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특집호] 워커스 사전

[출처: 홍진훤]

성장이라는 말이 경제에 쓰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이전에 성장이란 말은 생명체의 성장과 생장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이지 ‘경제 성장’과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국부론이나 국민경제학의 개념이 생겨나고 나서야 비로소 국부의 증대나 국민경제의 성장이란 표상도 가능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경제 성장이란 개념도 구체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장이 구체적인 ‘숫자’로 표시되기 때문이다. 숫자는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늘 구체적인 실물에 대응할 수 있는 객관적 실체로 쉽게 받아들여진다. ‘파이’를 키운다와 같은 구체적인 비유를 비롯해 성장이란 개념을 직관할 수 있게 만드는 시각화된 이미지도 많다. 물질적인 형태로 감각할 수 있게 하는 자본주의적 풍요의 전시장도 도처에 있어, 경제 성장이란 너무나 자명하고 구체적으로 상상이 가능하다. 반면에 성장을 멈춘다거나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런 혼돈이 생긴 것은 ‘성장’이 자연으로부터 빌려온 말이기 때문이다. 성장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자라다, 커지다, 불어나다는 뜻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몸집이 커지거나 양이나 부피가 불어난다는 뜻이다. 자연의 생산과 재생산, 생명 존재의 생성과 변이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동물과 식물이 자라다, 생장하다는 의미로 쓰인 ‘신체적인 성장’을 정신적인 것에 대입해 ‘정신적 성장’이라는 비유적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독일어에서 빌둥(Bildung)은 ‘짓다, 생성하다, 형성하다’에서 나왔지만 물질적 측면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교양과 도야의 의미가 더 강조되는 대표적인 개념이다. 경제 성장이란 말은 실제로 성장하는 존재들의 신체적 성장이나 정신적 성장과는 관련이 없다. 그것은 부의 성장이고 돈의 성장이며 숫자로 측정돼 지표로 나타나는 성장이다. 경제 성장의 지표는 영양상태나 교육 수준 같은 신체적·정신적 차원의 척도를 반영해 계산되기도 한다. 하지만 왜 영양상태가 더 좋아졌는데 더 가난해졌는지, 교육 수준은 높아졌는데 취업은 더 힘든지 같은 연결된 사회문제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돈이 어떻게 자라는 것일까? ‘새끼를 낳는 돈’이라도 있는 것일까? 있다. 오래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 낳은 새끼를 ‘이자’라고 말했다. 몸이 없는 것이 새끼를 낳고, 자라지 못하는 것이 자라니 이것은 괴물이다. 괴물을 키우는 자, 이자로 돈을 버는 자들은 고대 사회에서 공동체에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투자의 귀재요, 모험가적 기업가로 불린다.

발전도 그런 개념이다. 《반(反)자본 발전 사전》(1)에서 ‘발전’을 집필한 구스타보 에스테바는 원래 영어로 이 말(development)은 “한 물체나 유기체의 잠재력이 발산되어 종국적으로 자연스럽고 모자란 데 없는 난숙한 형태에 도달하는 과정”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 어원상으로도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피어남, 자라남,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가리킨다. 즉 ‘싸다(envelop)’의 반대말이다. 디벨로프는 꽃이 개화하는 모습이나 싹이 터서 자라는 모습, 유체에서 성체로의 성장을 묘사한다. 발전에는 양적 증대의 의미에 질적 성숙으로서의 성장의 의미가 추가돼 있다. 디벨로프(development)는 발전 외에 발달(發達), 개발(開發)로도 옮겨졌다.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 일본어 번역가들은 서양어를 번역할 때 개념의 원뜻을 최대한 살리면서 중국 고대 문헌에서 한자를 집자해서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개발’은 고대 한문에서 ‘봉투(싸개, 봉우리)를 열다 de-velop’는 의미로 쓰였던 단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발달, 발전, 개발에서 꽃이 피는 모습이나 생명이 자라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대신 개발은 ‘자원 개발, 능력 개발, 산업 개발, 신제품 개발’과 같은 용법에서 볼 수 있듯이 토지나 천연자원을 유용하게 만드는 것, 지식과 재능을 발달시키는 것,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 새로운 물건이나 새로운 생각을 내놓는 것 등의 의미로 쓰인다. 이것은 스스로 터져 나오는 생명의 분출과 자율적인 생산의 의미가 아니라, 대상에서 뽑아내는 추출의 의미다. 인간을 성장시키는 교육이 대상을 비주체화할 때는 교육도 추출될 수 있다. 심지어 스스로의 성장 발전을 도모하는 ‘자기 수양’도 자신을 대상화하는 ‘자기 개발’의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의 용법은 발전주의 서사를 통해 만들어진 경제학적 성장 개념이 다시 인간학과 교육학에 재적용된 결과다.

