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전술로서의 스토리텔링

[녹색 스트라이크]

  “우리가 99%다” 사이트에 각자의 사연을 올린 이들 [출처: hps://wearethe99percent.tumblr.com에서 모은 사진들 편집]

2011년 여름, 뉴욕에서 오큐파이 시위가 계획될 무렵 소셜미디어 플랫폼인 텀블러에서는 독특한 제목의 사이트가 열렸다. “우리가 99%다”라는 제목의 사이트는 장시간 노동에 제대로 된 임금이나 의료 혜택도 거부당한 채 먹을거리와 월세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월세를 못 내 집에서 쫓겨나는 99% “우리”의 현실을 담담히 전했다. 그리고 각자가 99%인 이유를 공유해 달라 제안했다. 그러자 눈 깜짝할 새에 수백 수천의 포스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 여성은 3.8의 평균 학점과 10년 동안의 회사 생활에도 일자리를 잃어 1억 원에 달하는 학자금 빚에 1천만 원의 의료 빚까지 생겼다며 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를 물었다. 석사 학위가 있다는 한 남성은 세 개의 파트타임 일을 하는데도 6만 불에 달하는 빚에 시달리고 있다고 토로했고, 한 간호사는 병원에서 환자를 돕고 있음에도 정작 자신은 의료보험이 없어 병원 치료를 못 받는다는 사연을 전했다. 이런 사연은 한결같이 “내가 99%다”라는 선언으로 마무리됐다.

그렇게 시작된 오큐파이 운동은 몇 달 동안 뜨겁게 불타 올랐다. 미국에서만 500군데 넘는 곳에서 텐트촌이 세워졌고 오큐파이 행동은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 년도 못 가 사그라들었다. 오큐파이는 아래로부터의 직접 민주주의를 주창하고 위계적 권력 관계가 불가피한 조직 형태나 정치세력화를 거부했는데, 많은 분석가는 이 점 때문에 운동이 조직적·정치적 성과를 남기지 못한 채 실패했다고 규정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잘못됐다. 조직되지 않은 개인들의 수평적 참여를 통해 불이 지펴졌던 오큐파이 운동은 이후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총기 소유 반대 운동, 미투나 여성행진(Women’s March) 등 과거 정치행동 경험이 없었던 이들을 주된 참여의 동력으로 삼은 대규모 사회운동들을 촉발시켰다. 세상을 지배하는 1%에 대비시킨 99%의 버거운 삶에 대한 조명은 사회 불평등에 대한 학계와 언론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고, 오늘날 미국 정치의 방향타를 왼쪽으로 돌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자기 조직화나 정치세력화 등 사회운동의 물질적 토대를 거부했던 오큐파이 운동은 어떻게 이와 같은 파장을 만들어 냈을까?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운동의 비물질적 동력들이다. 그중 하나는 특정 이슈나 사건,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렌즈를 제공하는 사회운동의 프레임(frame)이다. 사회운동 연구자들은 사회운동의 성장을 가능케 해주는 프레임은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본다. 그 근본적 원인을 포함해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드러내는 것(진단),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그 그림을 보여 주는 것(처방), 그리고 모두의 참여가 있다면 실제 변화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것(동기)이 그것이다. 오큐파이 운동의 핵심 모토가 되었던 “99%”는 고된 민중의 삶이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거나 게으르거나 철이 덜 든 탓이 아니라 세상 모든 제도가 상위 1%를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울림 있게 전달했다. 이런 진단은 곧 1%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경제체제와 이를 떠받치고 있는 모든 제도가 99%를 위한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처방으로 이어 졌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몰락을 경험하고 있던 99%는 소셜 미디어를 플랫폼 삼아 어렵지 않게 참여의 동기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1%와 대비되는 99% 라는 프레임은 사회운동에 필수적인 ‘저들’과 ‘우리’를 가르는 정치 정체성 형성의 밑거름이 됐다. 또 99%가 혹여 자신의 처지에 대해 가지고 있을지 모를 자책감조차 저들이 우리 머릿속에 심어 놓은 결과라는 전복적 사고를 확산시켰다. 2016년 이후 버니 샌더스의 거센 바람과 2018년 혜성과 같이 등장한 AOC 등의 의회 내 좌파 블록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 정치 풍향계가 왼쪽으로 이동한 것이 ‘1% 대 99%’라는 프레임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이 프레임은 각자의 사연을 공유하고 이 이야기들이 사회적으로 공감되는 과정을 통해 증폭됐는데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스토리텔링이었다. 여기서 스토리텔링이란 ‘나’를 주어로 삼아 내가 체험한 삶의 경험을 기승전결과 같은 내적 구조를 갖춘 상태로 타인에게 전달하는 소통 방식을 말한다. 스토리텔링은 속성상 나의 경험을 나의 목소리로 전달하는 것에 무게를 두기 때문에 지배 담론이나 정형화된 프레임에 의한 속박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나의 본원적 목소리와 필요를 표현하기에는 더없이 좋다. 이런 점 때문에 오큐파이 운동 당시 공유된 많은 이야기는 큰 공명을 일으키며 새로운 연대의 씨앗이 됐고 동시에 기존 체제의 문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력을 틔울 수 있었다. 99%를 축으로 삼은 프레임과 스토리텔링은 이렇듯 공공의 장에서 내 삶이 이야기되는 것만큼 강한 정치화의 무기는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줬다.

