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관계(interests)

[워커스 사전]


2020년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 WEF)의 주제는 ‘결속력 있고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한 이해관계자들(stakeholders for a cohesive and sustainable world)’이었다. WEF는 이를 계기로 다보스 선언(Davos Manifesto)까지 개정하면서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강조하는 새로운 기준을 명문화했다. 클라우스 슈밥 회장이 “기업계는 이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은 자본가의 반성처럼 보였다. 미국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188명을 회원으로 둔 단체로, 미국의 전경련이라고 할 수 있는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BRT)’도 2019년 “고객 가치 제공, 종업원 투자, 협력업체와의 공정하고 윤리적인 거래, 지역사회 지원, 장기적인 주주 가치 창출 모두가 기업의 필수적인 목적이다”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하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주창했다.

이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ESG와 함께 한국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 언론과 시민사회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나 기업의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투자평가에 반영하는 ‘ESG’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모델이라 평가하며 수용하는 모습이다. 노동자들이 보기에 대체 이건 또 무슨 자본주의일까 의구심이 들지만, 기업이 앞장서서 주주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고 앞으로는 주주뿐만 아니라 ‘고객, 종업원, 협력업체, 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 이익이 공정하게 분배될 수 있도록 하겠다니 딱히 반대할 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자본이 ‘이해관계자’를 호명할 때 ‘노동조합’은 언제나 빠져 있으며, 기업·정부·시민사회 민관협치 거버넌스를 좀 더 기업 중심의 공동의 이해관계자 집단으로 결속시킨다. 시민사회 역할 또한 감시와 견제보다 정부·기업과 협력을 강조하여 이익공동체적 공조 관계로 재편하는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창조경제에서 유행했던 기업·대학·연구소·지자체를 하나의 복합 산업협력체(클러스터)로 묶어서 공유가치를 창조하자던 ‘클러스터 자본주의’의 혁신 판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자본주의 체제에 위기나 비판이 대두될 때마다 자본가들이 앞장서서 ‘구식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혁신을 주장하는 모습은 새로울 것이 없다. 클러스터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5.0’이라고 불렸는데, 이 자본주의 베타 버전은 5.0 이후에 얼마나 갱신됐는지 모르겠다. 자본주의자의 자본주의 비판은 늘 ‘자본주의의 대안’이 아닌 ‘대안 자본주의’를 내놓는다. 지금 나온 이해관계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계속 고장 나는 베타 버전의 수정본 이상이 될 수 있을까? 이번에는 주주자본주의(stockholder capitalism)를 비판하면서 그것을 극복하겠다고 이해관계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내놨지만, 주식을 소유한 ‘스톡홀더’와 지분을 소유한 ‘스테이크홀더’가 그렇게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주주의 이해관계를 전 사회적인 당사자 이해관계로 확장한 것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모델은 사회구성원을 시장참여자로, 정치적 참여를 경제적 지분으로 재구성하여 전체 사회와 국가를 하나의 기업 모델로 재구축한다. 여기서 기업은 각각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이익을 배분하는 최종심급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정작 기업에 대해선 아무런 법적 규제나 강제성이 없는, 기업들의 자체적인 선언이자 자발적 협약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용어가 등장할 때마다 자본의 언어를 진실 고백으로 믿고 신빙성 있게 만들어주는 언론과 지식인, 시민사회 인사들이다. 요즘은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도 ‘이해관계’나 ‘이해관계자’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영어로 이해관계(interest)는 이자, 이익이란 뜻이 있다. 이해관계 역시 이익이 걸려있는 관계니까 ‘이익관계’나 ‘손익관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해관계라고 부르는 순간, 동음이의어 효과에 의해 의미가 중화된다. 특히 같은 한자문화권에서도, ‘이해하다’의 이해(理解)와 ‘이익·손해’를 뜻하는 이해(利害)가 각각 리지에(理解, lǐjiě)와 리하이(利害, lìhài), 리카이(理解, りかい)와 리가이(利害, りがい)로 소릿값이 다른 중국어나 일본어와 달리, 한국말로는 발음까지 똑같기 때문에 더욱더 부정적 의미가 사라지고 중화되는 효과가 있다. 이해관계란 말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은폐하고, 억압과 피억압을 서로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 관계로 바꿔버린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관계를 양국 간 이해관계라고 말하는 것이 부당한 것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더러운 전쟁의 참상을 은폐하고 무미건조하게 ‘당사자 간 갈등’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 국가와 주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노사갈등이나 입지갈등이라고 말하면 압도적 힘의 우위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순식간에 평평한 당사자들 간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바뀐다. 이해관계라는 말의 ‘중립성’은 어떤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런 상징폭력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해관계라는 말이 원래 중립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16세기 후반까지 서유럽에서 ‘인터레스트interest’는 ‘관심, 열망, 이득’을 포괄하는 의미였고, 열망의 총체이면서 동시에 그런 열망을 달성하는 방법에 대한 계산까지 의미하는 용어였다. 영어로 ‘관심 있다, 흥미롭다(be interested in)’가 수동형으로 표현되듯이, 그것은 감정변화 특히 대상에 정복당하고 끌려가는 감정과 욕구로서 수동적 정념을 나타낸다. 이 정념에는 오랫동안 대부업 용어로 쓰였던 ‘이자/이익’의 용법과 결부돼 ‘계산’이라는 요소가 항시 따라붙었고, ‘이해타산적(self-interested)’이란 말은 늘 ‘이기주의, 사익추구, 사리사욕’ 등의 부정적 의미로 사용됐다.

