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묵 목사 30주기를 기리며

[1단 기사로 본 세상] 그 장인에, 그 사위

[편집자주] 주요 언론사가 단신 처리한 작은 뉴스를 곱씹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한다. 2009년 같은 문패로 연재하다 중단한 것을 이어 받는다. 꼭 ‘1단’이 아니어도 ‘단신’ 처리한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한겨레 2022년 3월 21일 13면

아내는 90년대 초 수배 생활할 때 김영수(1952~2002) 목사님께 큰 도움을 받았다. 함께 수배 생활하던 동료가 체포되는 바람에 살던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곧바로 새 방을 구해야 했다. 수중에 단돈 3만원만 쥔 채 한겨울에 삶의 근거지를 옮겨야 하는 참담한 순간이었다. 당장 잘 곳도 없었다. 아내는 어렵사리 김영수 목사님과 연결돼 그의 도움으로 며칠을 의탁하고 새 근거지도 구했다.

김영수 목사는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특이한 이력을 지녔다. 김 목사는 평생을 가난한 민중의 삶을 개척하는데 자신의 온몸을 바쳐 싸웠다. 김 목사는 80년대 초 울산에서 노동교회를 맡아 울산지역노동운동의 씨앗을 뿌린 뒤 80년대 후반 부산으로 옮겨 우리교회를 거쳐 믿음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울산과 부산에서 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위원장을 지내며 지역 내 거의 모든 노동자 민중의 싸움에 함께했다. 그는 90년대 초 민중당 부산지부장을 맡아 경찰로부터 운동권 목사라는 칭호를 받았다. 김 목사 스스로 1992년 총선 때 부산진을 선거구 민중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아내가 김 목사의 도움을 받았던 때가 바로 그 무렵이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격렬했던 한국의 민주화운동도 한풀 꺾이자 김 목사는 1998년 7월 북한의 식량문제가 심각하다는 말을 듣고 불교,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등 4개 교단의 도움을 받아 ‘작은이를 생각하는 사람들’(이하 작은이들)을 만들어 북녘어린이 등 굶주리고 병들고 소외된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

작은이들을 창립한 후 금요일 하루 한 끼 굶기, 매주 1회의 거리모금 활동으로 성금을 모아 북녘 라진선봉지역의 유치원 탁아소 어린이 영양식 지원, 부산지역 무의탁노인, 결식아동지원, 캄보디아 에이즈가정 청소년 식량지원, 이주노동자 지원 사업 등 펼쳤다.

이처럼 김 목사는 격렬했던 운동권 시대가 저문 90년대 후반에도 아름다운 삶을 이어갔다. 아내는 “김 목사님을 한번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겠다”라고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에 김 목사의 간암 투병 소식이 날아왔다. 우리가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양산 배내골 오지로 들어가 삶의 마지막 고비를 넘나드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그가 마지막 싸움에서 이기고 일어나길 빌었지만 2002년 8월 그의 부고가 날아왔다. 고작 나이 50에 이승에 몸을 버린 그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김영수 목사를 기리는 추모집 발간 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행사가 열리는 부산민주공원으로 갔다. 목사님 사모님에게 어려울 때 도움 받았던 사람이라고 인사드리니, 어떤 인연인지 물으셨다. 행사 내내 눈물이 났다. 부산진보운동사에 너무도 소중한 분인데, 너무도 일찍 떠나셨다.

다시 1년여 뒤 2014년 3월 21일 오후 부산YMCA 강당에서 6월항쟁의 책임자로 부산의 항쟁을 이끌었던 부산 민주화의 거목 고 최성묵(1930~1992) 목사 평전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최 목사는 70~80년대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을 책임졌던 분이다.

나는 최 목사 출판기념회에서 깜짝 놀랐다. 김영수 목사의 사모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 사모님은 최성묵 목사님의 큰 딸이었다. 아내가 큰 도움을 받았던 김 목사가 최 목사님의 큰사위였던 거다. 그 장인에 그 사위였다.

