌인 장난에도 원인이 있었다.

업무 배정의 실수로 일주일 동안 아무 업무도 배정받지 못한 한 연구원은 ‘노는 게 심심해서’라는 이유로 2000년대의 텔레비전 사극에 나오는 대사를 중세 한국어로 다시 번역하여 자막을 입히는 작업을 시작했다. 다른 연구원들에게 이 작업이 알려지자 참여자는 두 자리 숫자로 늘었고, 그들은 순전히 재미로 휴식 시간을 쪼개어 <정도전>이나 <용의 눈물> 같은 KBS 사극 대사들을 중세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다. 가만 놔두면 MBC 드라마 <선덕여왕>까지 7세기 고대 한국어로 번역할 기세였기에 지민은 그 ‘놀이’를 중단시켰다.

에이도스는 지민의 요청으로 만든 복제 인스턴스에 먼저 《승정원 일기》의 국역본을 추가한 다음 분석을 진행하기로 했다. 오리지널 인스턴스에 추가하기 전에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해 보자는 의견이었다. 지민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겨 에이도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승정원 일기》의 국문 번역 작업 최종 결과물들과 번역 중간에 나온 초역, 수정고들이 모두 에이도스에게 인계되었다. 해제뿐 아니라 영인본 이미지까지 모두 입력하는 데 나흘이 걸렸다. 그 기간에 지민은 격리 구역과 연구 분과 건물을 오가며 자료의 이동을 검수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마침내 모든 자료가 복제 인스턴스 안에 저장되고 에이도스가 연관 자료들과의 오류 검증에 나서자 지민은 한숨을 돌렸다. 이제 사흘 뒤 에이도스가 내보낼 오류가 의심되는 항목 리스트를 받아서 그것을 검증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에이도스의 호출이 온 것은 사흘이 지나기 전이었다.

지민은 방호복을 입은 채로 주저 앉아 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사흘이면 끝난다고 자신 있게 말했잖아?”

“자신 있게 말한 적 없어요. 그간의 기록량을 감안해서 예상을 말했을 뿐이에요.”

“자신 있게 예상했잖아!”

지민은 일곱 살 어린아이처럼 땡깡을 부렸다.

에이도스의 목소리는 어쩐지 볼멘소리처럼 들렸다.

“어디서 꼬였는지 찾는 중이에요. 복제 인스턴스에 《승정원 일기》 국역본을 추가하고 난 다음에 평양에 갔을 때처럼 특이점이 생기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요. 이걸 해결하자면 연산을 36년 정도 더 해야 할지도 몰라요.”

“36년 뒤면 지구도 태양계도 사라지고 난 다음이야! 이미 100년 전부터 번역 작업을 해 온 책이 인스턴스에 추가되었다고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리 없잖아? 이게 무슨 사탄의 책도 아니고! 내가 직접 봐야겠어. 접속시켜 줘!”

 

(계속)

 

② 1623년부터 1910년까지의 조선 왕실에서 일어난 왕명, 출납, 행정과 사무 등을 매일 세밀하게 기록한 1차 사료. 체계적이고 방대한 기록물로서 2억 5천만 자에 달하는 글자 수와 방대한 정보량 때문에 현재도 번역 작업이 진행 중이다. 고전번역원에 따르면 한글 완역 시기를 2100년이 지난 다음으로 예상하고 있다(이명학 원장 “승정원 일기는 93년 뒤에나 완역 가능”, <동아일보>, 2014.5.14.).

③《태종실록》17권, 태종 9년 6월 13일.

④ 1762년(영조 38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사건.

 

(워커스12호 201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