허시먼(Albert O. Hirschman)은 이 이해관계란 말이 어떻게 다른 정념/욕망과 달리 긍정적 의미를 얻게 됐으며 나아가 인간행동과 사회의 원리를 설명하는 주요 패러다임이 됐는지를 《정념과 이해관계 Passion and Interest -자본주의의 승리 이전에 등장한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논변들》(노정태 역, 후마니타스, 2020)에서 상세히 추적한다.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탐욕, 금전욕, 과욕 등으로 비난 또는 경멸받았던 상업, 은행업, 그리고 이와 유사한 종류의 영리 추구 활동이 어떻게 근대의 특정 지점에 이르러 명예로운 활동이 될 수 있었는가?”(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도서출판 길, 2013, 97쪽) 라는 베버의 의문에서 시작하는 그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그 의문을 푸는 과정을 따라가 보면 ‘기업가’가 어떻게 그 말에서 악덕을 걷어내고 명예의 후광을 드리울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허시먼의 작업은 정념(욕망) 중의 하나였던 이해관계가 정념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정념, 즉 정념을 다스리는 정념이 되는 과정을 해명한다. 자본주의 이전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까지 탐욕, 금전욕, 과욕 같은 악덕을 제어한 것은 ‘영광에 대한 갈망’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돈과 소유에 대한 욕망’은 ‘지배욕’ 및 ‘성욕’과 함께 타락한 인간의 세 가지 주된 죄악으로 인식됐는데, 중세인들에게 이 욕망을 억제한 것은 바로 ‘영광에 대한 갈망’이었다. 좋은 정념으로 나쁜 정념을 억누르고 더 강한 정념으로 더 약한 정념을 해소하는 것은 정념 다스리기의 오래된 기술이다. 신에 대한 사랑으로 세속의 욕망을 억누르는 기독교적 금욕주의도 대표적인 정념의 통치술이다. 명예와 영광에 대한 갈구는 중세의 귀족적 이상이자 남성적 덕목이다. 근대에 오면 명예와 영광을 흠모하는 귀족적 정념은 다른 형태의 ‘보상할 만한 사회적 인정 가치’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해관계’가 그 정념을 통제하는 정념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영광을 갈망하는 정념이 이익을 갈망하는 정념에 기타 정념들을 다스리는 조련사의 채찍을 넘겨준 것이다. 하나의 정념으로 다른 하나의 정념을 상쇄시키는 ‘정념의 상쇄 원칙’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이익의 상쇄 원칙’으로 시장원리를 설명하는 데 쓰인다. ‘탄소 중립’의 시장주의적 논변에 사용되는 상쇄의 원칙도 마찬가지다. 자본을 비롯한 시장참여자들은 손익을 저울질 하여 이익이 더 큰 쪽으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손해를 줄이고 이익을 크게 하는 쪽으로 유도하면 이익 쪽으로 견인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재생에너지 투자가 석탄 투자보다 더 이익이 되면 자본은 재생에너지에 투자할 것이고 석탄은 시장에서 퇴출당할 것이다. 화석연료보다 재생에너지 가격이 더 싸지면 소비자는 재생에너지를 선호할 것이다. 전기요금과 주유세를 인상하면 손해를 줄이려고 불을 끄고 차를 덜 탈 것이니 탄소배출이 줄 것이다. 이런 논리가 모두 이익 동기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이해관계자들이 각자 더 큰 이익을 얻는 대차대조표를 보여주는 것이 ‘탈석탄 사회’를 앞당길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시장주의적 셈법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원인과 자신들이 이해관계로 치환한 권력 관계가 평등하지 않다는 기본 전제를 늘 빼놓는다.

