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의 우상, 두 신화의 마침표 ②
송명관 / 사진 정운
[편집자 주]
현재 대한민국을 이끄는 두 가지 신화는 다른 무엇보다 박정희와 노무현 신화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혀서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세를 실현했다는 박정희 성공 신화. 월남전에 파병되거나 독일에 광부, 간호사로 나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열사의 땅 중동에서 건설 역군으로 일하며 목돈 쥐어 볼 수 있었던 시절, 경부고속도로로 유통의 혈맥을 넓히고 포항제철 건설로 상징되는 중화학 장대형 산업 육성으로 한국 경제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19년 동안 과연 한국 경제는 ‘신화적’으로 성장했을까?
또한 고졸 출신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인물 자체로 신화가 된 노무현. 조중동과 검찰 등 기득권 세력에 맞서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이룬 정치 개혁의 순교자로,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살다 갔다는 노무현의 신화는 얼마나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일까?
신화가 신화인 이유는 반드시 허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정말로 경제 신화의 주역이 될 수 있는지, 노무현이 정치 개혁의 신화를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한국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두 신화의 실체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확인한다. 이 기획은 <미디어충청>과 공동으로 진행되며, ‘참세상 주례 토론회’에서 사전 논의된 내용을 반영한다.
1. 박정희 신화의 허와 실
① 박정희 신화 vs 노무현 신화
② 박정희 경제 신화의 허와 실
③ 새마을 운동, 농촌은 과연 잘 살았을까
④ 박정희 체제의 유산
⑤아버지를 배신한 박근혜?
- 노무현 신화는 있는가 (이후 계속)
이식된 산업화 전략과 군사 정권의 ‘더러운 돈’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했을 당시 남한과 북한의 경제적 차이는 얼마나 됐을까? 1961년 한국의 1인당 GNP는 북한과 필리핀의 40%에 불과했다. 당시 한국은 전후 미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원조를 받는 나라였다. 그에 비해 경제적 발전은 매우 더뎠다. 일각에선 그 이유가 이승만 전 대통령이 경제 개발 계획이라는 것 자체를 혐오했기 때문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계획 경제’를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50년대 중공업 중심의 계획 경제로 크게 성공한 북한의 경제력은 남한보다 2.5배나 됐다.
그래서일까? 북한의 중공업 중심의 발전을 흠모했던 박정희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중공업 중심의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했다. 박정희는 이승만과 달리 계획 없이 부패만이 횡행하는 시장주의를 싫어했다. 그래서 집권 초기엔 1950년대 원조 경제의 단물만을 족족 빼먹었던 부패한 관료와 재벌을 단죄하려 했다. 또한 총을 들고 쌀가게의 쌀을 강제로 압수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 공급 하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보여 준 이런 통치 행태는 당시 사회적 혼란과 갈등에 염증을 느꼈던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그러나 의욕만 있고 구체적인 전략은 마련하지 못했던 초기 쿠데타 세력은 경제 정책에 대해 매우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전 장면 정권의 경제 개발 정책을 모방하기도 했다. 당시 원조 경제의 한계를 알고 있었던 미국은 4.19 혁명으로 등장한 장면 정권에 자신이 제시하는 경제 개발 전략을 이식하려 했다. 그러던 와중에 5.16 군사 쿠데타가 벌어져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미국은 우유부단했던 장면 정권보다는 사회적 혼란을 진정시키고 경제 개발 계획을 강하게 밀어붙일 군사 정부를 선호했다.
그런데 미국이 이식하려 했던 한국의 경제 전략은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 산업화 전략이었다. 원조의 조건도 이러한 전략 수용과 결부되었다. 특히 미국은 한국에 일본과의 수교를 요구했다. 미국은 한국이 일본과 경제적 분업 관계를 형성해, 한국의 경제 발전과 함께 동북아 안보 협력을 이루는 배경을 만들고자 했다. 이런 전략적 인식 때문에 5.16 쿠데타 묵인, 한일 협정 강요, 수출 드라이브 주입으로 이어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중공업 자립화 노선은 미국의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 산업화와 충돌했다. 미국은 한국이 무리하게 중공업을 일으키기보다는 경공업 중심의 수출 경제를 통해 대만처럼 일본의 하청 기지로 기능하길 원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열위에 놓였던 박정희 정권은 중공업 육성 정책을 밀어붙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반대했던 미국과의 마찰 때문에 중공업에 필요한 상업 차관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국내 자본을 동원하기 위해 직접적인 시장 개입을 하게 된다.
