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이 불러온 정치적 역습

[요즘 경제]


급변하는 정세

지난 대선 기간 뜨거웠던 자영업자 100조 손실 보상 논의는 어느덧 아득한 이야기가 돼가고 있다. 현재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재정 준칙에 경도된 신권력의 태도는 손실보상 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 규모도 대폭 축소될 전망이다. 여기엔 최근 이슈로 떠오른 글로벌 인플레이션 문제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앞둔 지금,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두고 정책적 분기점에 놓여 있다. 윤석열 정부는 고용회복보다는 물가관리에 기운 태도를 보이면서 재정건전성을 강조하고 있다. 대선공약에 필요한 재정투자를 스스로 접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들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확장적 재정정책과 국가부채 관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갈등 국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부채관리’, ‘물가관리’라는 안정화 기조의 명분은 누구나 동의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정책의 효과는 상이하게 나타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방향의 정책 대응인지에 따라 집단적 갈등은 복잡하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 위기를 누구에게 전가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충돌이 예상된다.

이것은 정치적 문제다. 미국 의회에서는 재정지출을 둘러싼 대립이 심각한데, 지난해 초부터 시작된 물가상승 국면이 정치적 공방을 더욱 가열시켰다. 결국 지난해 가을, 바이든 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3조 달러 규모의 ‘사회복지 교육 지출 예산’이 의회에서 부결됐다. 그리고 물가상승으로 인한 지지율 하락과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안보 문제 등이 이슈로 떠올랐다. 결국 올해 11월 중간 선거를 의식한 바이든 정부는 논란이 됐던 ‘사회복지 교육 예산’은 뺀 채, 국가안보(8,130억 달러), 핵전력 강화(1,301억 달러), 나토 지원 등과 관련한 국방예산을 8.1%나 늘렸다. 이는 역대 최대의 안보 관련 연구개발비용이며, 전체 예산 5조 8,000억 달러의 6분의 1에 육박한다. 인플레이션 논쟁이 가져온 정치적 역습이다. 우파적 헤게모니하의 신관리주의적 지배체제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지정학적 위기에 따른 인플레이션 급등

또한 미국의 인플레이션 논쟁은 금융위기 이후 10여 년간 지속해 온 완화적 통화정책에도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올해 말로 예상됐던 금리인상 시기가 10개월 정도 빨라졌다. 금리인상과 더불어 양적 긴축까지 시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변화에 영향을 미친 물가상승의 이유를 좀 더 짚어볼 필요가 있다. 물가상승의 원인은 대체로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 번째, 코로나 방역 해제와 더불어 억눌렸던 수요 증가와 공급 지연의 충돌이다. 미국의 경우 지난 하반기부터 코로나 대유행의 정점을 지난 후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수요가 급증했으나 노동 공급은 크게 늘지 않았다. 코로나 여파로 인한 지연효과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실업률이 3.6% 수준으로 사상 최저치라고 하지만, 고용률 지표는 코로나 위기 이전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실업이 개선됐다는 점보다는 경제활동 참가가 저조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이유로 미국 중앙은행도 전통적 방식인 금리인상으로 물가상승에 바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미국 연준 의장은 고용회복이 충분히 이뤄진 다음에 금리인상을 하겠다는 의견을 여러 번 피력했다. 하지만 물가 급등세가 꺾이지 않고 심각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결국 예상보다 빠른 금리인상을 결정했다. 고용회복과 물가 관리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글로벌 공급사슬의 충격이다. 중국발 생산 중단 연쇄효과와 생산자물가 상승이 지목되는데, 글로벌 생산기지를 담당하고 있는 중국은 현재 제로코로나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오미크론이 대세종이 되면서 확진자 수 관리를 예전처럼 할 수 없다 보니 대규모 경제 도시들에서 강력한 봉쇄 조치가 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런 봉쇄는 당연히 생산과 소비 둘 다 멈추게 만든다. 중국의 내수 경제뿐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물건을 공급받는 세계 각국도 이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됐다. 글로벌 공급망 사슬 구조는 평상시 매우 효율적인 경제 분업을 낳았지만, 코로나 봉쇄 상황에선 오히려 국지적 경제봉쇄가 글로벌 연쇄 충격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벌어진 충격은 심각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 세계에 공급해 온 원자재(원유, 천연가스, 옥수수, 밀 등) 물량이 갑자기 축소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경기변동의 순환과정에서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수년 전부터 시작된 미·중 갈등은 이제 전략적 수준의 지정학적 대결 구도로 확장 심화하면서 군사안보문제가 경제문제를 압도하고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사태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미국(나토)의 근원적인 군사 갈등 구도가 기저에 깔려 있다. 이렇게 글로벌 자유무역 시대가 쇠퇴하면서 정치 군사적인 대립의 경계선을 따라 지역적 블록화가 심화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이유 때문에 단순히 인플레이션에 대한 전통적 대응 방식인 금리인상이 답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인이 다르기 때문에, 교과서적인 금리정책 대응이 제대로 먹힐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오히려 섣부른 금리인상이 코로나 사태 이후 고용회복세에 찬물을 붓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상당하다. 그러나 일단 미국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급등세를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라도 완화적 통화정책에서 선회해 긴축적인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이에 맞춰 전 세계 다른 국가에서도 완화적 통화정책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신관리주의적 지배계급의 위기 대응이 새로운 분기점을 맞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정부가 마주한 위기 대응의 복잡성

