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4년, 소득주도성장론을 되돌아본다

[요즘 경제] 소득주도성장론은 어디로 갔나

20일 대통령 직속 일자리기획단 부단장은 “산업 대전환이 양질의 일자리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일자리위 소명이라고 본다”며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한 (고용 위기라는) 급한 불을 끄는 데 총력을 다했다면 하반기부터 산업 대전환에 관해 고용노동부를 비롯해 각 정부 부처가 어떤 역할을 해나가야 하는지 대책 중심으로 준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1)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여기저기 언론 매체에서 신산업 동력에 대한 화두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있다. 한미정상회담에서도 반도체와 백신의 빅딜이 화두로 제기됐다. 지금 분명 세계적으로 신산업 동력에 대한 치열한 각축이 벌어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기술 패권을 둘러싼 전망에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책임질 먹거리를 찾고자 하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소위 말하는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여기서 자신의 노동을 대가로 삶을 영유해 나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그래서 신산업 동력과 노동의 화두는 함께 강조돼야 한다.

그러나 노동문제에 어느 정부보다도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것이라 믿었던 문 정부의 4년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일자리 상황판,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정규직화…. 4년 전 문재인 정부 초기 회자된 사건들과 정책들이다. 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론을 간판에 걸고 야심차게 출발했다. 그러나 모두 아시다시피 그 결과는 을들의 싸움으로 전락한 최저임금 논란만을 남긴 채, 용두사미로 끝났다. 그리고 지금은 K뉴딜로 간판을 바꿨다.


소득주도성장론의 기본은 노동과 자본의 1차 분배에서 노동의 몫을 키우고, 이것이 내수 소비와 투자를 자극해 경제성장으로 전환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노동의 분배 몫을 키우기 위해 노동 친화적 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정책 방향의 결론이다. 실질적인 분배개선과 경제성장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1~2년 사이에 획기적인 성과를 낼 순 없다. 자본 스스로 자신의 몫을 노동에 자연스레 양보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조 조직률이 매우 낮은 한국 상황에서는 소득주도성장론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자들의 요구가 쉽게 달성되기 힘들다. 그러므로 소득주도성장론을 추진하는 정부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대통령 스스로도 4년 전 언론을 통해 언급했듯 정부의 재정이 소득주도성장론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애초 정부의 역할을 마중물이라고 인식했던 것 자체가 안일한 판단이었다. 마중물이란 우물의 펌프에서 물이 잘 나오지 아니할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위에서 붓는 물이다. 뭔가 막혀있을 때 물꼬를 틔워주는 역할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우물의 물이 가득 차 있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우물에 물이 가득 차 있었던가? 앞서 언급했듯, 자본이 양보하지 않는 한 노동의 몫이 자연스레 증가하지 않는다. 우물의 물을 채우는 것부터가 먼저이다. 이것은 그 성과를 보기 위해선 한두 해로 끝나지 않을 중장기적 과제다. 말 그대로 정권의 명운을 걸어야 할 사활적인 문제인 것이다. 고전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에 맞선 노동의 계급투쟁에서 문재인 정권이 선봉장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의 4년을 되돌아본 지금, 아마도 이런 주장에 대해 헛웃음만 나올 것이다.

남은 1년, 혹은 앞으로 5년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실패의 과정을 복기해야 한다. 그리고 교훈을 남겨야 한다. 노동정책의 문제를 정부재정과 저울질하는 시혜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논란의 결정적 순간에서 항상 정부재정을 이유로 후퇴하거나 오히려 개악시켰다. 가령 최저임금 인상의 압박으로 영세자영자들의 생계에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그것을 적극적으로 보전하는 방안을 취했어야 했다. 정부 초기 최저임금이 논란이 ‘을’들끼리의 갈등으로 비화하면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정책추진의 역량이 낭비되는 실수를 저질렀다. 심지어 결정적 순간에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해 결국 최저임금이 올라도 월급이 오르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실제 지난 2019년, 저임금 노동자 20만 명의 실질 인상률은 산입범위 확대 논란이 벌어진 당시 2.2% 수준 그칠 것이 전망했다. 소득주도성장론을 외치는 정부가 소득증대를 억누르는 정책을 취하는 기가 막힐 일을 벌인 것이다. 계급투쟁의 선봉장이 되겠다고 호언장담해 놓고선 중재자 혹은 반대자자 됐다.