주식 시장 개입과 통화 개혁의 실패, 그리고 수출 주도 경제 등장
집권 초기 중앙정보부는 한국전력의 주식을 고의적으로 올리는 작전을 폈는데, 1년 정부 예산의 10%에 가까운 20억 환을 취했다. 1963년 3월 미 안보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중앙정보부가 증권 조작으로 2~3천만 달러(현재 가치 1억 7500만 달러, 대략 2000억 원)를 취했다고도 나온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1962년 6월 10환을 1원으로 바꾸는 통화 개혁을 극비리에 단행했다. 당시 통화 개혁의 목적은 장롱 속에 있는 돈을 끄집어내 은행 금고 속으로 넣는 것이었다. 그렇게 늘어난 예금을 경제 개발 자금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기대했던 것만큼 돈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예금했던 돈을 자유롭게 인출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돈의 융통이 멈춰 경제 전체가 대혼란에 빠졌다. 당시 전체 공장의 45%가 가동 중지 상황을 맞는다. 결국 미국이 개입해 7월 13일 예금 인출이 재개된다. 이 사건은 미국과 마찰 속에서 중공업을 일으키려고 했던 박정희 정권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 계획을 수정해 중공업 자립화 노선을 포기하고 경공업 중심의 수출 산업으로 전환했다. 1960년대 세계 경제는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선진국들의 수요가 많았다. 신발, 의류, 가발, 인형 등 후진국들의 값싼 상품들이 많이 팔리던 시기였다. 뜻밖에 수출이 매우 잘되자 실리에 눈이 밝던 박정희 정권은 재빨리 수출 주도 성장을 자신의 업적으로 이미지 마케팅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1961년 당시 저축률은 3.9%로 매우 낮은 상태였다. 정기 예금 금리가 15%였지만 물가 상승률은 20%나 됐기 때문이다. 1962~1971년 평균 물가 상승률은 한국 12.4%, 대만 2.9%, 일본 5.7%였다. 낮은 저축률로 국내 자본 동원이 어렵자 외자 도입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일 협정으로 인해 들어올 6억 달러(3억 달러 무상, 3억 달러 차관)는 매우 탐나는 돈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각에선 당시 굴욕적인 한일 협정에 대해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인 양 포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박정희 정권에게는 미국이 요구한 한일 관계 개선이 별 문제될 게 없는 사안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집권 시작 단계부터 일본계 자금을 서슴없이 가져다 썼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 국교 수립 이전인 1961~1965년 사이에 6개의 일본 기업들로부터 6600만 달러를 제공받았는데, 이는 훗날 기밀 해제된 미 중앙정보국 특별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다. 이것으로 볼 때 1965년 한일 협정은 이미 짜 놓은 각본에 마침표를 찍는 것에 불과했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만이 중요했던 박정희 정권에게 다른 정치적 외교적 사안은 부차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기회주의적이고 실리적인 태도는 이후 베트남 참전으로도 이어지는데, 당시 전쟁 특수로 실제 수입만 10억 달러나 됐다.
결국 ‘더러운 돈’과 ‘피묻은 돈’이 박정희 경제 신화의 종자돈이었던 셈이다. 이를 바탕으로 1962~1971년 동안 경제 성장률 9.3%(세계 평균 5.3%)라는 고도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제조업의 경우 연 15~20%씩 성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높은 물가 상승률 속에서 외자 도입에 기댄 기형적인 고도성장이었다.
1970년대 불안정한 세계 경제와 중화학 공업 재개
1970년대 세계 경제는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빠진다. 1970년대 초 쌍둥이 적자(재정 적자, 무역 적자)에 빠진 미국은 수입품에 10% 부가세를 매기는 조치를 취했는데, 전체 수출의 50%를 미국에 의존했던 한국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 무렵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수령 속에서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는데, 이는 미국이 냉전 수행의 두 축인 유럽과 동아시아에 대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적극적 역할을 맡기는 힘들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1971년 주한 미군 1개 사단을 철수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외적 변화는 박정희 군사 정권으로 하여금 자주 국방을 위해 군수품을 자체 생산할 필요를 느끼도록 했다.
이 두 가지 외부적 환경 변화와 북한과의 체제 경쟁은 박정희 정권이 그토록 염원했던 중공업 육성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1972년 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에서 제철, 석유 화학, 기계, 조선 등이 중점 육성 사업으로 제시된다.
