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마르크스주의'는 단일체가 아니다

[서평] 도메니코 로쉬르도의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 글은 ⟪서구 마르크스주의: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사라졌으며,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Western Marxism: How It Was Born, How It Died, How It Can Be Reborn)⟫ - 도메니코 로쉬르도 저, 가브리엘 록힐 편집 (먼슬리 리뷰 프레스, 2024) - 의 서평이다. 로쉬르도는 20세기 유럽과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반식민주의 사회주의 운동을 부당하게 폄하한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그의 광범위한 비난은 그가 공격하는 풍부하고 다양한 지적 전통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출처: Allison Saeng & Unsplash+

도메니코 로쉬르도의 ⟪서구 마르크스주의: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사라졌으며,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는 전기 충격처럼 당신의 눈을 뜨게 하거나 고통스러운 충격을 줄 수 있다. 유럽과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대한 그의 분노에 찬 비판은 '현실 사회주의'는 반식민지 해방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엉뚱한 논리로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킨다. 그는 사회주의의 실제 성공 사례는 회색 공장, 5개년 계획, 비대한 관료, 서구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복지 국가 승리가 아니라 삼판(작은 배), 쿠바 리브레, 대약진 운동에 있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이런 형태의 주장 자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1955년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1917년의 유산이 “반식민지 국가들이 ... 현대적인 생산 방식으로 변화하기 위한 ... 정치가 되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로쉬르도의 전제는 그보다 훨씬 더 대담하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예기치 않게도 민족 독립 운동에서 실현되었다. 덩샤오핑은 이를 간결하게 표현했다: “사회주의에서 벗어나면 중국은 필연적으로 반봉건주의와 반식민주의로 퇴행할 것이다.”

로쉬르도가 책 전반에 걸쳐 강력하게 주장하는 도발적인 핵심 주장은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사상가들이 이러한 발전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결과 반식민지 사회주의 운동을 무시하거나 노골적으로 적대시해왔다는 것이다. 많은 유럽과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저술가들이 이러한 민족 해방 투쟁의 성취와 도전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결국 로쉬르도는 자신이 공격하는 지적 전통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포괄적 비난에 그치고 만다.

승리를 패배로 만들기 

칼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대로 국가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중요한 요새로서 굳건히 섰다. 마르크스주의의 성공은 예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농민 사회를 무장시켜 제국주의적 정복의 사슬을 끊도록 고무하여 발전 도상 국가들이 도시적 착취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 데 있었다. 로쉬르도는 책의 첫 두 장에서, 그가 '두 번째 30년 전쟁'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간결하고 날카로운 개관 속에서, '난징 대학살', 아돌프 히틀러의 유럽 내 '대륙 식민 제국' 건설 계획, 그리고 튀니지와 알제리의 약탈에 대한 대응으로서 소련의 사례를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중국, 북아프리카, 베트남에 제공한 이론적 자산을 밝힌다. 

에른스트 블로흐, 테오도르 아도르노, 루이 알튀세르를 비롯한 유럽 좌파의 가장 날카로운 사상가들이 소외를 한탄하며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대해 고찰하는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회주의의 꿈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때, 집단적 소유, 노동자 권력, 사회적 양심, 대중의 의지, 탈취된 자원의 회수라는 이상에 의해 뒷받침된 덜 마비되고 전투에 준비된 마르크스주의가 민족 국가들의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세계의 3분의 2가 명목상 사회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로쉬르도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놀라운 승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공산주의가 파시즘을 물리치고 그로 인해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 개혁이 부상하는 것과 함께, 서구 좌파에게 대부분 무관심하게 받아들여졌다.

로쉬르도의 거침없는 태도가 그를 우리 시대의 주요 논의의 중심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목록에서 제외시켰을지도 모르지만, 이는 부당한 일이다. 좌파 대안 역사에 대한 그의 공헌은 오랫동안 비견할 데 없었으며, 그의 저서들은 광범위한 참고문헌과 흔치 않은 인용에 대한 통찰을 담은 다언어적 역작이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저서에서 그는 항상 드문 자료들을 발굴하여 독창적 읽기와 기존의 통념을 전복하는 해석을 엮어낸다. 주요 저작 외에도 청소년기 작품, 폐기된 초안, 강의 노트 등을 포함하여 그의 ⟪헤겔과 근대의 자유(Hegel and the Freedom of Moderns)⟫ (1992), ⟪하이데거와 전쟁의 이데올로기(Heidegger and the Ideology of War)⟫ (1991), ⟪니체, 귀족적 반항자(Nietzsche, the Aristocratic Rebel)⟫ (2002), ⟪자유주의: 대안 역사(Liberalism: A Counter-History)⟫ (2005)는 영미 이론계가 부끄럽게도, 혹은 미묘하게 대륙 철학의 우익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여주면서 조금씩 그 영역을 잠식해왔다. 