최성묵 목사는 1974년 4월 부산YMCA 총무를 맡아 기독교 청년 운동을 지도했다. 1970년대 후반 최성묵 목사는 도시산업선교회를 통해 노동자들 생존권 투쟁을 지원했다. 최 목사는 1977년 4월 3일에 부산 중부교회 목사로 취임하면서 부산지역 인권 운동에 본격 뛰어들었다.

조갑제의 책 ‘유고’엔 최 목사가 김광일 변호사와 함께 70~80년대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다고 소개돼 있다.

김광일 변호사와 최성묵 목사는 부산YMCA에서 만났다. 부산YMCA 강당에서 열린 ‘종교와 정치의 분리 문제’ 토론회 때 김 변호사가 사회를, 실무 준비는 부산Y 총무였던 최 목사가 맡았다. 둘은 이 토론회에서 의기투합했다. 1974년 겨울에 유신헌법 반대 개헌청원서명운동이 벌어지고 1975년 봄에 민주회복국민회의 부산지부를 결성할 때 김광일 변호사와 최 목사는 함께했다.

1975년 최성묵, 김광일, 임기윤(감리교 제일교회), 심응섭, 김정광 등 신교 세력과 송기인, 오수영 신부 등 가톨릭 세력이 손잡고 긴급조치 9호 선포로 침묵의 계절이 시작된 그해 정의구현기독자회를 만들었다.

1976년에는 신·구교 연합으로 부산 교회인권선교협의회가 창립됐다. 회장은 임기윤 목사, 부회장은 최성묵 목사와 송기인 신부가 맡았다. 1977년 김광일 변호사는 엠네스티 부산지부를 만들어 지부장이 됐다. 그해 4월엔 부산 도시산업선교회(산선)도 창립됐다.

조갑제는 자신의 책에 부마항쟁이란 대폭발의 ‘불씨를 키운 중부교회’라는 소제목을 달기도 했다. 최 목사가 시무하던 중부교회는 부마항쟁의 마중물이었다.

“부산의 민주화운동에서 불씨를 지켜가고 있었던 곳은 중부교회였다. 이 운동의 지도적 인물로는 최성묵 목사, 김광일·이흥록 변호사, 송기인·오수영 신부가 있었다. 실무 책임자는 조태원, 박상도, 김형기 등이 있었다. 이들과 직접 연결된 대학생과 젊은이, 사회인 등 동조세력은 한 200명 쯤 됐을까. 부산의 민권운동 조직으로는 부산 도시산업선교회, 국제사면위원회 부산지부, 부산 교회인권선교협의회, 부산 기독청년협의회, 정의구현기독자회 등이 있었다. 조직 이름은 달랐지만 구성원은 거의 같은 사람들이었다. 최성묵 목사가 시무하는 중부교회는 ‘부산 저항운동 인력의 공급처’였다. 중부교회는 사회의 민주화운동과 대학의 반체제 학생운동을 연결시키는 고리였다. 이 교회의 청년회원 30여 명은 대부분 부산대 및 동아대 학생들이거나 두 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사회의 저항운동 바람을 학원 안으로 불어넣는 송풍관이 바로 이들이었다. 중부교회 교인들 가운데 1975~1979년 사이에 긴급조치 9호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된 사람은 10여 명이었다.”

“중부교회는 민주화운동의 ‘복덕방’이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지하 유인물과 갖가지 민권운동 관계 정보는 이곳을 매개로 부산에 퍼졌다. 민권 강연회와 사례 발표회, 대학생들의 그룹 스터디도 여기에서 많이 이뤄졌다. 중부교회는 또 탄압 받는 저항운동가들의 피난처 역할도 했다. 교회라는 특성이 정보 및 수사기관에 대해 어느 정도의 방벽이 되어 주었다. 최성묵 목사는 이 불안한 성역의 성주답게 문제가 생겼을 때는 최종 책임을 혼자서 짊어짐으로써 그의 날개 밑에 젊은이들을 감싸고 돌았다.”(이상 조갑제의 ‘유고2’의 일부)


조갑제는 최성묵 목사를 ‘괴짜목사’라고 평가했다. 최 목사는 술과 담배를 사양하지 않았고 걸걸한 목소리에 독설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이론과 정직과 신앙보다 용기와 정열과 정의로 민권운동의 리더가 됐다.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의 발족 당시 핵심 멤버였던 그는 1969년 부산에 옮겨와 부산 미국문화원에서 일했다. 그때만 해도 미국문화원은 대학 서클활동의 중심이었다. 최성묵은 학생 담당으로서 그런 서클운동을 조직화하고 끌어갔다.