한편 이러한 전략적 변화를 뒷받침했던 경제적 요인이 존재했다. 당시 선진국들은 자신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중화학 공업이 점차 사양 산업이 되자 이를 개발 도상국으로 이전시키길 원했다. 특히 인건비가 많이 드는 조립 가공 산업에서 두드러졌다. 1970년 2차 한일경제협력위원회 총회에서 일본은 노후화된 조립 가공 산업과 철강 산업을 향후 10년간 한국으로 이전하고 싶다는 제안을 한다. 일본이 부품을 주면 한국은 조립을 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일본은 산업 이전을 위해 차관까지 한국에 제공했다. 그래서 이후 한국의 남동 임해 공업 지역과 일본의 서부 공업 지역이 협력 경제권으로 묶이게 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여기에 매우 파격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매우 낮은 이자, 3년간 세금 면제 이후 50% 감면 등이었다. 이처럼 중화학 공업 중심의 불균형 성장 전략은 이 부분에 진출한 재벌들에게 심각한 자금 배분의 쏠림 현상을 낳았다. 일종의 도박 같은 성장 전략이었다.
1차 오일 쇼크와 중동 특수
중화학 공업 추진은 때마침 터진 1973년 10월 ‘1차 오일 쇼크’ 때문에 시작부터 난항을 겪었다. 그런데 이런 위기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천운을 만나 해소된다. 바로 중동 특수이다. 당시 세계는 오일 쇼크로 경제 위기를 겪었지만, 오히려 중동 국가는 막대한 오일 달러로 부가 늘어났다. 이 때문에 중동 국가는 대규모 인프라 사업을 추진했고, 한국 기업이 매우 낮은 가격으로 입찰해 수주를 따낸 것이다. 당시 전체 수출 총액의 40~50%에 이르렀다. 한국 기업은 중동 특수를 통해 수년 동안 40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벌어들이게 된다. 재벌은 앞 다퉈 중동 사업에 진출했고, 이렇게 벌어들인 돈이 다시 중화학 공업에 투자되어 자동차 산업, 전자 산업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이런 성과는 매우 낮은 입찰 가격으로 이룬 결과다. 당시 한국 기업은 유럽을 비롯한 다른 나라 경쟁자보다 촉박한 공사 기간 속에서도 가격은 절반으로 맞춰 공사를 했다. 이런 한국 기업의 파격적인 계약 조건을 중동 국가가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한국 기업이 중동 특수를 독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파격적인 조건은 낮은 인건비와 높은 노동 강도가 수반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중동 특수로 벌어들인 달러는 중동에 파견된 노동자들의 피와 땀으로 벌어들인 돈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불균형 경제 성장이 가져온 경제 위기와 빈부 갈등의 폭발
1960~1970년대 고도성장은 박정희 정권이 줄곧 취해 온 재벌 중심 불균형 경제 성장의 결과이다. 외형적 지표로 보면 한국은 중진국 대열에 들 만큼 성과를 거뒀다. 실제 1979년 1인당 GDP는 1,858달러였는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6,430달러 정도이다. 이는 현재 러시아 중국보다는 다소 낮고 남아공, 태국보다는 높은 수준이다. 현대건설은 미국 포춘지가 선정하는 세계 100대 기업 안에(78위) 들어갈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경제 성과의 과실이 재벌을 비롯한 특정 계층과 특정 업종에 몰리자 사회적 불만이 높아졌다. 특히 중동 특수가 가져온 부동산 투기 현상은 엄청났는데, 서울의 아파트 가격이 매년 30%씩 상승했다. 전국 평균 지가 상승률은 1976년 26%, 1977년 34%, 1978년 49%였고, 심지어 1978년 서울은 지가가 135.7%나 오르기도 했다. 이런 부동산 폭등은 큰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는데, “국민 소득 1천불 시대가 왔다고 중진국이 되었다고 좋아들 하는데, 대신 5천불 물가 환경에 살고 있다”라는 푸념이 회자될 정도였다.
이런 높은 물가 상승 속에 사회적 빈부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었다. 당시 국책 연구 기관에 따르면 전체 평균 소득의 1/3 이하인 상대적 빈곤 인구 비율은 1970년 5%에서 1978년 14%로 크게 늘어났다(<동아일보>, 1980.6.25.). 1979년 평균 임금은 11만 4천 원이었으나, 최저 생계비는 15만 3천 원에 달했다.