에스테바에 따르면 ‘발달’이라는 근대적 개념이 탄생한 것은 18세기 생물학을 통해서다. 생물학에서 “살아있는 생명의 발달이나 진화는 유기체가 자신이 간직한 유전자의 잠재력을 완성하는 과정”으로 재정의 됐고, 이것은 “생물학자가 앞질러 내다본 생명의 자연스러운 형태를 완성하는 과정”을 가리키게 된다. 목표를 향한 과정으로서의 발달 개념 속에서 동물이나 식물이 자신의 유전 프로그램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 발달은 좌초된 것으로 인식된다. “그렇게 실패했을 경우 생장은 발달이 아니라 기형이었다. 병리적 형태였고, 심지어 자연을 거스르는 형태였다. 이런 괴물들을 연구하는 것이 초창기 생물학 이론의 기반을 다지는데 중요했다.” 1759년 볼프의 발생학에서 “존재의 ‘합당한’ 형태를 향해 움직이는 변형”을 뜻하던 발달 개념은 1859년 다윈의 진화론에 이르면 “점점 ‘완벽한’ 형태를 향해 움직이는 변형” 개념으로 다시 변화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아동의 발달, 인지발달, 발달 장애’와 같은 발달 개념은 이런 발생학과 진화론 속에서 만들어졌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생물학적인 비유가 사회에 적극 적용되기 시작한다. 독일 역사학에서는 사회변화의 점진적 과정에 ‘발달(Entwicklung)’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다. 헤르더는 이 용어를 역사에 적용하여 ‘총체사’의 개념을 제시하는데 사용한다. “신이 창조한 우주의 똑같은 발전이 각각 역사와 자연의 변이체로 나타났을 뿐”이므로, 역사발전은 자연발달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본 것이다. ‘발전’이라는 말은 생물체나 자연이 아닌 사회와 역사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사용됐다. 이런 혼용을 통해 발전은 생물학적 진화 법칙처럼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자연법칙 같은 것으로 표상됐다. 역사발전과 사회발전의 개념은 진보의 개념과 함께 경제적 발전만이 아니라 자유의 증진이나 차별과 불평등의 개선을 통해 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간다는 가치의 지향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경제 성장이라는 양적 의미로 축소돼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발전 개념이 탄생한 것은 1949년이다.

[출처: 홍진훤]

1949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발전을 전 세계 전 인류의 목표로 설정한다. 초강대국 정상의 선언에 따라 세계는 발전국가와 미발전국가로 나뉘었고, 세계 20억 인구가 저발전된 인간으로 재탄생했다. 18세기 생물학이 발달에 실패한 개체를 기형, 괴물, 비정상으로 규정했듯이, 이제 저발전 지역들이 그렇게 규정됐다. 트루먼이 목표로 제시한 발전 모델은 미국처럼 거대한 생산과 소비의 체제를 통해 ‘성장하는 경제’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과학 진보와 산업 발달의 수혜가 저발전 지역의 향상과 성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새롭고 과감한 사업에 착수해야 합니다. (…) 우리가 구상하는 것은 공정한 민주적 거래에 토대를 둔 발전 사업입니다.” 트루먼이 연설문에서 말한 공정한 민주적 거래란 곧 ‘자유로운 거래’였다. 군사적 침략을 통한 직접 수탈 방식 대신 동등한 국가 간의 협약과 기업 간의 시장 거래로 서구의 기술과 자본을 저발전국가에 비싸게 제공하고, 그 나라의 자원과 노동력을 싼값에 취득하는 방식이었다. 발전은 그렇게 생물의 발전에서 사회 발전, 역사 발전의 의미로, 다시 보다 특수한 의미의 정치적 조어로 변화해왔다.

