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뉴딜

[워커스 사전]


‘그린 뉴딜(Green New Deal)’은 최근 1년 사이에 급부상한 개념이다. 한국 사회에는 2019년 이후부터 각종 연구보고서와 언론을 통해 조금씩 등장했다. 2020년 총선에서 녹색당을 비롯해 정의당과 민주당까지 그린 뉴딜을 주요공약으로 포함하면서 정치적 의제로 주목받고 있다. 계기가 된 것은 2018년 10월 IPCC(기후변화에 대한 정부 간 협의체)가 발표한 〈1.5℃ 특별보고서〉였다. IPCC는 2020년 이산화탄소 배출이 정점에 달할 것이며, 2030년까지 45% 감축, 2050년까지는 배출 순 제로를 달성해야 1.5℃ 기온 상승으로 인한 대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예측했다. 이때부터 ‘1.5도’와 ‘탈탄소’가 기후정치의 급박한 과제가 됐다.

유럽에서는 학생 기후파업 운동이 퍼져나갔고, ‘멸종저항’ 운동가들은 그린피스 본부를 점거하고 템스강 다리를 봉쇄하는 직접행동을 조직했다. 미국에서는 선라이즈 운동 활동가들이 하원의장 사무실을 점거하고 민주당 주요 의원 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19년 2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가 ‘그린 뉴딜 하원 결의안’을 제출해 의결을 이끌어냈다. 같은 해 영국 총선에서도 노동당의 제레미 코빈이 노동당 그린 뉴딜안(Labour for Green New Deal)을 핵심 정책의제로 제출했다. 이어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경선 후보로 출마한 버니 샌더스 역시 그린 뉴딜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2019년 새로운 EU집행위원회는 ‘유럽 그린딜(European Green Deal)’을 발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그린 뉴딜을 매우 급진적이고 역동적인 체제 변화의 기획으로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그린 뉴딜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두 가지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유럽과 미국의 그린 뉴딜이 다르며, 북반구와 남반구의 기후위기 대응이 다르다. 여기에는 불안정한 체제를 안정화할 것이냐, 아니면 체제를 바꿀 것이냐 하는 근본적 차이도 존재한다.

처음부터 그린 뉴딜 제안은 환경위기와 경제위기에 동시에 대응하는 전략으로서 ‘지구를 살리자’와 ‘자본주의를 살리자’는 두 요구를 모두 실현하겠다는 모순적 과제로 나타났다. 그것은 2007년 그린피스 국제경제부서의 콜린 하인즈(Colin Hines)와 가디언지 경제면 편집장인 레리 엘리엇(Larry Elliot)에 의해 제안됐는데, 그들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창한 뉴딜 정책에서 착안해 그린과 뉴딜을 합쳐 그린 뉴딜이란 용어를 만들었다. 그것은 국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하는 사민주의적 모델에 기반한 녹색 케인즈주의 전략에 가까웠다. 여기에 사람들이 결합하면서 ‘영국 그린 뉴딜 그룹’이 만들어졌다.

그린 뉴딜이라는 용어는 같은 해 미국에서 나온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의 책 《코드 그린(Code Green)》¹에 의해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그는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로 유명한 세계화론자이자, 친기업적 매체인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로, 에너지 전환과 산업구조 재편을 위한 거대한 국가적 프로젝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다양한 정치집단과 국제적 기구들에 수용됐다.

2009년 10월에는 유엔환경계획(UNEP)이 〈2009 글로벌 그린 뉴딜〉 정책 보고서를 발간했다. 같은 달 녹색유럽재단(Green European Foundation)은 〈유럽을 위한 그린 뉴딜〉을 발간했다. 유러피언 그린 뉴딜의 핵심을 이루는 녹색 자본주의 전략의 초안이었다. 2011년에는 OECD에서 〈녹색성장 전략 종합보고서〉가 발행됐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는 그린 뉴딜을 대선 핵심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 성장’도 이런 맥락과 연결돼 탄생한 한국형 ‘그린 뉴딜’이었다. 2009년 프리드먼은 한국을 방문해 이명박 정부의 녹색혁명을 지지하며, 최대의 성장 잠재력을 보유한 산업은 친환경 산업이며, 주도권을 잡으려면 에너지와 IT 융합기술을 개발하라고 조언했다.