개인적 정념을 표현하던 이해관계는 어떻게 국가의 이해관계라는 용어로까지 발전하게 됐을까? 단수형으로 표현된 국가의 이해관계(national interest)는 17세기 초에 나타난다. 당시 영국(England)에서 이 말이 처음 쓰였을 때는 오늘날 우리가 미국의 이해관계, 한국의 이해관계라고 말하는 것처럼 타국과의 관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국 내에서 충돌하는 권력 관계에 대해서 쓰였다. 당시의 ‘국가의 이해관계’란 곧 지배자(왕국)의 이해관계를 의미했다. 지배자의 이해관계는 다양한 피지배자들의 ‘이해관계들’과 관련된다. 국가의 이해관계는 국가 내 제 세력들 간의 이해관계들(interests)과 대립하면서 동시에 조정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여기서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과 같은 개념이 생겨난다. 이때까지도 이해관계는 이성적인 것보다는 정념과 욕망으로 이해되며, 여러 문헌에서 이익(interest)은 여전히 탐욕과 동의어로 쓰인다. 지배자의 이해관계는 국가의 이해관계로 이행하면서 사익(private interest)과 공익(public interest)의 구도를 낳고, 이때 ‘공익’이란 것은 ‘사적이익들(private interests)의 총합’이자 공통의 이익에서 나아가 국가이익으로 발전한다. 프랑스에서 엥테레(intérêt)도 17세기 초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영국과 달리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가 일찍 안정화된 프랑스에서는 이 말이 국내 권력에서 대외관계까지 훨씬 더 정치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됐다. 예컨대 프랑스의 이해관계가 스페인의 이해관계와 대립한다고 할 때, ‘국가이익(이해관계)intérêt national’은 종종 ‘국가이성raison nationale’과 동일시된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을 쓰면서 정념과 악덕 같은 도덕주의적 용어를 ‘이득’과 ‘이해관계’라는 무색무취한 용어로 대체했다. 여기서 이해관계는 개인의 이해관계나 국가의 이해 관계에 모두 쓰일 수 있는 보편적 용법을 갖게 됐고, 19세기 자유주의 경제이론의 핵심 용어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런 용법의 변화를 통해 이제 이해관계는 정념의 하나이면서도 다른 여타의 정념들과는 다른 위상을 갖게 된다. 이해관계란 말은 넓은 의미의 이해관계와 좁은 의미의 이해관계로 분화된다. 좁은 의미의 이해관계가 정념의 한 종류로서 ‘이익에 대한 욕망’이라면 넓은 의미의 이해관계는 충돌하는 작은 이해관계(정념)들을 조정하는 합리적 분별력과 효율성의 계산이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이렇게 해서 이해관계란 말은 ‘이기주의와 합리성의 독특한 혼합체’로 나타나게 되는데, 플라톤 이래로 인간의 행동 동기를 분석하는 지배적 범주였던 정념과 이성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욕망이면서도 이성’인 제3의 범주를 만들어냈다. 이해관계라고 불리는 “그 최종적인 결합물은 탐욕을 특권적 위치의 정념으로 승격해, 야생의 정념을 길들이는 통치술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됐던 것이다. 이상으로 우리는 허시먼이 추적한 개념의 계보학을 통해, 중세의 일곱 가지 대죄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었고 17세기 초반까지도 모든 악덕 가운데 가장 추악한 것으로 간주했던 ‘탐욕’이, 어째서 갑자기 칭송받는 미덕이 됐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돈벌이’가 ‘이해관계들’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변장하자, 다른 정념들을 제치고 심지어 원래는 그보다 훨씬 덜 나쁜 정념이라 여겨졌던 여타의 정념들까지 저지하는” 역할을 떠맡게 됐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관계라는 발상이 등장하고, 그것이 패러다임이 될 뿐 아니라 대유행이 되면서, 갑자기 거의 모든 인간 행위가 때로는 동어반복 수준에 이를 정도로 자기이익(self interest)을 통해 설명되기 시작했다”고 허시먼은 설명한다. 