이러한 발전과 성장은 구체적으로 보이도록 측정돼야 했고, 가시화할 수 있는 수단인 숫자와 지표가 필요했다. 1963년 출범한 유엔 사회개발조사연구소는 그런 지표를 제공하는 기관이었다. 국제적 수준에서 국민총생산이나 1인당 국민소득을 국가별로 비교하는 체계적 통계 작업도 시작됐다. GNP가 오랫동안 성장 지표를 대변했지만 1970년대 이후 국제발전전략은 경제성장을 총량 척도로 측정한 발전 지표를 다양하게 보완해왔다. ‘통합 발전’이나 ‘참여 발전’이란 개념이 그것이다. 이런 보완적 성장지표는 환경, 인구, 기아, 여성, 주거, 고용 등 주요 문제들을 통계에 반영해 통합적 지표를 개발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인간 중심 발전’ 개념이 제시된다. 1990년부터 유엔 개발계획은 경제개발지수에 더해 인간개발지수를 중요하게 부각했으며, 기대 수명, 성인 문해율, 구매력과 빈곤층 비율을 반영한 지표로 인간개발지수를 분석한 ‘인간개발보고서(Human Development Report)’를 발간한다. 정량화된 수치는 발전 정도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발전경제학의 거시경제학적 방법들은 환경경제학에도 그대로 차용된다. 국가별 탄소중립 목표나 에너지 전환 비율을 지표로 전환하고 목표 달성량을 수량화해 이행 정도를 관리하는 기후정책도 성장주의 시대의 문법을 똑같이 따르고 있다.

생산하다(produce)도 이와 유사하게 사물의 성장과 자연의 생성이란 의미에서 ‘산업적 생산’으로 의미가 변화했다. 이반 일리히는 중세까지 창조, 생산, 제작이란 라틴어 동사는 각각의 주어에 대응해 사용됐음을 지적한 바 있다. 신은 창조하고(create), 자연은 생산하며(produce), 인간은 제작(make)한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이 분업과 협력의 모델은 깨진다. 신은 창조하는 힘을, 자연은 스스로 생산하는 힘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인간의 살림살이는 신의 살림과 자연의 살림으로부터 최초로 분리된다. 신도 자연도 더 이상 자기 활동의 주어가 되지 못했다. 창조와 생산과 제작의 주체는 모두 인간이다. 이제 인간은 신과 자연과 세계를 창조하고, 생산하고, 제작한다.