가브리엘 록힐과 제니퍼 폰스 드 레온의 활기차고 정보가 풍부한 서문에서는 로쉬르도의 지적인 궤적과 이탈리아 공산당 및 그 분파들에서의 활동가로서의 삶을 되짚으며, 로쉬르도의 눈부신 학문적 생산성 뒤에 숨은 중요한 비밀을 밝혀낸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의 많은 원자료들은 그의 동반자이자 동지인 에어드뮤트 브리엘마이어에 의해 발굴되었다. 그들의 공동 성과는 수많은 세부 사항 속에서 주장을 간결하게 추출해낸다. 이 방법의 단점이 있다면, 로쉬르도의 저작들은 모호성을 음미하거나 예외를 수용하거나 모순을 해결하기보다는, 학문적 망치를 들고 주장을 강하게 전달하는 논문형 저작이라는 점이다. (프랑스 이론에 대한 CIA의 열정을 세밀하게 조사한 놀라운 저작을 포함하여 록힐의 최근 저작은 많은 유사한 장점과 단점을 보여준다.)

로쉬르도의 이야기하듯이, 대도시 좌파가 공산주의의 실제 궤적을 인식하지 못한 이유는 철학적 도피의 미세한 싸움이나 조직적 투쟁의 노동에 대한 소시민적 혐오감 때문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조국과의 동일시 때문이었다. 이는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워하고 타인에게 철저히 숨기려 했던 것이다. 로쉬르도는 이러한 점에서 서구 마르크스주의 비판의 핵심에는 모순이 존재하며, 그것이 명목상 반대했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굴복하고, 심지어 연대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로쉬르도는 다양한 정도로 테오도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 에른스트 블로흐, 루이 알튀세르, 노르베르토 보비오, 안토니오 네그리,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심지어 장폴 사르트르와 세바스티아노 팀파나로까지 겨냥한다 (게오르그 루카치나 안토니오 그람시는 제외한다). 그는 이들 모두가 기껏해야 망설였고, 최악의 경우 "제국주의적 보편주의”와 “친식민주의”를 조장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쿠바, 기니비사우, 서벵골, 앙골라, 이집트, 베트남 및 다른 국가에서 실제로 권력을 잡은 혁명가들은 봉쇄, 사보타주, 잔인한 침략, 그리고 악의적인 허위 정보의 파도에 맞서 사람들을 먹이고 대중의 지지를 유지해야 하는 혼란스러운 현실과 맞서야 했다. 그 불순한 과정은 당연히 타협을 수반했으며, 소수의 노동계급만이 존재하고 기술 발전이 거의 없는 지역에서의 지도자들의 정책은 거의 어느 누구의 혁명적 교본에도 일치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로쉬르도에게 '서구'라는 용어는 지정학적 위치보다는 이러한 실망에 대한 사전적인 반동, 그리고 이러한 현장 투쟁에서 세계적 변화의 씨앗을 헤아리지 못한 실패를 의미한다. 반대로, '동구'는 무기력한 서구 좌파 지식인들의 한탄이 아니라 실제로 권력을 가진 사회주의를 가리킨다.