정부의 이런 태도의 배경에는 균형재정론자들의 국가재정에 대한 공격과 합리성으로 포장된 기획재정부의 재정 운영의 논리가 깔려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초기, IMF와 같은 국제기구들은 우리나라를 독일과 더불어 확장적 재정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나라로 꼽으면서 재정정책의 전환을 권고했었다. 이미 세계적 조류는 적자재정에 대한 우려보다 장기침체에 대한 우려를 더 걱정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논쟁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대적 흐름에 뒤처진 낡은 균형재정론에 얽매여 소득주도성장론은 방향성을 잃어버린 채 수사만 남게 됐다.

양질의 일자리? 일하다 죽는 목숨부터 구하자

그런데 이런 낡은 관념에서 못 벗어나는 태도는 소득주도성장론의 실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반성을 계기로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문재인 정부는 공언했다. 아이들의 허망한 죽음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두눈 부릅뜨고 외쳤다. 하지만 지난달 항만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20대 청년이 300kg이 넘는 쇳덩이에 깔려 죽는 사고가 벌어졌다. 누구 하나 작업 과정의 위험을 알려주지 않았고 시키는 대로 현장에 투입됐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몇 해 전 석탄발전소에서 숨진 김용균 씨의 사망을 계기로 올해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졌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인 산업재해에 대해서 이제 악습을 끊고자 하는 사회적 열망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되지 않고, 50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이 3년 유예됐다. 지난해 산업재해로 숨진 882명 가운데 5인 미만 사업장은 312명, 5인 이상~50인 미만 사업장은 402명이었다. 80%나 되는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 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유예된 것이다. 또한 최근 5년 내 안전 조처 의무 관련 법을 3회 이상 위반한 경우 사업주가 사실상 재해에 책임이 있다고 간주하는 ‘인과관계 추정의 원칙’도 삭제됐다.

이런 후퇴가 벌어지게 된 이유는 국가가 실질적인 개입을 통해 산업재해를 막아야 하는데, 처벌조항만을 강화하다 보니 영세사업장의 경우 경영상의 재정능력을 이유로 제외되거나 유예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부 스스로 영세사업장은 산업재해가 벌어져도 별 책임지지 않는 곳임을 인정해준 것과 다름없다.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부가 불안정한 일자리를 확인시켜주는 역설적 상황을 만들고만 만 셈이다.

양질의 일자리라는 것이 신산업 동력을 키워야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불안정한 일자리를 안정화하는 것이 바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위험의 외주화를 막는 방법은 영세사업장이 우량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유예해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바로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K뉴딜에 반도체, 수소차, 태양광 산업 등등에 수백조의 돈을 지원하면서 왜 노동자의 목숨을 지키는 일엔 인색한가? 왜 안전뉴딜은 못 만드는가 말이다. 신산업 동력에 지원하는 규모의 100분의 1만 있어도 충분하다. 앞으로 남은 1년, 문재인 정부에 바라는 게 있다면 수사만 남아버린 소득주도성장론 대신 ‘안전한 일자리 만들기’처럼 명쾌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진했으면 좋겠다. 대기업들이 신산업에 투자해주길 기다리는 것보다, 안전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양질의 일자리는 만드는 확실한 지름길이다.

국가의 귀환과 과단성의 시대

다시 소득주도성장론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정권 초기 보여준 몇몇 사건들과 정책들에서 “이제 뭔가 바뀌는 것인가”라는 기대를 국민에게 한껏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재정 투자가 바탕이 되지 않는 채 제도개선만으론 애초 기대한 목표를 이루기 어렵다. 우리가 겪은 경제문제는 검찰개혁처럼 제도개선만으론 해결되지 않는다.

국가의 역할을 마중물 정도로 인식한다는 것은 마치 핀셋 처방처럼 적재적소에 개입해 뭔가 물꼬를 트는 역할을 국가가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은 굉장히 멋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호황기 상황에서 뭔가 균형이 맞지 않는 지점을 핀셋처럼 세밀한 처방을 사용할 때 쓰는 용어이다. 지금은 그런 호황기 국면이 아니다. 미국을 보라. 수천 조를 쏟아 붓고 있다. 지금은 마중물이 아니라 소방호스가 필요한 시대이다. ‘국가의 귀환’이라는 화두가 대세가 되는 지금, 우리에 필요한 건 과단성이고, 버려야 할 건 낡은 신자유주의 이념이다.

<각주>
1) ‘일자리위 “남은 1년 산업재편·기후변화 일자리에 집중”’, 〈매일노동뉴스〉, 20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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