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이슈②]


차별은 아주 오래된 통치의 기술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부유한 가부장을 위한 가정경영학의 고전인 크세노폰의 〈오이코노미카〉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이름난 부자인 이스코마코스를 만나 재산을 획득하는 기술과 그것을 잘 관리하는 기술, 그리고 주인의 재산을 불리고 관리하며 노동하는 여자(아내)와 노예를 관리하는 기술에 대해 배운 내용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한 사람의 가장(주인)이 다수의 노예를 어떻게 통솔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주인이 정치나 외부 활동 등에 신경 쓰는 사이 하인이 주인의 재산을 빼돌리거나 노예들이 주인에 맞서 반항을 모의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수시로 집을 비우면서도 수많은 집안의 적들로부터 재산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다른 가부장제적 정치제도들, 즉 왕정이나 귀족정, 과두정에서 한 사람 또는 소수가 다수를 통치하며 국가를 관리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경영은 치안과 직결된다.

첫 번째 비결은 충성스러운 관리인이다. 주인의 재산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주인의 눈이 돼 노예를 감시하며, 주인을 대신해 명령하고 일을 시키면서 주인이 원하는 것 이상을 해내며 칭찬에 기뻐하는 주인의 심복이야말로 큰 농장을 관리할 수 있는 비결이다. 주인은 그들이 인정과 칭찬을 갈구하며 서로 경쟁하게 만들고, 관리계급에 특권을 주어 자기보다 아래의 노예와 자신을 구분하고 다른 종족처럼 여기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 관리인에게 노동자를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는데 그 핵심이 차별의 기술이다. 주인은 관리 노예에게 가르치기를 일꾼에게 옷과 신발을 지급할 때 똑같은 것을 주지 말고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더 나쁜 것으로 차등해 지급하라고 한다. ‘뛰어난 자에겐 더 나은 보상을, 열등한 자에겐 더 보잘것없는 보상을’ 주기 위해서다. 경쟁시키기와 차별하기는 주인이 관리자를 통치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주인을 대리한 집행자가 되는 순간 관리자는 그것이 자신을 복종시키는 기술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주인보다 더 주인처럼 재산을 아끼고 노예를 다룬다.

이런 가내 통치의 기술은 고대 문헌들에서 종종 발견되는데, 특히 아테네의 토지와는 그 규모에서 차원이 다른 로마의 대토지 라티푼디움의 부자 귀족들이 남긴 농장경영론은 노예를 다스리는 법을 훨씬 더 정교하고 잔인하게 가르친다. 로마의 노예주들은 노예의 생산과 재생산에 드는 돌봄의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결혼과 가족 구성을 금지한다. 노예가 노예를 낳아 기르는 것보다 ‘완성품’을 새로 구입하는 편이 훨씬 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은 관리직이나 감독직 또는 자신에게 특별한 노예에겐 특별한 권리를 허용한다. 노예의 사랑과 임신, 출산은 특권이 된다. 모두를 똑같이 대하는 것은 주인에겐 위험한 일이다. 평등한 자들은 쉽게 단결하기 때문이다. 노예로 하여금 노예를 다스리게 하는 것은 노예가 주인이 아니라 서로를 적대하도록 만드는 효과적인 분리 통치의 기술이다.

‘너는 저들과 다르다’라는 주인의 메시지는 우월한 자로 호명되는 자에겐 근거 없는 자만심과 저들과 같아질까 낙오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심어주며 자발적 복종과 충성심을 끌어내고, 못난 자로 호명된 이들에겐 열등감과 함께 부당한 지배를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힘을 발휘한다. 아버지가 아들들을 경쟁시키고 시험하거나, 남편이 아내를 평가해 칭찬과 모욕으로 길들이는 법도 모두 한뿌리에서 나온 주인(가장)의 통치술이다. 이런 통치술은 근대의 가장문학 계보로까지 이어지고 현대 경영학의 뿌리가 된다. 가정 경영은 결국 재물 관리와 인간(자원)의 관리인데, 노예의 통치술이 인적 관리의 핵심 기술이라면 재물 관리에서 핵심은 자리 배치와 셈하기다. 집안을 잘 정리 정돈 해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몇 개인지 정확하게 셀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재산이 자신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시시콜콜 좀스러워 보이는 충고지만 이 공간화와 수량화는 생산관리, 재고관리, 회계와 통계 등을 통해 체계화됐고 근대 기업과 국가 경영에서 핵심 기술이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의 글로벌 경영에서 나타나는 직무의 수직적 분화 및 중간계급을 통한 관리 기술은 고대 가장들이 전수해준 기술과 똑 닮았다. 업무 평가를 통한 차등 보상과 상벌 제도는 ‘다른 옷과 다른 음식을 지급하라’라는 노예의 통치술을 능력주의의 외피를 입혀 적용한 것이다. 똑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색깔이 다른 출입 카드를 목에 걸게 하거나, 다른 유니폼을 지급하는 것은 고대의 노예주들이 사용한 방식과 완전히 똑같다. 오늘날의 경영 관리자들도, 노예가 더 좋은 옷을 받은 노예를 부러워하듯이 노동자가 차별에 저항하는 대신 출입 카드의 목줄 색깔을 바꾸려고 노력하게 만든다.