1974년에 그는 미국문화원을 그만두고 부산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가 됐다. 그가 운동가로 변신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는 1974년 가을부터 75년 봄까지의 짧은 해빙기에 YMCA를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광장으로 만들었다. 그 뒤 중부교회 중심의 저항세력을 키우는 씨를 뿌렸다.

1976년에 총무를 그만둔 최성묵은 중부교회 전도사로 갔다. 당시 중부교회는 중구 보수동 책방 골목에 자리 잡은 신도 수 60명 남짓한 작은 교회였다. 대학생 수는 5~6명에 불과했다. 최성묵에 이끌린 대학생들이 중부교회로 모여들었다. 최성묵이 씨를 뿌린 부산YMCA에는 고등학생이 400여 명, 대학생은 16개 서클을 만들어 활동했다.

1979년 10.16 부마항쟁 나흘 뒤인 20일 낮 1시께 부산의 핵심 민권운동가들이 중구 대청동의 어느 개인 의원 2층에 모였다. 맨 나중에 최성묵 목사가 들어왔는데 서울 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내려온 간사 손학규를 데리고 왔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우선 부산 시위의 실상을 서울에 알리는 것이 급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보고 들은 걸 모두 손학규 간사에게 얘기해 주었다. 손 간사는 열심히 메모했다. 최 목사는 ‘들어올 때 보니 형사들이 이 주위에 깔려 있더라. 빨리 나가자’고 했다.

김광일은 사무실로 가고 나머지는 중부교회 앞에 있는 대도다방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들(최성묵·박상도·김형기·손학규·김병성·김영일)은 뒤따라온 형사들에게 몽땅 붙들렸다. 붙잡힌 최성묵 목사는 혁혁한 반공투쟁 이력 때문에 경찰이 용공으로 몰기도 어려웠다. 최 목사는 18살에 고향 포항에서 6·25사변을 맞자 청년학도군으로 북한군과 싸웠고, 포로로 잡혀 총살형을 당했으나 시체더미 속에서 용케 살아났다. 부산 미국문화원에서 일한 경력도 그의 사상을 보증하는 역할을 했다.

부마항쟁을 진압하러 내려온 검경 합동수사단은 붙잡은 민주화 인사 가운데 최 목사와 김광일 변호사를 뺀 나머지 사람들을 심하게 두들겨 팼다. 최 목사는 딱딱한 의자에서 5일 동안 한숨도 재우지 않고 끊임없이 자술서를 강요받았지만 굳게 입을 다물었다. 박정희 정권은 부마 항쟁이 일어나자 최 목사를 체포해 부마 항쟁의 배후 주동자로 조작하려 했다.

다행히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붕괴하면서 그 계획은 무산됐다. 1980년 5월 신군부의 5·18 쿠데타가 일어나자 서울로 피했던 최 목사는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겨우 위기를 넘겼다. 이후 중부교회로 복귀한 최 목사는 여전히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1985~1987년까지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부회장과 회장으로 활동했고, 87년 6월 항쟁 때는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국본) 부산본부’의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노무현 상임집행위원장 등과 함께 앞장서 싸웠다.

최 목사는 1992년 총선을 앞두고 3월 22일 자신이 일하던 부산중부교회 근처 거리에서 과로로 쓰러져 숨졌다. 겨우 예순을 넘긴 나이였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는 최 목사의 30주기를 맞아 지난 22일 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한국에는 전광훈류의 목사만 있었던 게 아니다. 한국 진보운동은 기독교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사위와 장인이 10년 간격으로 떠난 부산은 이후 큰 별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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