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워커스 사전]


오스트레일리아 북동쪽 남태평양에 나우루라는 작은 섬이 있다. ‘콜라 식민지’라고 조롱받는 이 섬은 예전에는 아름다운 섬이었지만 지금은 쓰레기 섬으로 유명하다. 섬에는 콜라 페트병처럼 이곳에서 생산되지 않는 온갖 종류의 식료품과 생필품 쓰레기가 넘쳐난다. 생산기반도 처리시설도 없는 섬에 필요한 물건들을 전량 수입해 들여오고 있기 때문이다. 나우루공화국은 1980년대까지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불에 이르는 자원 부국이었다. 나우루의 자원은 고급비료와 반도체의 원료가 되는 인광석이다. 인광석은 새똥이 오랜 세월 굳어져 만들어진 것이다. ‘앨버트로스 섬’이라 불린 새들의 고향에 새들이 남긴 선물은 저주가 됐다. 똥이 금값이 되자, 제국의 채굴자들이 몰려왔다. 자원이 고갈되고 개발붐이 끝나자 나우루는 곳곳이 파헤쳐져 아무것도 경작할 수 없는 땅과 기업들이 버려두고 간 채굴장비가 유령처럼 서 있는 해안, 삶의 기술을 잃어버린 채 원조금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무력한 주민들만 남게 되었다. 쓰레기를 배출할 곳은 없는 채로 계속 쌓이기만 하는 나우루 섬은 지구의 축소판이다.

나우루 같은 쓰레기 섬은 지구의 대륙 곳곳에서도 발견된다. 콜라, 네스카페, 고어텍스 같은 브랜드나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최첨단 유행을 달렸을 의류, 신발, 휴대폰, 컴퓨터, 자동차까지, 쓰레기 대부분은 문명의 잔해들이다. 쓰레기의 경로는 서구 문명과 지구 자본주의의 비밀을 폭로한다. 쓰레기의 경로는 무슨 법칙처럼 한결 같이 일정한 방향을 향한다. 북구에서 남구로, 잘사는 나라들에서 가난한 나라들로. 1990년대 이후 전 지구적으로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이 확산하자 상품의 전 세계적 이동과 함께 쓰레기도 글로벌하게 이동했다. 부는 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글로벌 기업과 슈퍼리치들의 금고로 흘러 들어가고, 쓰레기는 부자들의 뒷문으로 나와서 배와 비행기에 실려 가난한 마을의 앞마당에 부려진다. 도시개발로 고층빌딩이 올라갈 때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만큼 쓰레기 산들이 솟았다. 에너지 효율성을 높인다고 말하면서 추진한 고층 고밀화 도심 개발전략은 고층건물이 좁은 면적 위에 고밀도로, 압축적으로 쏟아내는 쓰레기와 분뇨의 비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쓰레기가 쌓이는 장소는 도시빈민이나 난민들, 지배층에 의해 ‘인간쓰레기’로 분류된 사람들이 모여든 장소와 대개 일치한다. 도시가 새로 개발될 때마다 그만큼의 슬럼이 도시 주변부에 생겨났다. 슬럼 또한 전 지구적 규모로 급속히 확산한다. 마크 데이비스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에서 20세기 후반부터 급속도로 형성된 저개발국가의 대도시 슬럼은 19세기 유럽에 나타났던 도시화와 전혀 다른 양상이라고 설명한다. 과거의 도시화는 기회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는 사람들 때문이었고 산업도시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사람들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도시가 유인이 아니라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새로운 봉쇄와 축출의 강력한 척력으로 원거주민들까지 추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계속 밀려오는 건,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이 내부에서 난민화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국주의 팽창시기에 신대륙에서 기회를 잡을 희망을 꿈꾸며 바다를 건너 변방의 개척지를 찾아가던 이민자들과 달리 지금 변경에서 중심부로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난민들은 희망의 땅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이다.