한편 박정희 군사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하던 중화학 공업마저 곳곳에서 중복 투자와 과잉 투자의 후유증을 겪게 되는데, 이로 인해 조업률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중화학 공업은 석유 의존도가 커 1979년 2차 오일 쇼크에 취약했다. 급기야 위기를 직감한 박정희 정권은 1979년 4월, 경공업 육성, 내수 증진, 물가 안정, 투기 억제를 담은 ‘4.17 경제 안정화 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뒤늦은 안정화 조치는 이미 심각한 위기에 빠진 경제를 되돌리기에 역부족이었다. 불균형 성장, 불평등 심화, 높은 물가 상승은 1970년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민생 위기를 동반한 경제 위기로 번지게 된다. 특히 1977년 신설된 부가 가치세 도입은 민심 이반의 결정타를 제공했다. 당시 최저 생계비 이하의 소득을 받는 소득세 면제 대상자가 1976년 74.6%, 1978년 76.7%나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세수를 충당하기 위해 여러 가지 소비세(간접세)를 신설한 것이다. 1977년 시행 첫해는 세율이 13%였는데, 6개월 동안 2415억 원이 징수됐다. 이는 당시 전체 세수의 14.4%나 차지하는 규모였다. 당연히 노동자 서민들의 고통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79년 터진 2차 오일 쇼크는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심각한 민생 위기로 폭발했다. 원유 값은 한 달 새 두 배 인상되었고, 중화학 공업 가동률은 30%대로 추락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석유 값 60% 인상을 발표했고, 사재기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연탄 값도 40% 인상했다. 여기에 버스비와 전기세도 각각 30%, 35%씩 인상됐다. 이런 경제 상황은 다음 해 1980년,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런 배경 속에 1979년 ‘부마 항쟁’이라 불리는 민란이 터져 나온 것이다. ‘부마 항쟁’ 시위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은 도시 서민과 빈민들이었다. 당시 부산시경의 보고서를 보면 시위 군중들의 면면은 이러했다고 한다. “야간이 되자 시위대는 도시 하층민들이 사실상 주도하게 되었고, 이들의 직업은 때밀이, 식당 종업원, 공장 근로자, 구두닦이, 접객 업소 노동자, 영세 상인, 무직자, 반실업 상태 자유 노동자, 고교생 등이었다.”
박정희 경제 신화에 대한 평가
만약 우리가 1960년대 말에 살고 있다면, 박정희를 1950년대의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민생 문제를 해결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1970년대 말에 살고 있다면 그에 대해 혹평할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박정희의 무리한 중화학 공업 추진은 재벌 중심의 자원 배분 왜곡과 비효율을 낳았고, 물가 불안으로 민생고를 격화시켰다. 이런 경제를 진정시키고 물가를 안정시킨 건 그 다음 정권인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중화학 공업 육성은 1980년대 ‘3저 호황’을 맞아
그 결실을 맺게 된다. 한편 우리는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박정희 정권부터 내려온 관치 금융, 정경 유착,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의 폐해에 대해 수많은 지적을 들었다. 아마도 우리가 1990년대 말 박정희 경제 신화를 평가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경제 전략으로 치부할 것이다. 외환 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은 그의 이런 유산들을 청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박정희 경제 신화가 신자유주의가 한창 확대되던 노무현 정권 중후반부터 급격히 재생산되고 있다. 당시 한나라당의 두 대선 후보였던 이명박과 박근혜는 박정희 후계자 코스프레에 몰입했고, 이후 차례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데 실제 그 두 대통령은 각각 ‘비즈니스 프렌들리’와 ‘규제 완화’로 표상되는 열렬한 신자유주의자들이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박정희 경제 신화는 서사만이 남아 있는 신화이다. 신화는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믿음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금 박정희 경제 신화에 대해 평가하고자 하다면 신화 뒤에 가려져 있던 역사적 사실과 정세의 인과적 관계를 먼저 들춰 내야 할 것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 전략에 종속된 경제 개발 계획, 산업화 종자돈을 얻기 위한 일본과의 굴욕적인 거래, 베트남 전쟁으로 얻은 피 묻은 돈, 일본을 모방하고 재벌에 집중한 불균형 성장 전략, 심각한 빈부 격차와 노동 빈곤층의 고된 삶, 중동 모래 사막에서 살인적인 철야 노동으로 긁어모은 오일 달러, 부동산 불패 신화라는 고질병이 시작된 시대, 이처럼 박정희 경제 신화에 가려진 진실은 너무나 많다.
송명관 참세상연구소(준). 《부채 전쟁》을 함께 지었고 참세상 주례 토론회를 기획하고 있다.
(워커스12호 201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