로쉬르도는 인도와 중국의 독립에서부터 1979년 니카라과 혁명에 이르는 반자본주의적 승리가 유럽과 미국의 널리 읽히고 존경받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거의 축하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를 폐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던가? 소련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관료적 과잉과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농민 게릴라들의 거친 대중 구호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민족주의적 목적을 위해 마르크스를 차용하는 과정에서, 부재 원인으로서의 역사, 몫 없는 이들의 몫, 혹은 '사건' 개념과 가치 이론의 풍부한 복잡성이 조금이라도 드러난 흔적이 있었는가? 제3세계에서의 이러한 왜곡된 마르크스주의를 칭찬하는 것은, 노동에서의 해방과 전인적 인간 발전을 염두에 두고 계급 없는 사회를 구상한 지적 설계자들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이 두 가지 가치는 현대화를 향해 달려가는 가난한 국가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쉬르도는 교리를 과정보다 우선시하는 이러한 태도가 전쟁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반영한다고 불평한다. 제국주의의 약화는 보기 좋은 일이 아닐 수 있다(오히려 끔찍한 희생과 혹독한 노동 체제, 군사화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패배의 현실적 실행이다. 로쉬르도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레닌은 많은 동지들이 이를 아일랜드의 쿠데타로 치부하던 1916년 부활절 봉기를 영국 통치에 맞선 정당한 저항으로 옹호했을 때 분명히 이를 이해하고 있었다.

일련의 날카로운 대조 속에서, 로쉬르도는 서구 좌파에 만연한 국수주의적 '깨끗한 손' 정신을 묘사한다. 개발 도상국들은 과학과 기술을 자율성의 수단으로 여긴 반면, 유럽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이를 물화, 기계화, 전쟁과 연관 지었다. 전후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저서들에서 비자본주의적 미래는 블로흐의 '아직 아닌(not yet)'이나 네그리의 '신실한 다중(multitudo fidelium)'에서처럼 유대-기독교적 메시아주의의 색채를 띤 언어로 “절대 타자(Absolute Other)”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주변부 국가들이 과잉 발달된 서구 거주자들과의 공통된 인간성을 확립하고자 했을 때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그들의 이론적 대화 상대인 미셸 푸코 같은 이들이 역사에 대한 '과학'의 열쇠로 반휴머니즘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이는 “순수성의 해석학이라는 게으른 자의성"에서 위안을 찾았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들)를/을 옹호하며

이 일반적인 그림의 일부 요소들은 설득력 있지만,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제기된 많은 구체적인 주장들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예를 들어, 페리 앤더슨의 ⟪서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고찰(Considerations on Western Marxism)⟫(1976)은 전투로 단련된 마르크스주의에서 치명적으로 벗어난 사례 A로 제시되는데, 앤더슨을 (서문 저자들이 부르는 것처럼) "서구 이론 산업의 대가”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소 지나친 듯하다. 앤더슨이 여러 저술에서 이론주의의 과잉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점을 고려하면, 이 비판은 지나칠 뿐만 아니라 부정확하다.