쓰레기가 쌓이는 곳에 ‘인간 쓰레기’가 함께 쌓인다는 사실은 환경, 노동, 정치가 어떻게 식민주의적으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나우루 섬에도 플라스틱 쓰레기와 함께 쌓여만 가는 또 다른 ‘처리 불가 항목’이 있다. ‘난민’이다. 난민의 본국 입국을 막는 것으로 악명 높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경제가 파탄난 나우루에 원조를 대가로 난민을 수용한다. 수용소는 민간방호업체가 위탁 관리를 맡고 있다. 나우루 사람들은 이 수용소 사업에 고용되어 난민 감시나 뒤치다꺼리를 하며 살아간다. 지배층이 인간을 쓰레기처럼 처리하는 관행은 역사적으로 오래됐다. 런던 성시청의 청장이었던 프랜스시 베이컨이 담당했던 업무는 런던의 더럽고 위험한 인간들을 수거해서 배에 태워 바다 멀리 신대륙에 버리는 것이다. 도시를 성스럽게 만든다는 이름답게 성시청은 도시정화를 담당하는 부서다. 분리차별주의는 게토나 팔레스타인의 서안지구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곳’의 도시가 개발되고 아름다워질 때 ‘그곳’의 분리지구에 인간과 쓰레기가 쌓인다.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쓰레기들은 때로는 원조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수출이라는 이름으로, 저발전 국가들에 차곡차곡 쌓였다. 미국의 잉여농산물과 화학비료들은 식량원조와 기술이전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석면이 미국에서 유해물질로 지정돼 건축물에 사용이 금지되었을 때, 한국의 농촌에선 지붕을 석면재료로 바꾸는 주택 개량 사업이 ‘근대화’란 이름으로 추진됐다.

쓰레기나 잉여생산물이나 잉여인간 모두 ‘잉여 처리’라는 관점에서 행해진다. 쓸 데는 없고 넘쳐나기만 하는 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것이 국가와 자본의 인구 관리와 쓰레기 관리의 공통 관점이다. 환경주의적 구호처럼 들리기도 하는 “지구는 가득 찼다”라는 슬로건이 극우세력의 표제어가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보여준 바 있듯이, 우리는 ‘너무 많다’라는 말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지만 유럽인들은 ‘너무 많은 인구’라고 하면 늘 유럽으로 밀려오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떠올린다. 아프리카의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낮고 평균수명도 가장 낮은 곳에 속하는 데도 그러하다. ‘포화’는 늘 잉여의 존재를 향하고, 쓸 데는 없이 너무 많기만 한 존재에 대한 혐오는 빈자와 난민, 그리고 점점 더 많아지는 ‘불필요한 노동자들’을 향한다. 그런 관점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가 ‘혁신주의’다. 혁신경제를 지탱하는 ‘창조적 파괴’는 첨단기술이 멀쩡한 물건을 쓰레기로 만드는 방식과 동일하게 노동을 쓰레기로 만든다. 거대한 잉여의 생산은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기술인 동시에 경쟁을 통한 분리통치의 기술이기도 하다.

점점 더 ‘쓰레기가 돼가는 노동자들의 삶’은 우리의 노동을 쓰레기로 만드는 자본의 기술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의도적으로 수명을 단축하는 계획적 진부화의 기술은 금융자본주의 이후 더욱 정교해졌다. 투자를 유치하려면 계속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시장을 창조해야 한다. 이런 창조 경제를 지속가능하게 하려면 사람들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새로 사도록 물건의 내구성을 줄이는 동시에 첨단, 유행, 혁신을 통해 소비의 욕망을 계속 창조해내야 한다. 그게 창조경제의 핵심원리다. 그러나 무언가를 새로 산다는 건 무언가를 버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창조의 비밀은 단순하다. 폐기를 양산하고 은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신차를 구입했다는 이야기는 차고에 자동차가 한 대 더 들어왔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포화한 시장에서 판매량이 늘어났다는 이야기는 그만큼의 자동차가 쓰레기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비밀은 내연기관 자동차를 전기자동차로 ‘전환’한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로 발생할 일이다.

