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하는 몸’을 지워낸 끔찍한 세상에서

[질문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꽤 오랫동안 연립주택에 살았다. 층마다 두 채의 집이 있는 건물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주말 아침마다 모여 청소를 했다. 그냥 비질만 하거나 쓰레기를 줍는 수준이 아니라 물을 끼얹어 박박 닦는 청소였다. 일주일에 한 번, 주민들은 청소를 하며 건물을 깨끗하게 유지했다. 나는 주말 아침 청소 소리에 늦잠을 못 자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청소는 어른들의 일이었기에 모른 척할 수 있었다. 주말이 아니어도 종종 비질하는 이웃을 마주치기도 했다. 동네가 그리 더럽지 않았던 것은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청소이기에 주민 스스로 더럽히지 않으려고 애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세월이 흘러 청소노동자들이 청소해주는 아파트나 오피스텔에 살게 됐다. 밤늦게 집에 돌아가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러 냄새와 사람들의 흔적을 확인한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면 나는 반짝반짝 빛나고 깔끔한 향기가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 어제의 퀴퀴한 흔적을 말끔히 날려버리는 청소요정 덕분이다. 청소요정의 마법 현장을 마주치기란 쉽지 않다. 가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는 것은 청소요정의 도구뿐이다. 내가 사는 공동주택의 청소요정이 몇 명인지 궁금했다. 어쩌다 한 분을 마주칠 때가 있는데 ‘설마 혼자서 이 건물을 청소하시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묻지는 못했다. 그저 최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밝게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청소요정은 내가 사는 건물에만 있지 않다. 마트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닦고 있는 모습을 목격할 때도 있고, 졸다가 종점까지 간 지하철 안에서 마주친 적도 있다. 어쩌면 나는 기억보다 더 많이 만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객의 쇼핑을, 다른 노동자의 업무를, 학생의 공부를 방해해서는 안 되는 이들은 투명하게 일을 하고 존재를 지운다. 아니 우리가 이들의 존재를 투명하게 지나친 것일 테다.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깨끗하게 반짝거린다. 존재도, 노동도 감쪽같이 사라지는 마법을 부린다.

누가 이 노동을 하찮게 만드나

내가 ‘청소요정’이라고 부르는(어떤 이들은 ‘유령’이라 부른다) 이들이 사람이고 노동자임을 우리는 안다.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청소요정이 사실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갑질과 모욕에 마음을 다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차라리 요정이면 반짝이는 막대기로 마법을 부릴 수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이들의 노동을 돕는 것은 마법 막대기가 아닌 마대 자루와 걸레, 화약 약품이며, 이들의 관절을 지탱하는 것은 각종 파스다.

세상은 청소 노동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하찮게 여긴다. 노동을 하찮게 여기니 노동을 하는 사람마저 하찮게 여긴다. 기술(전문성)이 필요 없는 집안일 같은 것이라는 인식은 청소도, 집안일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쉽게 하는 생각이다. 정말 청소 노동은 쉬운 노동일까?

인간이 움직이는 모든 공간은 쉽게 더럽혀진다. 청결을 유지하려면 꾸준함과 꼼꼼함을 장착한 몸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깔끔함은 지나쳐도 더러움은 눈에 띄기 쉬워 틈새도, 구석도, 천장도 놓칠 수 없다. 손 쓸 수 없는 낡음을 청결로 덮기 위해 나름의 청소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에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노하우도 쌓여야 한다. 아시아나케이오에서 기내 청소업무를 했던 노동자 김계월은 여행객들이 비행기에서 내린 뒤 다시 이륙하기 전까지, 모포를 수거하고 구석구석 끼워진 쓰레기를 빼내고, 의자 먼지를 털고 벨트를 엑스(X)자로 포개놓고, 갤리(승객에게 제공하는 음식물을 보관하는 곳)를 정리하고, 기내에 비치된 신문을 치우고, 화장실을 청소했다. 심지어 조명도 에어컨도 없이. 넉넉하지 않은 시간 내에 좁은 통로와 빽빽한 의자 사이를 비집고 해내는 청소는 어쩌면 기예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무한반복의 지루함을 견뎌내며 자신의 몸을 공간과 노동에 맞춘다. 청소와 함께 사라지는 그를 보지 못한다고 청소하는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청소하는 사람을 지우고 그 결과(품질)만을 보는 세상이 끔찍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얼마 전 서울대 청소노동자 사망에 대한 학교 구성원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는 것

사망 이후 동료 노동자의 증언으로 그동안 청소노동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다. 과중한 업무뿐 아니라 범위를 넘어선 업무 압박,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시험 등. 동료를 잃고 나서야 말하게 된 노동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비통했을까? 이러한 노동조건이 드러나며 안전관리팀장의 ‘갑질’이 사건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사건에 말을 보탠 교수들의 말을 들을수록 학교 운영자들이 만들어 놓은 인식과 환경이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가 된 시험에 대해 학생처장은 “외국인 학생이 상주하고 있어 정확한 응대를 하지 못해 (노동자들이) 당혹감이나 창피를 느꼈다는 사례가 많다”라며 “현장 근로자들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직무교육에 포함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인이 말을 걸면 당황할 수는 있겠지만, 답변을 못 한다고 창피를 느껴야 할까? 노동자의 어려움을 해결하기보다는 서울대에서 노동하려면 대답 정도는 외국어로 해야 한다는 부끄러움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진정 노동자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했다면 당사자에게 어려움이 없는지 묻고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언론과 정치권과 노조 눈치만 봐야 한다는 사실에 서울대 구성원으로서 모욕감을 느낀다”라는 학생처장과 “언론에 편파적으로 보도되며 생활관은 물론 서울대 전체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발생했다”라는 관악학생생활관 기획시설 부관장의 말에서 이곳은 청소노동자의 권리보다는 교수와 학교의 명예(그 명예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가 우선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조합이 “억지로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해 ‘순수한 유족’을 선동했다는 말로 유족과 청소노동자를 모욕하는 것을 보니 이곳에서 청소노동자가 존중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겠다.

학생처장은 자신의 말이 논란이 되자 “고인은 살아있는 저희가 풀어야 할 숙제를 일깨워주고 갔다. 노동환경을 둘러싼 뿌리 깊은 학내 갈등이 그것”이라는 말과 함께 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틀렸다. 문제는 ‘학내 갈등’이 아닌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고 노동의 권리를 박탈한 것이다. 그렇기에 동료 노동자이기도 한 고인의 남편이 “우리를 인격체로 봐 달라”라며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관계에서 제대로 된 노사관계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단지 청소노동자의 복지나 처우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이것은 노동자의 권리,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다. 그렇기에 팀장의 ‘갑질’뿐만 아니라 이런 관계가 가능했던 배경과 조건, 그 안에서 학교의 영향 혹은 방관은 없었는지에 대한 진상규명이 중요하다. 이 진상규명은 어떤 질문들로 나아가야 한다. 서울대에서 청소노동자는 어떤 존재였나. 서울대 구성원 안에서 청소노동자는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 청소업무에 있어 노동자의 의견을 듣고 반영할 수 있는 관계로 변화할 의지가 있는가.

체면을 완전히 구기고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하면서 자존감을 뭉개버리는 역기능적이고 파괴적인 수치심이 자주 경험될수록 비인간화된 사회라고 한다.1) 그것은 누군가에게 모멸감을 주는 행위가, 누군가를 비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인간으로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각주>
1) 김찬호,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문학과지성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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