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들 때마다 삶이 변한다
홍재희, 황윤을 듣다
홍재희 | 독립 영화 감독. 비정규 자유 노동자로 경계에서 흔들리며 살고 있다. 영화도 만들고 글도 쓰고 놀기도 하는데 굶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지향한다.
‘화창한 봄날 오월’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30도를 오르내리는 때아닌 무더위가 찾아온 일요일 한낮. 제1회 채식 축제가 열리는 서울 혁신 파크.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북한산 자락이 멀리 보이고 아름드리나무 아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채식으로 점심을 먹는다. 누군가는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반가운 사람을 만나 수다를 떤다. 누구는 유기농 빵과 쿠키를 내놓고 누구는 수제 차를 내리고 누구는 직접 만든 생필품을 팔고 있다.
그곳에서 얼마 전 총선에서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던 황윤 감독을 만났다. 2001년에 만든 다큐멘터리 <작별>에서부터 최근작 <잡식 가족의 딜레마>까지 생명에 대해 지금껏 감독이 보여 온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떠올린다면 그녀를 만날 곳으로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다.
홍재희(홍) 이번 총선 때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는데 선거가 끝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나?
황윤(황) 일상으로 돌아왔지. 선거 기간 동안 방치한 가족을 챙기고 밀린 일 처리하고 건강도 챙기고. <잡식 가족의 딜레마>를 책으로 쓰기로 계약했는데 선거에 출마하는 바람에 한참 늦어졌다. 큰일이다.
홍 오! <잡식 동물의 딜레마>가 책으로 나오나. 기대하겠다.
황 쯧쯧. 잡식 동물이 아니라 잡식 가족이라니까.
홍 끙! 미안하다. 영화 <잡식 가족의 딜레마>와 책《잡식 동물의 딜레마》가 헛갈렸다.
황 사실 그 책 제목이 내 영화 <잡식 가족의 딜레마> 부제였다.
홍 그런데 녹색당 비례 대표 후보로 나가게 된 계기가 뭔가?
황 직업 정치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꿈에도 한 적이 없다. 내 관심 영역도, 적성도 아니고.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솔직히 떠밀려서 나갔다. (웃음)
홍 그렇다면 녹색당에서 황윤을 후보로 민 까닭은 뭘까.
황 그런 건 녹색당에 물어봐야지. (웃음) 대신 내가 왜 받아들였는지는 말해 줄 수 있다. 내가 계속 고사하니까 15년 지기인 이유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이러더라. ‘네 자식한테 이런 세상 물려줄 거야?’ 그게 너무 가슴에 찔렸다. 내가 나름대로 열심히 다큐 만드는 이유도 이런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다. 다만 영화만으로는 안 되는 거 잘 안다. 정치가 변화해야 세상이 바뀌지. 영화로 아무리 떠들고 이야기해도 제도권 정치에서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변화란 절대 오지 않으니까. 한계를 느끼고 답답했다. 녹색당원으로서 녹색당 원내 진출에 대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래서 선거운동 정말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거지.
홍 정치 활동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사회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거네?
황 그렇지. 다큐 감독들은 대부분 관심이 많지.
홍 선거 운동 기간에 특히 기억나는 일은?
황 사람들이 관심을 가장 많이 보였던 ‘인간 황윤을 팝니다’ 퍼포먼스. 홍대 거리에서 동물원에 갇힌 동물처럼 정형 행동을 흉내 내며 우리 속에 있었다. 동물들은 갇혀 있으면 뱅글뱅글 돌거나 왔다 갔다 머리 흔들고 부딪히고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나더러 안 힘들었냐고 많이들 묻는데 동물원에서 평생 살아야 하는 동물을 봐라. 영역이 엄청나게 넓은 코끼리, 호랑이, 북극곰 이런 동물들이 좁은 공간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한다. 공장식 축산의 암컷 돼지는 축사 안에서 제 몸을 돌릴 수도 없다. 그런 거에 비하면 다섯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 만들 때 늘 갇혀 있는 동물들의 처지와 심정을 상상했는데 실제로 잠깐이나마 체험해 본 것이다.
홍 차후에도 녹색당 후보로 나올 생각은?
황 절대 없다. (웃음)
홍 이런. 너무 단호하다.
황 한 번으로 족하다.
홍 그러면 되나. 이번 총선에는 녹색당이 원내 진출에 실패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녹색당 원내 진출에 도움을 주어야지.
황 (불쑥) 0.9! 그러니까 0.8 몇인데 반올림해서 0.9! 18만 2301명!
홍 뭔 소린가?
황 4년 전에 선거를 치른 한 녹색당 후보가 표를 세면서 ‘떨어졌지만 우리는 십만 몇천 개 도토리를 심은 거다’ 그러더라. 그 도토리가 언젠가 숲을 이룰 거야 하면서. 그런데 이번에 내가 정말 그러고 있더라. 딱 한 번 숫자를 봤는데 단번에 외워지대. (웃음) 그러니깐 이번 총선에 녹색당은 전국에 18만 2301개 도토리를 심은 거다.
홍 그게 나중에는 180만 명이 될 거다.
