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정 넘어 정의를 향해

[질문들]


“법대로 해!” 현실에서, 드라마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정당한데 상대가 인정하지 않으니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의미다. 법은 공정하고 그만큼 권위가 있으니 확실히 가름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그래서 법의 결정은 정의를 실현해줄까? 아니, 법의 결정이 바로 정의를 실현하지는 않아도 정의를 실현할 발판은 될 수 있을까? 법의 명령으로 단죄를 내릴 때 사람들은 정의가 살아있음에 안도한다. 처벌은 무엇이 범죄인지 알려줘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처벌만으로 사회를 바꾸지 못한다. 대표적으로 성범죄가 그러하다. 성범죄의 원인이 뿌리 깊은 가부장적 사회가 만들어 낸 여성혐오라 진단하며, 교육과 인식의 변화가 동반돼야 함을 강조한다. 때때로 법은 정의에 대한 기대를 배반하고 다른 곳으로 미끄러져 버린다. 법 자체가 충분하지 못하거나 악법일 때, 또는 판사의 편향이 만든 결과다. 특히 권력과 관련된 사건에서 종종 배반의 현실을 목격한다. 하지만 판결이 종결된다고 정의마저 종결될 수는 없다. 법과 정의의 간격이 벌어질 때, 우리는 정의를 향한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다.

법이 처벌하지 못한 범죄들

지난 8월 19일 ‘세월호 참사 대통령 보고’에 대해 최초시간 및 횟수를 조작·행사한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대법원이 무죄 취지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은 이날 김 전 실장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또한 김장수,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의 ‘국가위기관리 기본 지침’을 무단으로 변경한 혐의에 무죄를 확정했다. 대법원의 결정이 ‘법대로’ 판결한 것인지는 법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정의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김기춘 사건은 법적으로는 ‘허위공문서 작성죄’다. 그런데 나의 관점으로는 ‘국민의 생명·안전 의무를 방기한 죄’와 이 의무를 부정하기 위해 사실을 은폐해 ‘진상규명을 방해한 죄’다.

2014년 4월 16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오후 5시 21분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면서 “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물었다. 이 질문으로 대통령이 세월호 침몰 상황을 파악하지 않았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침몰 과정을 목격하면서 무사 구조를 간절히 바라던 그때, 대통령과 책임 있는 자리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세월호의 침몰만큼이나 국민에게는 충격이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국가가 사라진 것이 바로 이들로부터였다는 것이 드러나자 박근혜 정부에 대한 여론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은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재난 관련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대응했다.

대통령이 관저에 머물면서 국민 안전 위기에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비서실장과 안보실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비서실은 제1부속비서관 정호성에게 상황보고서를 이메일로 반복해서 보내기만 했다. 이메일은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고, 비서실장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국가 위기관리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총체적 무능과 무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김기춘은 국정조사위원회, 국정감사에 대통령에게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한 것처럼 답변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이를 위해 비서실은 5월부터 철저히 준비했다.

원심은 “비서실 보고서가 실시간으로 전달됐는지 확인되지도 않고, 전달이 됐다고 해도 대통령이 상황 인식을 제대로 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고 보인다. 비서실장으로서 보고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은 채 ‘20~30분 간격으로 보고했다’는 취지로 답변한 것은 허위로 보인다”라며 유죄로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30분 단위 보고’가 허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대통령비서실·청와대 국가안보실에서 부속비서관이나 관저에 발송한 보고 횟수, 시간, 방식 등을 종합하면 허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대통령이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답변 내용은 김 전 실장의 주관적 의견을 표명한 것에 불과하므로 사실인지 여부를 따질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봤다.


세월호 참사 당시 오전 10시 15분께 박 전 대통령과 첫 통화를 했다는 내용의 답변서를 낸 김장수에게도 허위공문서작성 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오전 10시경 대통령과 직접 통화했다는 시간도, 오전 10시 15분경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는 김장수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공모관계와 허위로 볼 증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짓말은 무죄가 됐다. 김관진은 청와대가 재난 상황의 컨트롤타워가 아님을 주장한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위기관리 기본 지침’에서 ‘안보실이 재난 상황을 관장한다’는 문구를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단으로 삭제한 혐의(공용서류손상 등)를 받았다. 이 역시 법원은 공용서류손상행위임을 인식했다거나 공범자들과의 공모관계에 관한 증명이 부족하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이들은 국가적 재난에 대통령이 제때 상황을 파악하지 않았고, 제대로 지시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숨기려고 했다. 그리고 세월호참사의 진상을 은폐하는 행위로 나아갔다. 정보기관을 동원해 피해자를 사찰하고, 국가의 책임을 묻는 시민들을 탄압했다. 보수단체를 동원해 여론을 관리하고 특조위 활동을 방해했으며, 위기관리센터의 세월호 기록물을 파기했다. 참사 당일 대통령과 측근들의 책임 방기에 대한 은폐는 진상규명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연속적인 행위의 출발점이었다. 이런 행위에 대해 ‘허위공문서 작성’이라는 범죄로만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법이 이들에게 물을 수 있는 죄목이 겨우 ‘허위공문서 작성’이라는 것밖에 없다면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물을 수 있을까? 그나마 무죄로 결론이 나자 〈조선일보〉는 바로 “‘세월호 7시간’ 의혹을 제기해 사회적 낭비와 혼란을 초래한 문 정권과 괴담 유포자들은 사과”하라는 사설(1)을 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해, 아니 하지 않아서 사회적 고통을 지속하게 했던 이들이 사과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버젓이 나온다. 국민의 안전이 위험에 처했을 때 대통령은 사라졌고, 그 책임을 묻는 법정에서는 정의가 사라졌다.

시민이, 사회가 규정하는 범죄

생명의 위기와 공동체의 고통에 무능하고 무책임했던 권력은 자신의 무능과 무책임을 감추는 데는 전력을 다했다. 위기 상황 대응을 위해 박근혜 정부가 만든 국가안보실은 국민의 위기에는 아무 기능을 못했지만, 정권의 위기에는 힘껏 대응했다. 이들의 행위는 조직적이고 목적 의식적이었다. 이런 행위를 각각 개별적으로 분리해 위법인지 아닌지 판단해서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법률이, 법정이 만드는 공백을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한다. 행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각각의 행위와 사실을 연결하고 해석해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한다. 개인의 범죄를 처벌하는 법원의 방식을 넘어, 또는 법의 판결이 불가능하더라도 맥락을 해석하고 규정하는 사회적 또는 공동체적 판결이 돼야 한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는 지난 6월 9일 조사종료를 앞두고 3년 6개월간 진행한 조사 결과와 권고안을 발표했다. 당시 침몰 원인에 대한 모호한 결과만 집중 조명되는 탓에 다른 조사 성과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사참위가 명확하고 분명한 결론들은 내놓았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사참위의 종료가 진상규명의 종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사 결과는 우리에게 과제를 주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개별적 사건을 넘어 사회적으로 확장된 해석으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그럴 때 아직 밝혀지지 못한 진실을 찾기 위한 과정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참위는 9월 10일까지 종합보고서를 작성해 국회와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한다. 이 보고서가 법정을 넘어서는 정의의 발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조선일보, “‘세월호 7시간’ 무죄 확정, 의혹 제기한 文 정권은 사과해야”, 202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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