로쉬르도의 주장처럼 앤더슨이 그 저작에서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공식 사회주의 국가들의 마르크스주의 희화화와는 완전히 다른 독립성을 가졌다고” 선언했는가? 앤더슨은 레닌의 시대, 즉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스스로를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조직자이자 국가 권력을 추구하는 정당의 구성원으로 여겼던 시대의 즉각적 위험과 희생, 전사의 정신에 비해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텍스트주의적 성향을 한탄하고 있었지, 칭찬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의 책 첫머리의 서두 인용문에서 그는 레닌의 다음 발언을 인용한다: “정확한 혁명 이론은 진정 대중적이고 진정 혁명적인 운동의 실천적 활동과 밀접하게 연관될 때에만 궁극적인 형태를 갖춘다.” 게다가 그는 상당 부분 로쉬르도와 유사한 방식으로, 볼셰비즘의 부상이 '제국주의적 확장'이 가속화되자 이에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앤더슨의 저작의 전체적인 주장은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주변부, 즉 동유럽과 남유럽 출신들의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루카치와 그람시가 전사였다는 사실을 무시하기보다는 이를 칭찬하고, 각각 소련의 억압적 환경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감옥이라는 끔찍한 조건 속에서 그들의 노력이 좌절된 점을 애석하게 여긴다. 앤더슨이 로쉬르도와 다른 점은, 서구에서 마르크스주의가 학문적으로 변질된 원인을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 제도적 복종과 개인적 고립이라는 제한된 선택지”에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유물론과 사회주의적 투쟁 간의 역동적 관계”를 약화시켰다. 앤더슨의 생각에 따르면 (이 점에서 그는 로쉬르도와 의견을 같이 한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에서 경제학과 정치적 투쟁으로의 마르크스의 방향을 뒤집음으로써 스스로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이유로, 앤더슨의 혹독한 평가에 따르면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2차 담론”으로 전락하여 “점점 더 전문화되고 접근 불가능한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불편함, 심지어 무력함의 감정을 앤더슨의 주변 비평가들(테리 이글턴과 타리크 알리 같은 이들)은 끊임없이 좌파의 주목을 끌며 경고이자 호소로 삼았다. 앤더슨이 설립에 기여한 두 주요 좌파 출판 기획, 버소 북스(Verso Books)'와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는 중국, 볼리비아, 그리스, 아르헨티나, 남아프리카, 그리고 그 사이 모든 곳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투쟁에 대한 국제 좌파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로쉬르도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논리를 설명하려는 앤더슨의 작업을 서구의 불평등한 구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혼동하고 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선택적 태도를 마주할 때, “제국주의의 임금을 누리는 이들이 주변부의 민족 해방을 위한 복잡한 투쟁에 대해 경멸하거나 무관심을 보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선언은 난관에 봉착한다. 조지 패드모어, 빌리 뮌첸베르크, 아이자즈 아흐마드, 존 벨라미 포스터, 아돌프 리드, 루이 아라공, 마이크 데이비스, 조디 딘 모두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닌가? 이들은 모두 부르주아 서구에 거주했고, 국가 권력을 잡은 운동의 일원이 아니었으며,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고전들에 깊이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식민주의, 제국주의, 신식민주의 문제가 중심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로쉬르도가 호르크하이머, 네그리, 알튀세르, 지젝 같은 사상가들에 대해 지적하는 약점을 이들이 드러내지 않는다면, 동서 구분이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 탈식민화 중인 동구와 부르주아적 도시성의 매력에 정신이 팔려 무력한 서구 좌파가 이념적으로 대립한다는 거대한 영토적 분열이 아닌 다른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호르크하이머의 냉전 속 소극적 태도를 제외하면, 우리가 실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소비에트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 내의 내부 갈등,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의 대두,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 다시 말해 로쉬르도의 분석에서는 자리를 찾을 수 없는 탈선과 소멸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상대적으로 짧고 선택적인 비판 대상 목록을 고려할 때, 왜 로쉬르도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한나 아렌트와 미셸 푸코에 대해 긴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가?

로쉬르도가 그러하듯 북미를 예로 들어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반식민지 혁명과 단절했다”고 단정 짓는 것은 그가 비판하는 패배주의와 이상주의가 뿌리내린 북미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동원과 로널드 레이건의 니카라과 콘트라 전쟁에 대한 연대 운동의 일환으로 마르크스주의에 새롭게 입문한 상당수를 무시하는 일이다.

그의 비판은 '먼슬리 리뷰', '자코뱅', '미디에이션즈' 같은 저널에서 반자본주의 투쟁의 반식민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점과, 알렉산더 콕번과 제프리 세인트 클레어가 현대 미국 제국주의의 맥락에서 팔레스타인 투쟁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담은 '카운터펀치'의 정보에 기반한 마르크스주의를 무시한다. 로쉬르도의 시야 밖에 있을지라도,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반식민주의적 관점에서 탈식민주의 연구의 비판적 진영에서 강력한 마르크스주의 흐름으로 나타나며, V. G. 키어넌, L. S. 스타브리아노스, 해리 하루트유니안, 자넷 아부-루고드, 아리프 디를리크 같은 역사가들의 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젝의 작업이 때때로 록힐과 폰스 드 레온이 유머러스하게 묘사한 대로 “궤변적 속임수, 사소한 일화, 유치한 도발이 뒤섞인 병적인 혼합물”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불공정하지 않다. 그러나 그 비판은 지젝의 영리한 책략, 속임수, 우회적 공격을 언급했거나, 그의 헤겔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과 로쉬르도 또한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경멸을 인정했더라면 훨씬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지젝의 저작에서 나쁜 농담과 대중문화의 무의미함을 빼고 나면, 여전히 가짜 공산주의자, 자본주의 가치의 교묘한 술수, 그리고 냉전 좌파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이 남아 있다. 지젝은 레닌이 여전히 중요한 인물임을 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젝이 혁명적 쿠바를 무시하는 것이 논란의 소지가 있더라도(여기서 록힐과 폰스 드 레온의 비판은 충분히 정당하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방어하는 이론적 작업의 가치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는 마르크스주의로 눈을 돌리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기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방법론에 관한 문제가 있다. 서로 다른 문서에서 발췌한 구절들을 떠도는 콜라주처럼 이어 붙여 주장을 전개하는 로쉬르도의 방식은 그의 결론을 약화시키는 듯하다. 심지어 록힐조차 서두의 "번역자 및 편집자의 주”에서 가끔 “빠진 페이지 번호…출처가 없는 인용구”와 누락된 자료가 있으며, 일부 출처 표기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인정한다. 몇몇 출처는 사상가의 관점이 확립되기 전 초기 시기의 자료이거나 단순히 문맥에서 벗어나 인용된 것이다.

