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75주년, 온전한 광복은 오지 않았다

[한반도 줄넘기] 어두운 역사의 흔적을 지울 자 누구일까

역사는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마찬가지이다. 지금으로부터 75년 전에 이뤄진 8.15광복과 그 이후 전개된 역사도 같은 꼴이다.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역사는 최근 백선엽의 현충원 안장과 김원웅 광복회장의 광복절 경축사를 둘러싼 논란을 통해 과거가 아닌 ‘지금’의 문제로 소환됐다. 또 8.15 해방 이후 분단,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역사는 ‘53체제’라는 53년 정전(협정)체제 속에서 남북 그리고 북미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 전범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미이행, 진행 중인 한일갈등

한일관계도 동일하다. 작년에 터진 한일 갈등은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고 있다. 일본의 경제보복은 철회되지 않았고, 일본 전범 기업의 강제징용 배상 이행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강제징용 전범기업인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이 강제징용 배상자에게 배상을 이행하지 않자, 한국대법원은 올 6월 신일철주금의 한국재산에 대한 압류 실행에 대한 공시송달을 결정했다. 그러자 신일철주금은 항고장을 제출하면서 버티고 있다. 일본 아베 총리는 8월 15일 종전기념일(일본이 부르는 이름)에 일제 침략의 상징이자 태평양 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바치는 한편, 아베정부의 각료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일본과 한국(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1965년 한일협정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면죄부를 준 결과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만들어진 이른바 ‘65체제’는 ‘53체제’와 더불어 1946년 해방 이후 한반도-동북아 질서를 형성하는 기본 구조물이 되었고, 이는 2020년 지금에도 한반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8.15광복 75주년은 맞은 지금, 해방 후 한일관계, 나아가 한미일 관계를 규정지은 ‘65체제’가 무엇인지 되새길 필요가 있다.

65체제 형성의 기초, 한일협정

65체제는 1965년 한국과 일본정부 간에 맺은 ‘한일협정으로부터 생겨났다. 한일협정을 통해 한국과 일본은 국교정상화를 이루게 됐는데, 문제는 한일협정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를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일협정 제 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했으나, ‘어느 시점에서의 무효냐’의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한국정부가 ‘이미’를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이전으로 해석하여 병합은 불법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미’의 기점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해석하여 병합을 합법이라고 주장했다.

해방 후 한일 양국은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해 1952년부터 몇 차례에 걸쳐 회담을 벌였지만, 쟁점을 좁히지 못해 1965년 전까지 국교정상화룰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양국 간 최대 쟁점은 바로 ‘일본의 조선 병합이 합법이가 불법인가’의 문제였다. 한일협정은 제2조 문구에 대해 한일 정부가 자신에게 각각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한일 간 최대 쟁점을 봉합하여 국교정상화를 걸림돌을 제거했다. 다른 말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인정을 받아내지 못한 채, 한일국교 정상화에 합의했다.

한일협정의 부속조약인 한일청구권협정(한일재산 및 청구권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한국에 대해 조선에 투자한 자본과 일본인의 개별 재산 모두를 포기하고,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한다고 합의했으나, 무상 지원 3억 달러는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의 성격을 갖지 못했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한국에 제공한 자금이 독립축하금,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논리를 계속 펴오고 있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문구도 문제다.

이는 청구권 문제에 대한 완전하고 최종적 해결을 못 박아, 강제징병·징용 및 위안부 피해자 등의 개인 청구권을 봉쇄하는 일본 정부 측 주장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됐다. 결국 한일협정은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체결됨으로써, 한일 갈등의 뿌리가 되었다.

한일협정의 뿌리, 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그런데 여기에는 더 깊은 뿌리가 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1951년 9월 8일, 일본과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들이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위하여 연합국과 일본이 맺은 평화조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샌프란시코 강화조약’의 특징은 미국 주도 하에 ‘일본에게 태평양 전쟁에 대한 책임만 묻고 식민지배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준 점’이다. 즉 조약은 “일본이 전쟁 중 일본에 의해 발생한 피해와 고통에 대해 연합국에 배상을 해야 한다”고 규정했으나,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국가의 범위를 2차 대전 중 일본이 침략한 나라로 제한했다.

또 조선(한국)은 일본에 합법적으로 병합됐으며, 한국을 강화회담 조인국에 참여시키면 안 된다는 일본 측의 주장을 미국이 수용하여, 한국은 대일전 전승국 지위를 갖지 못했고 강화회담 조인국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결국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과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문제 역시 청구권 문제(두 나라가 분리됨으로써 생긴 ‘재정적, 민사적 채무-채권 관계’)로 전환됐다. 미국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1965년 한일협정의 기본틀을 규정한 셈이다.