혁신이 버린 쓰레기들은 어디로 갔을까? 쓰레기의 행로를 탐사한 책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구정은, 후마니타스 2018)은 휴대폰이 나온 후 거리에서 사라졌던 공중전화를 뉴욕의 맨해튼 지하철역과 런던 근교의 황량한 들판에서 찾아낸다. 전화기와 전화박스는 재생도 해체도 죽지도 못한 채 그저 쌓여있었다. 핵발전소를 만드는 기술은 첨단이지만 폐기물 처리나 사고 후의 해체와 제염기술은 지극히 원시적인 것처럼 신상을 얼마 못 가 쓰레기로 만드는 오늘날의 첨단 기술 역시 자신이 내뱉은 첨단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는 어떤 첨단 기술도 발휘하지 못한다.


생산품에 대해 고안되었던 계획적 진부화는 인간의 노동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자본은 최첨단 기술을 노동자의 역량을 도태시키는 데도 활용한다. 기술이 혁신될 때마다 구식 노동자들은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하이패스 기술은 톨게이트 노동자를 도태시키고, 자동계산대와 무인판매시스템은 마트 노동자를 불용처리하도록 만든다. 노동자들의 쓸모가 없어지기 전에도, ‘엔론’처럼 주기적으로 일정 비율의 노동자를 ‘새로’ 갈아치우는 기업도 있다. 그 자체가 폭력적인 노동 통제의 효과를 수반한다. 신제품으로 자신을 출시하라는 명령이 노동자들에게도 떨어지고 휴대폰과 컴퓨터가 사양을 업그레이드하듯이 노동자들도 역량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량(케파, capa·capacity)’이나 ‘스펙’이란 말 자체가 제품의 생산능력과 사양을 뜻하던 말을 인간에게 적용한 것이다. 마치 노동자나 실업자에 대한 지원처럼 말해지는 재교육과 평생교육은 실은 시장의 요구에 맞춰 자신의 역량과 스펙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개발해 자신을 재창조하고 경쟁력을 갖추라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노동자 개인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은 기업의 노동비용 절감과 노동 통제를 위한 기술적 노동진부화를 은폐하며 노동자 개인들의 역량 부족으로 책임을 전가한다. 평생 지불해야 할 재교육 비용은 노동자들의 실질소득 감소와 여가시간의 박탈로 이어진다. 미취업자와 해고자, 실직자의 과제는 자격이 될 때까지 배우고 또 배워서 새로운 인간으로 갱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원재활용센터’라고 불리는 쓰레기 집하장에서 하적, 소각, 매각 외에 실제로 ‘재활용’되는 쓰레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듯이, 이런 인간재교육 과정에서 소생의 기회를 잡는 이들도 극히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쓰레기장으로 가지 않기 위해, 쓰레기장에서 재생의 기회를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과 필사의 고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쓰레기 문제는 환경만이 아니라 노동과도 직결돼 있다. 자본은 지구를 뒤덮은 쓰레기의 주범이다. 일회용 노동은 일회용 상품과 함께 탄생했다. 그런 점에서 탄소배출과 쓰레기배출은 매우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탄소와 마찬가지로 쓰레기도 배출구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나오는 곳을 막아야 한다. 생활쓰레기의 대부분은 포장재가 차지하고 포장재의 대부분은 플라스틱과 비닐이다. 플라스틱 포장재는 상품의 대량 생산과 유통을 위한 대량의 적재 기술 및 장거리 이동과 관련된다. 이동수단과 적재수단이 없다면 아무리 대량생산을 해도 시장을 글로벌화 할 수 없다. 콜라는 페트병이 없었다면 생산지에서 나우루섬까지 날아갈 수 없다. 달걀판의 발명은 달걀을 원거리 시장까지 운반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그러나 시장의 기술은 늘 자본의 이익을 향한다. 농수산물을 소포장하는 플라스틱 포장재는 마트에서 무게를 달아주거나 원하는 만큼 골라 담아주는 노동자를 ‘쓸모없게’ 만들었다. 포장기술 역시 상품을 더 멀리, 더 안전하게, 더 편리하고 더 싸게 이동하기 위한 방향으로 혁신돼 왔다. 그러나 상품의 안전한 이동을 보장해준 기술은 지금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현재 전 지구적 차원에서 쓰레기의 분해, 분류, 재사용이 가장 많이 이루어지는 곳은 선진국의 재활용센터가 아니라 저개발국가의 슬럼 지대다. 쓰레기를 가장 적게 배출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쓰레기를 처리하면서 가장 큰 책임과 위험을 떠맡는 이 구조는 탄소를 가장 적게 배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기후불평등과 똑같다. 유해물질의 국가 간 이동과 교역을 금지하는 바젤협약이 1989년 체결되었지만, 이런 협약을 만든 당사국인 동시에 가장 많이 어기는 나라들은 미국, 영국, 독일, 캐나다 등 OECD 주요 국가들이다. OECD 가입국인 한국도 이 대열에 합류해 필리핀에서 한국산 쓰레기 컨테이너가 발견돼 반송되기도 했다. 한반도 남단의 섬 제주도는 나우루의 운명을 목전에 두고 있다.