오늘날 우리가 노상 사용하는 이 용어는 대부업자의 용어에서 국가 이익이나 공적 이익과 같은 개념을 거쳐 드디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세계적인 지배 패러다임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해관계가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발상은 18세기까지 열광적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경제학에서 인간행동이란 ‘이해관계’의 개념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됐다. 지금도 자본의 탐욕은 이해관계라는 말로 변장하고 자기보다 훨씬 고귀한 정념들을 저지하는 역할을 한다. 이해관계는 정치적 결단과 실천 행동을 가로막으며 손익계산을 해보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가능성과 현실성의 계산기를 들이밀며 우리의 마음속에 자라는 뜨거운 열망을 차갑게 식히고 무망한 것으로 꺾어버린다. 노동해방에 대한 열망,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다른 세상에 대한 정치적 열정들을 불가능, 비현실성, 비효율적인 것으로 무릎 꿇린다. 인간이 오직 이해관계에 포박된 존재라면, 인간의 역사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정치적 기적들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해관계는 춤추며 죽으러 가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각자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단결하고 연대하려는 정념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이해관계자로서’라고 말하지 말자. ‘노동자로서, 가난한 자로서, 시민으로서, 여성으로서, 소수자로서’라고 말하자. 개별성, 익명성, 중립성 뒤에 감춰진 폭력의 구조와 권력의 관계를 드러내는 이름,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이름이, 우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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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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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이해관계는 정치적 결단과 실천 행동을 가로막으며 손익계산을 해보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가능성과 현실성의 계산기를 들이밀며 우리의 마음속에 자라는 뜨거운 열망을 차갑게 식히고 무망한 것으로 꺾어버린다. 노동해방에 대한 열망,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다른 세상에 대한 정치적 열정들을 불가능, 비현실성, 비효율적인 것으로 무릎 꿇린다. 인간이 오직 이해관계에 포박된 존재라면, 인간의 역사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정치적 기적들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해관계는 춤추며 죽으러 가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각자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단결하고 연대하려는 정념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이해관계자로서’라고 말하지 말자. ‘노동자로서, 가난한 자로서, 시민으로서, 여성으로서, 소수자로서’라고 말하자. 개별성, 익명성, 중립성 뒤에 감춰진 폭력의 구조와 권력의 관계를 드러내는 이름,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이름이, 우리의 힘이다.

  • 잘 읽었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관계로 환원하려는 자본주의 사회는 오징어게임에서 보이는 악의로만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과도 비슷하게 느껴지네요.

    그나저나, 중간중간 띄어쓰기 오타가 보여 수정이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