과거의 폭력들은 자본주의 체제와 근대적 법과 제도를 통해 보다 ‘합리적이고 문명화된 형식’으로 전환된다. 차별은 문명화된 폭력 기술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문명사회의 시민에게 직접적 폭력은 적어도 그들의 동선과 시야로부터는 점진적으로 제거된다. 하지만 그들에게 제공된 안전성은 구조적 폭력이 은폐되고, 직접적 폭력이 공간적으로 분리되며, 위험한 인자들이 보이지 않는 시설이나 수용소로 격리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배제와 분리야말로 차별을 재생산하는 조건이다. 배제와 분리를 통한 차별의 통치술은 공적 영역에서 보다 제도적으로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차별은 학교에서, 일터에서, 미디어와 각종 사회생활을 통해 체계적으로 개인에게 습득되고 내면화된다. 우열을 가르는 기준이 과거의 신분과 혈통에서 인종, 민족으로, 다시 재산과 능력으로, 더욱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고 있을 뿐이다. “인종주의는 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행 중”1)이라고 했던 발리바르의 말은 지금은 좀 더 적나라한 표현으로 고쳐야 할 것이다. 인종주의는 세계화, 신식민주의, 신자유주의와 함께 더 교묘한 형태로, 더 퇴행적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우파 민족주의, 우파 포퓰리즘은 파시즘의 인종주의 선동 이후 새로운 인종차별을 창조하는 데 앞장 서왔다. 홀로코스트 이후 ‘인종’이란 말이 서구 사회에서 금기시되자 생물학으로서의 인종학은 인류학과 문화연구의 범주로 재탄생했고, 인종주의 담론은 민족성이나 국민성 담론으로 옮겨갔다. 대처는 “영국 국민이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 집어삼켜질까 봐”2)걱정했고, 부시는 석유의 성전을 수행하며 유대인을 무슬림으로 대체했으며, 트럼프는 미국 노동계급의 적이 멕시코와 인도, 중국의 노동자들이라고 선동했다. 이런 “인종차별은 백인 노동자에게 유력한 집단에 속해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그리고 위기의 시기에 바로 공격할 수 있는 속죄양(차별받는 집단)도 제공한다.” 인종차별은 백인 노동자에게 ‘백인’이라는 특정한 정체성을 부여하는데 “그 정체성은 백인 노동자와 백인 자본가를 하나로 결속”한다.3) 지역주의나 성차별주의 등 다른 종류의 차별에서도 이와 유사한 메커니즘을 발견할 수 있다. 남성 노동자들은 남성 자본가, 남성 권력자와 하나로 결속해 여성을 공격한다. 자유주의 우파, 리버럴 포퓰리즘의 인종주의 문법은 ‘능력주의’와 같은, 보다 교활한 언술로 나타난다. 차별을 공정으로 보이도록 둔갑시키는 능력주의는 신자유주의가 주조한 새로운 인종주의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빈자에 대한 차별, 학벌과 학력에 따른 차별은 능력자와 무능력자를 구분 짓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무능한 자를 낙인찍는다.


근대의 새로운 지배계급은 고대 노예제 시대의 유산을 그 규모와 강도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가공할 폭력성으로 변형시켜 계승했다. 그리하여 지금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는 여전히 인종과 계급, 그리고 노예제도의 과거 유산에 귀착된 채로 살아간다.” 대서양의 노예무역은 “떠다니는 지하 감옥”, “이동식 수용시설”로 불리던 ‘노예선’을 창조했다. 현대 감옥이 나타나지 않았던 시대부터 존재한 이 항해용 감옥은 문명화된 근대 국가의 감옥, 수용소, 격리시설의 원형이다. 그러나 노예선에서도 포로는 많고 선장은 한 명이다. 노예선의 선주들도 노예가 노예를 다스리도록 하는 고대 노예주들의 가르침을 참고한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폭력성과 함께 정교한 차별과 배제의 규칙들은 위험한 항해로부터 투자자들의 재산을 지키는 데 필수적이다. 고대의 노예 관리인들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특권을 얻은 선상의 백인 노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배를 탈 수밖에 없는 하층 노동자계급임에도 자신의 열악한 노동조건이나 처우가 노예보다는 낫다는 데 안도한다. 백인 선원들 역시 노예의 손에 채찍을 들려 다른 노예를 다스리도록 하는 법을 배운다. 채찍을 맞는 노예는 때리는 노예를 증오하고, 때리는 노예는 백인 선원을 두려워하며, 선원은 선장에게 찍혀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노예선의 선주와 투자자들은 배에 승선하지 않고, 멀리 본국에서 노예무역에서 돌아올 수익을 기다리고 있지만, 선상의 노동자들은 갈기갈기 찢긴다. 마커스 래디커가 잘 추적해 전하고 있듯이, 아무리 분리와 차별, 배제와 혐오의 통치술로 선상의 잠재적 반란자들을 다스린다고 해도 노예선의 항해는 순조로울 수 없었다. 이 공포의 배를 띄운 자들이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 백인 노동자들은 고향의 백인들이 아니라 아프리카인들과 친구가 되고 단결한다.4)

