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뱅크시 말고 팔레스타인에 간 뱅크시

[INTERNATIONAL2] 예술로 해방운동을 할 수 있을까?

[출처: banksy.co.uk]

서안지구 베들레헴은 예수탄생교회를 비롯한 여러 성지가 있어 한국 순례객에도 익숙한 관광지다. 이스라엘 관광업체가 독점한 이곳은 보통 반나절 코스다. 이스라엘 가이드는 관광객 무리를 이끌고 교회와 기념품 가게 몇 군데를 찍은 뒤 다시 숙소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간다. 하지만 기원전의 감흥에서 벗어나 교회 반경 2km를 걷다 보면 그야말로 ‘동시대적이고 현대적인’ 팔레스타인이 펼쳐진다. 이스라엘이 2002년부터 짓기 시작한 높이 8m, 길이 800km가 넘는 거대한 분리장벽만큼 더 생생한 지역 산물이 있을까. 오늘날 이곳은 ‘벽’ 하면 빠질 수 없는 전 세계 그라피티(Graffiti, 거리의 벽 등에 낙서처럼 그리는 예술) 아티스트들의 성지가 됐다. 세계적인 그라피티 아티스트 뱅크시도 2005년과 2007년 이 분리장벽 앞에 섰다.

1990년대 초반 영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뱅크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얼굴 없는’ 예술가다. 1974년 영국 브리스톨 출생의 백인 남성으로 추정된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정보가 없다. 2005년 뉴욕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에서 자신의 그림을 미술관 한쪽에 ‘무단 전시’ 한 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영상으로 제작해 명성을 얻었다. 2018년 런던 소더비 경매 에서는 뱅크시의 ‘풍선을 든 소녀’가 약 15억 원에 낙찰된 순간 그림이 자체 파쇄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또한 그가 오래전부터 계획해온 작품의 일부라는 것이 드러나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렇게 자본주의에 물든 미술계를 비웃으며 자유, 평화, 정의를 옹호하고 요구해온 그를 세상은 반체제주의자, 거리의 테러리스트, 반달리즘(Vandalism, 예술· 문화를 파괴하는 행위)을 일삼는 약탈자 등으로 불렀다.

뱅크시가 서안지구에 온 2005년은 이스라엘이 ‘테러 방지’를 구실로 쌓기 시작한 분리장벽이 국제 사회의 규탄을 받은 직후였다.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는 장벽에 대해 국제법 위반 판결을 내렸고 유엔 또한 건설을 중단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뱅크시는 베들레헴에 방문해 ‘꽃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 ‘이스라엘 군인을 검문하는 소녀’, ‘방탄조끼를 입은 비둘기’, ‘풍선을 든 소녀’ 등 9개의 벽화 작업을 한 뒤 자신의 웹사이트에 이렇게 남겼다.(1) “벽 자체가 불법인데 이 벽을 훼손하는 반달리즘은 과연 얼마나 불법일 수 있을까?” 2015년 2월 뱅크시는 가자에도 출몰했다. 2014년 7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이 50일 넘게 이어진 직후였다. 그는 고철 덩어리 위에 귀여운 아기 고양이가 고물을 실타래 삼아 노는 장면을 완성했다. 그리고 핏자국 같은 빨간색 스프레이로 이런 문구를 남겼다. “우리가 강자와 약자 간 갈등에 손을 뗀다면 우리는 강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결코 중립을 유지하는 게 아니다.”

아트가 돈이 되는 세상에서

뱅크시는 분명 팔레스타인 쪽 분리장벽에 섰다. 그러나 의도도 미감도 훌륭한 그의 메시지는 자본주의 하늘 아래에서 구매자의 의협심을 채워주는 ‘황금’이 됐다. 뱅크시가 떠난 마을에는 전에 없던 혼돈이 찾아왔다. 벽화를 훔쳐 가려는 사람들, 개인 소유 벽에 그린 그림의 주인을 구슬려 헐값에 사들이려는 이웃들, 북미와 유럽에서 날아온 아트딜러들로 도시가 시끄러워 졌다. 그림이 그려진 분리장벽 앞에 기념품 가게를 차린 지역 상인은 차라리 순수한 편이었다. 자기 소유 건물 벽에 그려진 그림의 정체를 모른 채 이웃에게 헐값에 판 어느 주민은 뒤늦게 뱅크시의 가치를 알고 법정 다툼을 제기하기도 했다.

[출처: www.dailysabah.com_(c)REUTERS]

결국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뱅크시의 그림은 이스라엘의 분리장벽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을 상징한다”라며 팔레스타인 문화유산으로 편입 시켜 자치정부가 보존한다는 방침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그림이 야기한 투기 열풍에 대해 뱅크시가 직접적인 입장을 표명한 적은 없다. 다만 2007년 그가 펴낸 사진집 《Banksy - Wall and Piece》에서 작업 도중 만난 팔레스타인 노인과의 대화를 많은 여백과 함께 기록해 두었다. “자네가 벽을 예쁘게 만들어놨군. 하지만 우린 이 벽을 보기 좋게 만들고 싶지 않아. 장벽이 사라지길 바랄 뿐이지.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가게.”