황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될 날이 오겠지.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뛴다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게 있다. 선거 제도 자체가 너무 불합리하다. 정당 투표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투표 용지가 두 장 인 걸 모르는 사람도 많고. 하여간 너무 모른다. 이게 국민이 무지한 탓이냐. 전혀 아니다. 정부가, 선관위가 할 일을 안 했다는 소리다. “정당투표는 지역 후보를 찍는 것과 다르다, 유권자가 사는 지역과 상관없이 지지하는 정당을 찍는 것” 이것을 적극적으로 국민들에게 홍보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익숙한 정당만 찍게 하려는 꼼수가 아니라면, 모든 국민이 알 수 있게 정당투표를 적극적으로 홍보했어야 한다.
홍 의심스럽네! 정말.
황 선거법상 비례대표 후보는 지역후보와 달리 마이크를 쓰지 못하게 돼 있다. 실상 그런 건 비례 후보한테 더 필요한 건데. 지역 후보는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후보가 되려면 1500만 원 기탁금을 내야 한다. 돈 없는 사람들, 청년들은 아예 도전도 못 한다. 금수저 후보만 나오라는 거지. 장벽이 너무 많다. 예전 유신 시대에 소수 정당이 원내 진출하는 걸 막으려 만든 악법이다.
홍 그리고 그 외에?
황 또 있다. 비례 후보는 명함을 본인과 배우자만 돌릴 수 있다. 이게 얼마나 웃겨.
홍 선거 운동하는 사람은?
황 못 돌린다. 생각해 봐라. 옛날에는 후보가 거의 남자니까 후보 배우자인 아내가 명함을 돌렸다. 그런데 시대가 바꿨다. 이젠 여자 후보도 많다. 후보가 결혼 안 한 사람, 혼자 사는 사람, 사별한 사람, 이혼한 사람, 동성애자는? 배우자가 장애인이면? 배우자가 출근하면? 출장 가면? 교직원이나 공무원이면 정당 지지도 못 하는데? 시대착오적이다.
홍 선거법을 확 고쳐야겠다.
황 후보와 배우자가 아니라 후보가 지명한 운동원 1명 뭐 이런 식으로 바꿔야 한다.
홍 그래서 선거 운동은 어떻게 했나?
황 당원들과 함께 사력을 다해 선거운동을 했지만, 선거제도의 불함리함 때문에 소수정당이 원내진출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울컥)
홍 당 문제나 후보 자질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인 것 같다. 정말 고생 많았겠다. 선거 후 쓰러지지나 않았는지 걱정된다.
황 나는 체력이 워낙 좋다. 술만 끊으면 된다. (웃음)
홍 채식주의자라 들었다. 언제부터 채식을 했나?
황 다큐멘터리 <잡식 가족의 딜레마>를 만들고 나서부터 했다. 그전까지는 돈가스 치킨 마니아였다. 정말 좋아했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난 삶이 변한다.
홍 채식주의자가 되니 달라진 건?
황 우리는 항상 육식을 정당화하잖아. ‘인간은 원래 잡식동물이라서 고기 먹는게 당연하다’ 이런 식으로. 그런데 우리는 요즘 잡식동물이 아니라 마치 육식동물처럼 육류를 많이 소비하고 있다. 현대인의 육류 과소비는 자본이 강요한 시스템 때문이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공장식축산을 장려했고, 국민세금으로 대규모 밀집사육을 지원했다. 육류생산이 늘어나면서 소비도 최근 20-30년간 폭발적으로 늘었다. 나도 돈까스, 치킨 좋아했었다. 그러나 내 건강을 망치고, 동물들을 고문하고, 인간의 유일한 서식지인 지구를 종말로 치닫게 하면서까지 육식을 계속할 이유가 내겐 없다. 고기를 안 먹기로 결정하고 깨달은 게 있는데 내가 원래 고기를 별로 좋아한 사람이 아니었다. 학교 회사 회식자리든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는 줄 안거다. 그러다보니 내 입맛을 착각하게 한 거지. 심리적으로 육식은 이데올로기다. 육식을 그만둔다는 건 나한테 사회가 강용하는 시스템을 벗어던진다는 것과 같다.
홍 일상과 삶이 이어지는 영화가 황윤을 바꿔 놓는 걸까.
황 그렇다. 영화가 내 삶이 되고 내 삶이 또 영화가 되고. 뫼비우스의 띠 같다.
홍 독립 다큐멘터리는 거의 감독이 혼자 하는데 안 힘드나.
황 어쩔 수 없다. 어렸을 때 엄마가 점을 봤는데 내가 어깨를 쓰면 쓸수록 복을 많이 받는다는 운명이라고 했단다. 그래서 내가 이런 직업을 택하게 된 게 아닐까. 다큐 감독들 죄다 짐이 무겁다. 가방 메고 카메라 가방에 트라이포트까지 기본 가방이 최소 세 개.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고 그러다 영화가 나오고 그 영화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게 어깨가 주는 상징적 뜻이 아닐까 싶다. (웃음)
홍 앞으로도 다큐멘터리스트로 남을 건가.
황 두말하면 잔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