1951년 미국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면죄부를 준 것은 왜일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2차 대전 이후 미국 대일점령의 초점이었던 ‘비군사화’와 ‘민주화’를 변경시켰다. 즉 미국의 대일정책은 대사회주의권 봉쇄를 목표로 일본을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전진기지로 만드는 것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이것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집약됐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발효된 날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된 것도 이런 맥락에 있다. 결국 과거 식민지배를 사과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이해와 일본을 대사회주의권 봉쇄의 하위파트너로 만들려는 미국의 이해가 맞물려 65년 한일협정체제의 뿌리가 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탄생한 것이다.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 역시 미국의 지지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이 필요한 박정희 정권의 이해와 식민지배란 짐을 치워버리려는 일본의 이해가 맞물린 결과만으로 보기 힘들다. 바로 대사회주의의권 봉쇄를 위해 ‘한미일 동맹’을 구축하려 한 미국의 개입 하에 이뤄진 것이다. 따라서 한일협정으로 형성된 ‘65체제’는 전후 왜곡된 한일관계를 만든 기초이자,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을 매개로 미국 주도 하에 만들어진 ‘한미일 삼각동맹체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일본 자위대가 유엔군 깃발 들고 한반도에 상륙할 수도

1965년을 기점으로 형성된 한미일 동맹은 지금까지도 그 성격을 달리하며 유지되고 있다. 사회주의권 봉쇄를 목표로 했던 한미일 동맹은 2000년대 들어 ‘대중국 봉쇄’ 동맹으로 그 성격이 전환됐다. 중국 봉쇄를 위한 한미일 동맹체제를 유지-강화하려는 미국의 전략은 아베정부의 보통국가화(전쟁 가능한 국가화)에 대한 묵인과 협조 하에,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로의 귀환’과 트럼프 정부의 ‘인도·태평양전략’(일본, 호주, 인도를 핵심동맹세력으로 삼아 극동에서부터 호르무즈해협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돼 왔다.

이는 미국의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 종용, 2016년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압박으로 드러났다. 작년 일본이 한국에 경제보복을 하자 팔짱만 끼고 있던 미국은 한국정부가 지소미아 종료선언을 하자, 곧바로 ‘깊은 실망과 우려’를 표명했다. 올 8월에도 미국무부는 지소미아가 미국 안보에 중요하다며 지소미아가 계속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의 이해를 지키는 한미일 동맹의 한축인 한일 동맹이 과거사 문제로 깨질까봐 한국을 압박하는 것이다.

미국의 일본 키워주기는 더 나아가고 있다. 미국(유엔군사령부)은 작년부터 유엔사를 중국을 견제하는 동아시아판 나토(NATO)로 성장시킬 가능성까지 모색하고 있다. 그러면서 유엔사 전력 제공국의 자격을 “유엔 회원국이라면 누구나”로 변경하여, 일본을 유엔사에 정식으로 끼워주려 하고 있다. 이미 유엔사는 일본에 유엔군후방사령부도 따로 두고 있다. 유엔사는 한반도 유사시 전력 제공국의 병력과 장비를 일본의 유엔사 후방기지에 집결한 뒤 한국으로 보내도록 해 일본이 개입할 통로를 열어 놨다. 미국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본을 공식적인 전력 제공국으로 포괄하려 하는데, 이는 한반도 유사시 일본이 유엔군 깃발을 들고 한반도에 진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미중 갈등이 격화하면 할수록 미국은 한국을 한미일 군사동맹에 더욱 깊숙이 편입시킬 것이며, 한국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될 것이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을 목도하는 처지로 내몰릴 것이다.

온전한 광복은 오지 않았다

따라서 온전한 광복은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친일 미청산의 역사가 한국정치에 어두운 흔적을 짙게 남겼듯이, 65체제는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없이 국교를 정상화한 왜곡된 한일관계와 미국의 대동아시아 패권 전략을 유지시켜주는 구조물로 작동하고 있다. 8.15를 마냥 기념할 수만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작년 일본의 경제보복을 불러온 한국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은 65체제의 문제점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 판결을 이끌어낸 주역은 일본 법원 소송 패소에도 지치지 않고, 한국에서 소송을 감행한 강제징용 피해자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조선의 식민지화, 해방 후 친일 미청산, 해방 후 왜곡된 한일관계라는 역사의 어두운 흔적을 만든 당사자가 지배세력이라면, 어두운 역사의 흔적을 치우고 역사를 바로 세울 자들은 그 역사가 잘못됐음을 인식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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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따라서 온전한 광복은 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친일 미청산의 역사가 한국정치에 어두운 흔적을 짙게 남겼듯이, 65체제는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없이 국교를 정상화한 왜곡된 한일관계와 미국의 대동아시아 패권 전략을 유지시켜주는 구조물로 작동하고 있다. 8.15를 마냥 기념할 수만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사상가

    진일보한 연구네요.

  • 아저씨

    거기 자유게시판의 게시자에게

    조회수가 한 자리면 적어도 십만 명 대 이상이 볼 수도 있다.(내가 오래 전 그와 비슷한 일을 실제로 경험했다) 그러니까 의기소침할 것도 없고 장난해서는 안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