사회운동 전술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오큐파이 운동의 사멸 뒤로도 멈추지 않았다. 2013년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은 곳곳에서 ‘흑인 이야기는 소중하다(Black Stories Maer)’와 같은 프로그램과 함께 목소리와 세력을 동시에 키워나갔다. 2017년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 이후 부흥을 맞은 페미니즘 운동도 전국 각지에서 스토리텔링을 통해 과거 소외됐던 노동자와 유색 여성의 역량과 목소리를 강화하는 프로그램들을 조직했는데, 이는 백인 중산층 중심의 페미니즘을 전복시키는 중요한 기폭제가 됐다. 선라이즈운동과 공공서비스노동조합(SEIU) 등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단체들이 꾸린 ‘그린뉴딜 네트워크’도 최근 노동자와 민중의 역량 강화를 통한 기후위기 대응과 불평등 해소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데, 이들도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통해 ‘창조적이고 파열적인(disruptive) 운동’을 만들어 ‘현실성’을 둘러싼 사회의 상식을 극적으로 바꿔내자는 제안을 전략의 요체로 삼고 있다.

오늘날 미국 사회는 수십 년 만에 변화를 맞이하는 듯하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현금 지급은 1인당 한화 350만 원에 이르렀고 1년 가까이 주당 600불의 실직 급여도 지급되고 있다. 얼마 전 바이든 정부는 한화 2200조 원이 넘어가는 규모의 투자를 통해 인프라 재건과 기후위기 대응을 통해 수백만의 좋은 일자리를 만들겠다 약속했다. 더불어 재원 마련을 위해 부자와 기업을 대상으로 상당한 규모의 증세까지 고민하고 있는데 여론도 증세 찬성으로 기운 상황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이런 변화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오큐파이 운동에서 시작된 풀뿌리 민초들의 자기 이야기 공유와 교감은 다른 운동의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이 됐고, 이 상상력은 담론을 바꾸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는 그 결과의 한 단면을 보고 있다.

눈을 한국 상황으로 돌려 보자. 얼마 전 민주노총은 정기대의원대회를 통해 기후위기 특별결의문을 통과시켰다. 결의문에서 민주노총은 “지구를 착취하는 무한 이윤추구와 시장 만능의 경제체제를 바꿔내야 한다는 그 절박함”을 언급하면서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주노총뿐만이 아니라 그 어디를 둘러봐도 원칙을 담은 추상적 구호만 있지 구체적 계획은 없고 정의로운 전환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에선 “우리와도 이야기 해달라”는 수준의 요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세상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체제 변화가 필요하다 외치는데 정부와 자본이 짜놓은 틀을 넘어서는 상상력은 그 어디서고 보이질 않는다. 노동자와 청년과 여성과 농민들은 분노와 불만이 쌓일 대로 쌓였는데 분노가 향해야 할 대상도 불만을 토로할 창구도 못 찾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대안이 없다, 대안을 제시하라 대꾸한다.

한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대안을 찾기 위한 시간을 다 보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뭐 대단한 게 나오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 사회 ‘을’들이 자유롭게 스토리텔링할 기회를 마련해보는 것은 어떨까? 처음엔 쭈뼛거릴지 몰라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화자에겐 잠시나마 치유와 회복의 기회가 될 수 있고, 청중에겐 다른 데서 듣기 힘든 생생한 삶의 이야기도 듣는 기회가 될 텐데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공공의 장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모이다 보면 서로 간의 이해와 공감은 넓힐 수 있지 않을까? 또 누가 아나, 그러다 운 좋으면 어떤 새로운 정치 정체성이나 새로운 세상을 위한 상상력의 단초를 발견하게 될지? 체제 변화를 말하는 시기인데, 적어도 기존의 담론을 벗어나는 이야기들을 모아보려는 시도라도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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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철 (독립연구자,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정책위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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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내가 가는 곳이 길이다....라는 이야기처럼 99%인줄 알면서도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아쉬운 시간들...마치 바탕색만 칠해놓고서 아무런 구체화된 모습을 그려놓지 못하는 우리들의 현실성을 나무라야 합니다..........늘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