인종주의, 민족주의, 지역주의, 성차별, 종차별 등 모든 차별주의의 공통 문법은 위계를 설정하고 우열을 가른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지배자-피지배자, 억압자-피억압자 같은 단순 구도를 해체해 위계를 더욱 촘촘하게 만들었는데, 그로 인해 누가 지배자이고 누가 피지배자인지, 누가 억압자이고 누가 피억압자인지 알 수 없게 경계가 모호해졌다. 흐릿했던 정체성들은 점점 선명해지고, 선명하던 계급성은 점점 흐릿해진다. 이 흐릿한 지배관계는 나에게 직접 피해를 입히거나 불쾌를 일으키는 ‘눈앞의 가해자’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대신 눈에 보이는 만만한 적, 내가 화를 내도 위험하지 않은 약자들이 표적이 된다. 그렇게 해서 자본주의 기계를 돌리는 이동 장치에 실려 날마다 촌각을 다투며 시간과의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 누가 자신의 시간을 빼앗았는지 묻는 대신, 지하철의 연착과 출발 지연에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다. 분노의 방향을 조절하는 것도 관리자의 통치술이다. 국민의힘 당 대표 이준석이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사용한 프레이밍 기술이 바로 그런 것이다.

노예선에서도, 지하철에서도, 통치자들을 두렵게 하는 건 자신의 보호와 지배를 받아야 할 ‘열등한 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평등의 요구는 특권을 더 이상 특권이 아니게 만든다.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설계된 공간들, 보행자가 아닌 운전자 중심의 도로, 성인 남성을 표준 척도로 하는 도구와 설비들을 특권이 아니라 보편이라고 생각하는 건 사회 권력이 그런 표준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여성의 권리 투쟁은 지금까지 사회가 설정한 ‘표준’과 ‘정상’이 실은 배제와 차별이라는 것을 폭로하고 입증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야 할 이들이 할당된 공간을 벗어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순간, 그들은 권리와 안전을 박탈당한다. 집안을 나온 여자들, 학교를 나온 청소년들, 시설을 나온 장애인들은, 게토를 벗어난 흑인, 가자 지구를 벗어난 팔레스타인 주민, 보호구역을 벗어난 인디언, 마당을 나온 암탉, 동물원을 나온 코끼리, 숲을 나온 멧돼지들과 똑같은 소리를 듣는다. 안전한 곳에 있어라, 그곳을 벗어나면 위험하다. 하지만 이 말은 사회로부터 그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사회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존재가 보이는 것 자체가,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는 문명사회의 비밀을 폭로하는 위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의 미투운동,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 해고노동자들의 복직 투쟁, 그리고 팬데믹으로 존재를 알린 바이러스까지, 자신을 가시화함으로써 사회를 가시화하는 존재는 나막신을 던져 21세기의 살인 기계를 멈춰 세우는 존재다. 러다이트 운동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사람을 죽이는 기계를 멈춰 세울 때, 자본가들은 나막신을 던져 기계를 고장 내는 노동자들을 문명을 파괴하는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지금 MBA 출신도 과거의 노예주, 공장주들과 다를 바 없는 문법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개인의 일탈 행위가 아니라, 사회권력 구조가 집권당의 당 대표가 그런 말을 해도 될 정도로 구성돼 있다는 의미다.

차별주의는 개인들의 편견이나 태도, 뒤틀린 심성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잔재나 시대착오적인 현상으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파괴된 인간성이 차별주의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별주의가 인간성을 체계적으로 파괴한다. 차별이 행하는 느린 폭력을 오랜 시간 가해자, 피해자, 관찰자로서 동참하거나 방조하면서 차별을 인간 본성이나 어쩔 수 없는 사회악처럼 받아들이는 괴물이 돼가는 것이다. 차별은 지배자들이 분리와 분열을 위해 사용하는 통치의 기술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인종차별주의, 보수적인 민족주의, 여성 혐오와 노동계급에 대한 적대는 경제적 박탈감과 상실감을 자극하는 우파 포퓰리즘 정치와 결합하며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돼왔다. 지금 차별금지법은 차별당하는 집단이나 당사자의 문제 혹은 정체성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안전한 삶과 평등한 관계를 위한 제도적 장치다. 차별금지법은 소수를 위한 보호나 특례법이 아니라, 99%에 대한 1%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차별을 해체하기 위한 디딤돌이며,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향한 정치적 요구다.


[각주]

1) 에티엔 발리바르, 이매뉴얼 월러스틴, 인종, 국민, 계급 –모호한 정체성들, 두 번째 테제, 2022, 30쪽.
2) 알렉스 캘리니코스, 인종차별과 자본주의, 차승철 옮김, 책갈피, 2022, 62쪽.
3) 알렉스 캘리니코스, 위의 책, 74-75쪽.
4) 마커스 래디커, 노예선, 박지순 옮김, 갈무리, 201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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