이 문제는 특히 에른스트 블로흐를 다루는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여기에서 블로흐는 볼셰비키 러시아보다 미국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우드로 윌슨을 크게 찬양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하는 발언들은 현재 독일어나 영어판에서는 이용할 수 없는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Spirit of Utopia)⟫(1916) 이탈리아어 판에서 가져온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 문장들로 인해, 블로흐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지지하고 제3세계를 경멸한 사회적 국수주의자로 보인다. 실제로 블로흐가 1916년에 이러한 지지할 수 없는 발언을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분명하게 친소련적 성향을 보이고, 세계 문화와 불균등한 발전 문제에 주목하는 ⟪우리 시대의 유산(Heritage of our Times)⟫ (1935)이나 ⟪희망의 원리(The Principle of Hope)⟫ (1954-59)의 블로흐와는 맞지 않는다. 1963년 저작인 ⟪이븐 시나와 아리스토텔레스 좌파(Avicenna and the Aristotelian Left)⟫에서는 블로흐가 아랍 학문이 유럽 학문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논하며, 그가 단순히 서구 중심적 사상가로만 볼 수 없음을 드러낸다. (데이비드 브로더는 2017년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이탈리아어 원판 리뷰에서 다른 사상가들에 대한 유사하고 분명히 심각한 오류들을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이 책에서 놓친 가장 중요한 기회는 뜻을 같이하는 사상가들과 비평가들을 소홀히 다룬 점일 것이다. 예를 들어, 문화적 좌파의 “무정부주의적 숭고”에 대해 글을 쓴 이들, 오늘날 쿠바, 베트남, 베네수엘라, 한국에서의 반식민지 투쟁의 현실에 대해 탈식민주의 연구가 보이는 터무니없는 무관심을 비판한 이들, 그리고 세계 주변부에서의 거대한 민족 해방 운동 물결에서 영감을 준 볼셰비키 혁명의 역할을 논한 이들이다. 나는 학계 내외의 강한 반대 속에서 지난 30년 동안 이러한 것과 유사한 주제에 매진해 온 사람들 중 하나다.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라면 과거의 맹점과 이념적 균열뿐 아니라 앞으로 나타날 새로운 경향과 흐름을 참고하여 주장을 강화하는 것이 더 바람직했을 것이다. 왜 미래의 합의를 위한 기회를 놓치는가?

분명히, 로쉬르도의 비판이 어떤 면에서는 탈식민주의 연구의 가장 고집스러운 토착주의적 요소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이다. 탈식민주의 연구의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들은 이 분야를 “본질적으로 반(反)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제3세계의 하위주체(subaltern)가 '서구 사상'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이나,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세계관이 그곳에서 임금이나 노동 조건을 둘러싼 투쟁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주장, 또는 사회주의적 발전 전략(사실상 모든 발전이 현대성의 악과 연관되어 있다)이 보다 적절한 '인식론적 탈식민화'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주장이 이 분야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탈식민성'에 관한 논의의 가장 깊은 곳에서도 서구 마르크스주의를 독성 유럽중심주의로 더 강하게 낙인찍는 책은 찾기 어렵다. 로쉬르도의 수정 — 살아있는 마르크스주의와 반식민지 해방을 귀중하게 연계한 그의 노력 — 은 불필요하게도 고립과 외로움의 색조로 손상되었다. 그가 알아채기만 한다면,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중심부에도 그의 생각보다 더 많은 그의 동료들이 존재한다. 

[출처] “Western Marxism” Is Not a Monolith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티모시 브래넌(Timothy Brennan)은 문학, 문화 정치, 지식인, 제국주의 문화에 관한 에세이를 다양한 매체에 발표했다. 그는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며, 최근 저서로는 ⟪사유의 공간들: 에드워드 사이드의 삶(Places of Mind: A Life of Edward Said)⟫가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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