세 가지의 노동이 모두 인간의 일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창조는 생산보다 우월하다. 이것은 계급의 위계에 반영된다. 창조하는 계급은 생산하는 계급보다 높다. 신이 세계를 구상하듯이 부르주아는 창조하고, 자연이 그 구상대로 생산하듯이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은 생산한다. ‘제작’은 창작과 제조의 방식으로 이중적으로 양극화된다. 한편에서는 생산활동보다 뛰어난 상위단계의 작품 활동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생산체제의 하위 단계에 ‘제조 공정’으로 분화된다. 전자는 작가, 예술가, 장인들의 창작 활동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후자는 제조 단계의 단순 조립자들로 생산 라인의 일부로 취급된다. 창조경제는 이러한 노동 분화를 극단적으로 실현시킨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이폰 뒤에 쓰여 있는 ‘애플에서 디자인하고, 중국에서 조립했다’라는 문구다. 예전에는 ‘메이드 인’이 최종 생산지를 표시하는데 충분했지만, 이 문장은 이제 고안된 곳이 중요해졌음을 선언한다. 세계는 구상하는(design) 창조계급과 조립하는 잉여계급으로 다시 나뉘었다. 노동자는 생산자에서 조립자로 강등됐다. 창조계급은 기업(애플)에 속해있지만, 조립 노동자들은 국가(차이나)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성장, 발전, 생산 모두 자연으로부터 가져와 경제와 사회를 설명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지만, 변형된 개념들은 자연의 성장 법칙을 무시하고 위반한다. 시장 법칙과 달리 자연에는 ‘무한히 성장하는’ 존재가 없다. ‘사멸하는 존재’로서의 유한성이 신이 아닌 존재, 즉 지상에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공통성이다. 지구는 이 사멸하는 존재의 유한성에 기대서만 끊임없이 자기를 재생산할 수 있는 유한성의 장소다. 자연의 살림살이는 성장과 소멸의 순환 속에서 지속되며 생태계라는 대지 거주자들의 연결된 관계와 협력, 노동으로 번성한다.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이란 이 순환 고리를 끊고 외부로 끊임없이 확장해나가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서구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 과정에서 식민지, 노예, 여자, 동물이 ‘외부화’ 됐다. 자본은 숲과 들판, 지하와 대기를 남김없이 외부화했다. 이제 더 이상 팽창할 외부가 없다고 한다. 이것을 ‘프런티어의 소실’이라고 부른다. 쓰고 버리는 추출 경제는 프런티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자본은 자연적인 성장의 위기에 봉착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듯이 자본주의는 자기 꼬리를 잘라먹고 사는 뱀과 같다. 빨아먹을 존재가 사라지면 흡혈귀도 살 수 없듯, 좌파들이 진단하는 자본주의의 성장 불가능성은 현재의 자본주의가 그런 단계에 도달했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가만히 놔둬도 성장은 멈출 수밖에 없기에, 굳이 사회 변혁운동이 성장을 멈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까? 대신 우리가 상상하고 준비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 붕괴 이후의 대안일까? 아마도 그 답은 그동안 자본주의가 성장의 위기마다 어떤 출구로 빠져나왔는지를 돌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배층 내부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위기의식이 표출된 것이 1970년대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망하지 않았다. 대공황으로 1929년에 망했어야 했던 자본주의는 그때도 망하지 않았다. 1930년대 자본은 전쟁으로 위기를 탈출했고, 1970년대에는 금융공간과 신자유주의로 위기를 모면했다. 금본위제가 폐지되며 화폐가 실물경제의 구속에서 풀려났고, 국가 간 자본 거래가 재허용되며 국민경제와 내수시장에서 벗어난 금융시장이 확장됐다. 금융자본주의의 현재적 기원이다.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 국가 붕괴로 시장의 팽창 기회가 생기면서 반짝 성장했던 자본주의는 90년대 후반부터 만성화되는 세계적 금융위기로 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공간적 세계화가 한계에 도달하자 자본은 전자 공간으로 탈출했다. 금융 공간에서 생산은 토지 구속력에서 벗어났고, 전자 공간은 생산을 시간적 구속에서 해방시켰다. 24시간 경제 체제는 24시간 지구에서 노동과 생명과 에너지를 추출하여 가동된다. 금융과 IT의 융합 산업체는 실물 경제로부터 가상의 경제로 탈출하는 경로이자 ‘무한한 성장’이 이론상 가능한 공간이다. 그런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마크 저크버그는 메타버스에 투자하고, 빌 게이츠는 의료, 교육, 식량, 에너지와 같은 공공부문에 투자한다. 코로나 사태에서 봤듯이 인류의 위기도 자본에겐 돈벌이 기회다. 지금 금융자본주의는 개발을 위해 투자가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투자를 위해 개발이 동원되는 거꾸로 선 경제다. 증식하는 것은 부자들의 자산뿐이다. 그들은 돈에 돈을 부어 돈을 자라게 한다. 사회운동과 조직된 민중의 힘으로 자본의 폭주를 멈춰 세우지 않으면 조용히 성장을 멈추는 자본주의는 없다.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 또한 자본주의를 해체하는 반자본주의 탈성장 운동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1) 구스타보 에스테바. ‘발전- 두 개로 나뉜 세계’.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반(反)자본 발전사전-자본주의의 세계화를 뒤집는 19가지 개념』. 아카이브 2010. 1장 참고. 아래 인용(“”)은 모두 이 책 1장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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