2008년 프리드먼의 주장은, 약 10년 후 제레미 리프킨의 《글로벌 그린 뉴딜》에서 반복된다. 리프킨은 ‘비즈니스 공동체’라고 부르는 ‘국가-기관-투자자’의 이해관계와 서구 선진국의 관점에 충실히 입각한 그린 뉴딜 모델을 제시한다. 그는 사양산업인 화석연료산업에서 투자를 회수하고 ‘녹색’에 투자할 것을 조언한다. 이것을 ‘사회적 가치 투자’, ‘착한 투자’라고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녹색은 생명이 아니라 기술이다.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 도로시스템 및 빅 데이터 기반의 물류시스템 재구축,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친환경기술 분야, 재생에너지 사업 등 소위 ‘그린 테크놀로지’와 ‘그린 비즈니스’를 의미한다. ‘글로벌 그린 뉴딜’은 일국적 차원의 그린 뉴딜을 서구의 혁신 발전 모델로 보편화해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전략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린 뉴딜이 국제적 차원에서 추진되면, 과거 제3세계의 개발 원조 방식의 투자처럼 서구 기업의 미래 기술은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 도로 시스템 및 ICT와 결합한 에너지 인프라를 아프리카 전역에 깔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녹색 시장의 세계적 창출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2008년과 2018년의 그린 뉴딜에는 유사한 점이 많다. 차이가 있다면 정책적 구상으로만 제출됐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운동이 정책을 추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2008년이었을까? 2008년은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다. 기후위기와 경제위기가 유럽 국가 내부에서 불안과 긴장을 고조시키던 시점이었다. 북반구의 글로벌 엘리트들이 갑자기 파괴된 지구를 보면서 반성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꿀 의도도 당연히 없었다. 목표는 불안정한 체제를 안정화하는 것이었다.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환경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환경 이슈를 선점하고 환경운동진영과 의제를 공유하며 협력했다. 물론 급진적인 기후저항운동에 대해서는 분명한 부정으로 응답했다. 서구의 주류 환경단체들은 ‘기후위기에는 좌도 우도 없고 옳고 그름만 있다’며 취해온 포섭 전략과 제도 정치 안에서 조금씩 기득권화됐다. 한편으로는 국제기구 내에서 정부 및 기업들과의 정책 공조 속에서 조금씩 보수화됐다. 중도개혁세력은 점점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2020년 1월 오스트리아의 녹색-녹색대안당은 극보수주의 정당인 국민당과 연정을 구성했는데, 프랑스의 녹색당 당수는 이를 보고 두 정당이 행동력 있고 책임질 용기가 있다고 평가했다.² 그런데도 여전히 ‘녹색’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그린 뉴딜’ 같은 타협적 대안을 근본적이고 급진적 대안으로 보이도록 위장한다. 환경과 경제의 모호한 협력지대는 기업과 정부가 그린 뉴딜을 지지함으로써 친환경적인 위상을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만든다. 이런 배경이 개발주의자와 생태주의자, 성장론자와 탈성장론자, 신자유주의자와 반자본주의 운동진영까지 엄청나게 넓은 스펙트럼에서 그린 뉴딜이 공유되고 뒤섞이게 된 이유다.