서구의 전투기가 아프리카와 중동의 원전을 따라 이동하고, EU가 띄운 드론이 난민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듯이, 쓰레기 발자국은 소비가 남긴 탄소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 발자국은 공교롭게도 똑같이 겹친다. 글로벌 항공사와 호텔체인에서는 승객과 투숙객에게 제공한 일회용 제품들을 가난한 국가의 특정 도시와 처리계약을 체결하여 외주화하기도 한다. 터키의 모카탐은 쓰레기 산촌으로 유명한 곳이다. 영화 〈개비지 드림스〉의 배경이 되었던 이 마을에서는 쓰레기가 커먼즈(commons)가 됐다. 무람바크 정부가 효율성과 합리화를 내세워 쓰레기 수거를 민영화하자, 쓰레기를 파내어 재생자원을 찾아내고, 재생기술을 익히며 함께 의탁해서 살아가던 공동체는 순식간에 파괴됐다. 모카탐의 주민들은 외국기업에 쓰레기를 수거해서 갖다주면서도 처리 수수료를 낸다. 쓰레기가 돈이 되자 쓰레기 사업은 범죄와 결부된 이권 사업이 되어 쓰레기 마을에서 생겨났던 자생적인 자급공동체를 해체하고 빈자의 결속과 연대를 파괴했다. 주류환경담론이 금융과 기술이 집약적으로 투자돼야 하는 그린에너지나 그린자동차, 그린리모델링 등에 그린뉴딜 의제를 집중시키는 반면 쓰레기 문제를 전면화하지 않는 까닭도 쓰레기산업은 그런 류의 녹색시장을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신성장 녹색산업의 쓰레기 배출을 위해서라도 쓰레기 경제는 당분간 지금 같은 기피 산업으로서 국제적 범죄 산업의 일부로 남아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국제적 쓰레기 불평등은 지금 지구가 처한 쓰레기 문제가 문명화된 시민들의 환경의식 고양과 분리배출이나 재활용 같은 개인적 실천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 유도 정책은 오히려 근본적인 원인을 은폐함으로써 해결을 위한 시간을 지연시킨다. 그린뉴딜 정책의 접근법도 이와 똑같다. 탄소세나 탄소배출권 거래제로 소비감축을 자발적으로 유도하겠다는 시장주의적 정책은 쓰레기 종량제 봉투로 쓰레기를 줄이겠다는 발상과 마찬가지다. 이런 가격상쇄제도는 가난한 사람들의 허리띠는 졸라매는 데는 가장 효과적이나 부자들의 낭비에는 어떤 강제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개인의 실천은 중요한 시작이다. 하지만 그것이 양심을 위무하는 자기 만족적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구조적 문제들을 자각하고 자기 삶의 자리에서 차별과 착취의 사슬을 끊는 저항실천이 될 때만, 우리 각자의 삶터는 자본주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연대의 해방구가 될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 원인’에 대해 싸워야 한다. 탄소도 쓰레기도 마찬가지다. ‘정의로운 전환’은 ‘우리의 삶을 쓰레기로 만드는 자들’에 맞서 모든 잉여화 된 존재의 연대와 투쟁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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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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