현재 장관 후보자들에 대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올드 보이들의 귀환’이라는 혹평이 만연하다. 규제 완화, 재정 건전화(페이고정책) 등 박근혜 정부 시절 익숙했던 경제 담론이 무늬만 바꾼 채 다시 등장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요직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부총리(홍남기),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호승), 국무조정실장(구윤철) 모두 기획재정부(기재부) 출신 관료가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이전 정부(이명박·박근혜)에서 기획재정부의 핵심 요직(경제정책·예산·정책조정 부서)을 거친 관료다. 다시 강력한 재정 건전화 정책을 준비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국무총리(한덕수), 경제부총리(추경호) 등도 모두 기재부 경제관료 출신이다.

이런 내부 상황과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불러온 정세 변화로 볼 때, 윤석열 정부는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주창하고 있는 재정 준칙 도입을 시대적 과제로 이슈화할 것이라 예상된다. 십 년 전 박근혜 정부가 국가 개조를 이야기하면서 공공 부문에 강한 구조조정 주문했던 상황과 유사하다. 검찰개혁 문제에 매달리는 민주당과 차별화하면서 경제 아젠다를 선점하고 공약 후퇴 논란을 재정 건전화로 대체하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구심점을 상실한 민주당 역시 물가안정 요구에 편승하면서 확장적 재정정책을 말로만 언급할 뿐, 실질적인 행동은 주저하거나 방치할 것으로 보인다. 재정 확대가 윤석열 정부의 정치적 공으로 돌아가는 것이 반가울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정세는 매우 복잡하다. 앞선 언급처럼 수요가 견인하는 인플레이션이 아닌 전염병과 군사 안보 갈등으로 인한 공급망 충격 속에서 벌어지는 인플레이션이다. 그래서 전통적 방식의 긴축적 대응은 오히려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인플레이션 현상에만 주목해 기계적인 긴축적 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 청문회에서 내정자가 “인기 없는 정책이라도 해야 할 일은 하겠다”라고 발언한 것은 한편으론 올곧은 소신처럼 보이지만, 자칫 금리인상이 한계채무자의 목줄을 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통화량을 직접 조절하는 시장 개입, 대출 규제의 세분화, 국가 재정을 동원한 직접적인 구제책 등이 더욱 치밀하게 작동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로 발생한 경제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재정적 역할은 더욱 커졌다. 가령 자영업 소상공인들의 130조 원 규모의 대출을 그대로 둔 채 상환연장으로 이들의 삶의 위기를 지속시킬 수만은 없다. 결국 국가부채로의 이전과정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파적 신관리주의에 맞선 민중을 위한 재정정책

앞으로 이슈가 될 기재부발 재정 준칙을 다시 짚어보자. 재정정책의 기본은 재량이다. 재량은 정책의 경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자원과 소득은 재분배된다. 견고성이 매우 강한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시대에 따라 바뀐다. 하물며 복잡한 경제 활동에서 벌어지는 현상에서 언제나 지켜져야 할 불변의 원칙 같은 건 없다. 정책의 기본은 재량이고, 이것을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준칙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량과 준칙 사이 심연의 골은 없다. 정세에 따라 무엇이 강조될지가 다를 뿐이다. 결국 정치의 영역에서 다뤄져야 하고, 이 과정은 계급투쟁의 연장선이다. 지금 전선은 단일하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앞서 언급한 미국의 국가 예산을 둘러싼 갈등을 보자. 결국 우파적 헤게모니하의 신관리주의의 면모가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미국 민주당 내 샌더스를 비롯한 좌파 진보 그룹의 목소리는 인플레이션의 정치적 역습으로 사그라지고 있다.

이런 위기 대응의 복잡성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갈등은 앞으로 우리에게도 벌어질 일이다. 재정투자가 필요한 굵직한 대선공약들이 다른 이슈에 파묻혀 전혀 회자하지 못한다. 당선인의 입에서 나오는 경제 담론은 규제 완화와 물가안정밖에 없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민생에 필요한 대선공약들은 후퇴되거나 기약 없이 연기될 것이다. 이미 장애인 단체와 인수위는 ‘장애인 권리 예산’을 두고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 사회적 갈등에서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모두 지방선거와 검찰개혁 이슈에만 몰입해 있다. 이런 와중에 정세와 맞지 않는 ‘포퓰리즘’ 논쟁까지 제기하는 이들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위기 대응의 복잡성과 인플레이션의 정치적 역습이 드러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민중에 의한 그리고 민중을 위한 재정정책의 사회적 논의를 심화시키고 연대를 넓혀나갈 시점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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