이런 배경은 왜 기후위기가 주로 북반구의 중심 이슈인지에 대한 답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기후와 에너지 위기는 북반구의 위기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국제적 의제로 부상했다. 그린 뉴딜은 그에 대응하는 서구 선진국의 방식이다. 2008년이 오기 전 30년간의 상황은, 지금의 기후위기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은 ‘화석연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석유 산업이 시작된 1860년부터 2010년까지 150년 동안 소비된 석유 중 절반이 넘는 양이 1980년 이후 30년간 연소됐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서구에서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로 40%가 증가했는데 그중 절반이 1970년대 후반 이후에 발생했다. 앞선 산업화의 시기에 배출한 모든 탄소와 맞먹는 양의 탄소를 배출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화석연료를 30년 만에 다 써버린 것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왜 갑자기 에너지 사용량이 급증한 것일까? 그 시기에 추진된 ‘신자유주의’라는 공통분모 말고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구의 자원을 급속도로 고갈시키고 에너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것은 ‘금융자본주의’의 약탈성이었다. 70년대와 80년대의 금융탈규제화는 투기자본의 고삐를 풀었고, 약 30년간 엄청난 현금이 금융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상품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연한 노동시장과 값싼 노동비용 때문이었다. 그만큼 금융자산을 가진 부자들의 자산 인플레이션이 폭발했다. 극단적인 세계적 양극화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전 세계적으로 소비되는 석유의 62.5%가 ‘운송’에 사용된다. 전 세계 인구의 5%에 불과한 미국이 전 세계 에너지의 1/4을 소비한다. 전 세계 민간소비에서 가장 부유한 1%가 차지하는 비중이 59%에 달한다. 그들은 대부분 북반구에 살고 있고, 지구 전체에서 에너지 사용의 절대량은 이들 서구 산업국가에 집중돼 있다. 이 비율은 일국적 차원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이것이 과연 가솔린 자동차를 전기 자동차로 바꾸는 식의 에너지 전환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기후위기는 북반구에서 에너지 문제와 금융위기로 분출됐지만, 남반구에서는 전쟁과 가뭄, 가난과 질병으로 분출됐다. 그 대응 또한 북반구에서는 그린뉴딜과 기후정의운동으로 나타났지만 남반구에서는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다. 남반구에서 포화된 위험이 북반구로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서구의 국가들이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동안 서구 자본주의가 사용해온 대책에는 ‘무력’을 통한 폭력적 해결책과 ‘기술’을 통한 좀 덜 폭력적인 해결책이 있다. 보수 우파는 무력을 선호하고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은 기술적 방법을 선호한다. 인도의 역사학자 비자이 프라샤드(Vijay Prashad)는 ‘녹색 자본주의’가 바로 그런 기술적 수단이라고 말한다.³ 그린 뉴딜 역시 충분히 그런 통치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2007년 볼리비아의 대통령이었던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는 녹색성장론을 결국 ‘이 시스템을 녹색으로 칠하자는 주장’이라고 말했다. 지구를 살리는 척하면서 자본주의를 살리는 기만이라는 것이다. 모랄레스는 서구의 과학자 그룹이 제안하는 재생에너지 기술들은 바이오 연료로 에탄올 1ℓ를 생산하는데 물 12ℓ가 필요하고, 곡물 연료 1t을 생산하는데 1만 ㎡의 토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감춘다고 비판했다. 그 물과 토지는 제3세계에서 나온다. 서구의 과학적 환경주의자들이 탄소배출권을 협상하고 탄소포집기술이나 재생에너지 같은 기술적 대안에 매달려있을 때, 제3세계의 환경운동가들은 토지와 물, 식량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2019년 모랄레스는 군부쿠데타로 축출됐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에 매장돼 있는 리튬이 원인이었다. 리튬은 청정에너지 산업에 필수적인 배터리의 주원료다. 그는 외국 기업에 리튬채굴권을 인허하는 대신 리튬 생산에서 배터리 제조까지 전 과정을 독자적으로 생산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기술을 국내 이전하고, 생산설비를 국유화하려고 시도했다. 글로벌 기업들은 협조하지 않았고 미국과 유럽 주요 국가들은 쿠데타를 방조했다.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이것을 ‘녹색 식민주의’라고 부른다. “전투기 폭격이 석유를 따라다니듯 드론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가뭄으로 황폐화된 건조지대가 형성된다.”⁴ 가장 급진적인 그린 뉴딜안을 대표하는 미국 녹색당의 그린 뉴딜이 에너지 전환보다 군비감축과 군사주의 반대를 더 강조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세계적 규모의 에너지 전환 프로젝트 안에 ‘녹색 식민주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자본의 국제연대에 맞서는 민중의 국제연대와, 풀뿌리 운동과 결합한 기후운동의 저변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린 뉴딜은 녹색 자본주의의 기술적 정책 대안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급진적 기후 운동의 최전선은 빈곤과 실업, 전쟁과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반자본주의와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현장이다.


1. 국역본: 《코드 그린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 이영민, 최정임 역. 21세기북스.
2. 피에르 랑베르, ‘갈색’ 극우로 향하는 중도주의,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20. 3월호, 37쪽.
3. 비자이 프라샤드,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난 꽃 – 자본주의 시대 기후 변화에 대한 단상》 서문, 비자이 프라샤드 엮음, 추선영 옮김, 두 번째 테제, 2018. 19쪽.
4. 나오미 클라인, 《익사하든지 말든지 – 더워져가는 세계에서 자행되는 타자화라는 폭력》, 같은 책,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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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뉴딜 , 기후 위기 , 기후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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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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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저씨

    나는 몸이 망가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이런 기사는 대부분 쓸모가 없답니다. 계급투쟁에서 멀어진 환경문제 등은 그냥 자본주의에서 만족하며 살 수밖에 없어요. 새로운 세상에 가까운 것이 아닙니다. 가령 지금도 진행중인 경제성장률의 마이너스 행진, 전쟁을 무엇으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자본주의의 암흑기라고 칭해도 거의 들어맞을 듯 싶습니다만. 효정님이 해외를 보았지만 너무 한국적으로 썼네요. 군소정당에게 유의미한 글이 되겠네요.

    금융자본주의론(힐퍼딩의?)은 별거 아닙니다. 그저 "혹"하기 쉬운 이론입니다. 시간이 날 때 가격에 대한 수요과 공급의 법칙에서 한발 더 나아간 이론을 보시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님은 지식인이니까 마르크스의 <임금노동과 자본>, <임금, 가격, 이윤>을 한번쯤 보셔도 무방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