물론 뱅크시는 자본주의를 창안하거나 장벽을 만든 이가 아니다. 하지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서 가장 가시적인 주체로 지목되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버렸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술의 예기치 못한 면모 앞에 멈칫하게 된다. 너무 순진하게 신나 했던 건 아닐까, 너무 이상적이기만 했던 건 아닐까, 예술이 과연 점령 종식과 해방 운동에 기여할 수 있을까…. 행동주의를 뜻하는 액티비즘은 가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체계적인 방식으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목표다. 영향력을 키워 정부와 기업 등 의무 담지자를 압박해 행동의 변화를 촉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예술은 정량적인 목표를 세운다기 보다 자연스레 개인의 정서를 건드리는 작용을 추구한다. 언뜻 상충해 보이지만, 액티비즘의 방향으로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걸어가려면 개개인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그렇기에 이 둘은 연결되어 있다. 현실 사회 운동에서 목적과 수단은 종종 뒤바뀌기도 하고 좋은 말로는 시너지를 내기도 한다. 특히 점령이라는 한계에서 예술은 가장 안정적인 전략 수단이 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의 레지스탕스 예술인들 또한 이 사실을 꿰뚫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 온 ‘○○○’

팔레스타인을 찾은 서구 아티스트 중 뱅크시보다 더 유명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피카소다. 정확하게는 피카소의 1943년 작품 ‘여인의 흉상(Buste de Femme)’ 이다. 피카소의 작품이 아인트호벤에서 라말라에 당도한 것은 2011년이었다. 이름하여 ‘피카소 in 팔레스타인 프로젝트’(2)다. 피점령지에 710만 달러(약 81억 원)를 호가하는 세계적인 미술품을 들여오는 과정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그 자체로 이스라엘의 점령이 야기한 온갖 불법성과 부조리함을 조명하기에 충분했다.

미술품 보험회사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잠재적 리스크를 추산하기 위해 오슬로 협정문부터 공부했다. 운송업체는 출입 가능한 항구와 공항, 검문소 등을 조율하느라 애를 먹었다. 점령 하의 팔레스타인은 피카소의 그림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전시 환경을 충족하지 못할 만큼 인프라가 열악했기에 기관 간 대출 정책 프로토콜에도 비상이 걸렸다. 결국 전시는 1970년대 팔레스타인 예술가 연맹이 세운 서안지구 최초의 아트 갤러리, 갤러리79(3)가 있던 건물에서 열렸다. 갤러리79는 1차 인티파다(1987년) 때 이스라엘 군대의 탄압으로 명맥이 끊긴 팔레스타인의 대표적 문화 기관이었다.

이런 스토리는 그간 ‘분쟁’과 ‘테러’로만 팔레스타인을 언급해오던 미디어에 새로운 내러티브를 던져줬다.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전시를 보러 왔음은 물론이고 뉴스 통신사, TV 채널, 예술 전문지 할 것 없이 취재진이 몰려들어 특집으로 보도했다. 프로젝트의 총괄 큐레이터이자 팔레스타인의 국민 아티스트 칼레드 후라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현실을 현대 미술의 세계에 접목해 알리고 싶었어요. 프로젝트의 핵심은 ‘피카소’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온 피카소’ 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맥락을 지닌 수단으로서의 예술

이렇듯 어떤 예술은 유머를 곁들여 인류 공통의 인간성을 상기시키기도 하고, 형식을 방패 삼아 불합리한 구조를 비추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강렬한 메시지를 각인시킨다. 흔히 캠페인을 기획할 때 빠지지 않는 필요충분조건은 ‘대중 인식 제고’다. 사회 구성원 스스로 가치를 내면화 하지 않으면 애초에 법이나 정책이 제정될 기반이 생기지 않을 테니까. 문화가 곧 정치의 토대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문화 형성에 있어 예술은 가장 급진적인 상상력으로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이야기 하는 재료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력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연대감을 형성해 행동한다고 믿는다.


다시 거리의 예술가 뱅크시로 돌아와서, 그의 그라피티가 ‘팔레스타인’이라는 시공간과 사건, 사람의 맥락 속에서 이룬 풍부한 상호작용을 떠올려본다. 분리장벽이 대대적으로 불법성을 규탄받은 시점에, 풍선 다발을 들고 그 장벽을 넘어가려는 소녀를 벽에 그렸다. 그러자 수많은 대중이 찾아와 장벽 앞에 서서 팔레스타인인들이 느꼈을 고립감을 경험했다. 분명 예술은 작가가 의도한 모든 맥락이 맞아떨어졌을 때 가장 빛난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애초에 맥락을 형성하는 것과 필요에 따라 맥락을 재형성하는 것 모두 수용자들에 달려있다는 것, 개개인이 변화를 이끌어갈 여지가 늘 남아있음을 잊지 않는 것 또한 중요할 것이다.

사실 이 글은 뱅크시의 순회전이 곧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에 스스로가 갈지 말지 고민하다 쓰게 됐다. 물론 이 전시는 뱅크시가 동의했거나 원한 것이 아니라 뱅크시 작품을 소장한 컬렉터들의 작품을 대여하거나 원작을 재현한 150여 점을 전시하는 것이다. 거리에서 모두에게 무료로 공개한 작품을 모아둔 유료 전시인 건 분명하다. 뱅크시 자신도 “나는 이 전시를 승인한 적이 없으며, 각자 알아서들 대응 하시라”라고(4) 적어 두었다. 전시에 갈지 말지, 무엇을 보고 올지, 전시를 접한 뒤 어떤 행동을 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 ‘그냥 뱅크시’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간 뱅크시를 떠올리는 한, 전시에 굳이 갈 필요도, 일부러 가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각주>
1. www.thecrimson.com/column/the-art-of-protest/article/2014/3/26/the-art-of-protest-banksy/ 참조
2. https://www.frieze.com/article/picasso-palestine 참조
3. https://www.e-flux.com/journal/33/68274/no-good-time-for-an-exhibition-reflections-on-the-picasso-in-palestine-project-part-i 참조
4. 공식 웹사이트 https://banksy.co.uk/shows.asp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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