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것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싶어요”

[르포] 민주노조 파괴에 맞선 6년간의 투쟁,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들 이야기

민주노총은 안 된다는 병원 측의 한마디에

10월 20일 점심,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병원장 하종원) 본관 로비. 회색 유니폼을 입은 세브란스병원 청소노동자 변순애 씨와 김명희 씨가 로비 입구에 피켓을 세우고 있다.

“청소노동자 지옥! 떡 먹었다고 경위서?”

“민주노조 조합원에게만 경위서 3번 쌓였다고 해고종용?”

“병원이 지시한 노조파괴 일지 ‘민노 집회에 태가비엠의 대응전략 보고해주세요’”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앞 세브란스분회 천막 농성장
[출처: 연정]

2016년 6월, 세브란스병원 본관에서 일하는 (주)태가비엠 용역업체 소속 청소노동자 200여 명 중 130여 명이 민주노총(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당시 서울경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세브란스병원분회)에 가입했다. 만성적인 인력부족으로 휴무는 격주 당 1일이고, 회사 관리자와 한국노총 노동조합 간부 갑질까지 견디며 일하던 때였다. 민주노총 가입이 시작되자 세브란스병원과 태가비엠은 노조탈퇴 종용과 불이익 협박, 사측 편 노조 지원, 세브란스분회 출범식 방해, 일상적인 직장 내 괴롭힘, 3개월 단위 계약, 해고 협박, 부당업무전환배치 등 노골적인 노조파괴를 본격화했다. 용역업체 소장이 조합원과 면담 중 노조 탈퇴를 강요하며 ‘세브란스병원이 민주노총은 안 된다고 했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혹독한 탄압으로 청소노동자 다수가 민주노총을 탈퇴했고, 1년 뒤 남은 조합원은 40명이었다. 사측은 소수노조라는 이유로 교섭권을 박탈했다.

2016년 10월, 노동조합은 부당노동행위를 지시한 업무일지와 노조탈퇴를 종용하는 녹취록 등의 증거를 확보해 노동부에 고소장을 접수했지만, 노동부 서부지청과 검찰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항고마저 기각되자, 노동조합은 2017년 9월에 피고소인과 고소 사건을 추가해 다시 고소했다. 검찰은 4년이 지난 2021년 3월에서야 세브란스병원 당시 사무국장과 사무팀장·파트장, (주)태가비엠 경영진·현장소장·반장 등 9명을 노동조합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같은 해 4월에 열린 첫 공판에서 피고인들은 부당노동행위 공모 혐의를 인정했다. 지난해엔 세브란스병원이 민주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2016년부터 2017년 3월까지(병원장 윤도흠·이병석) 최소 15개 이상의 노조파괴 문건을 만들고 수차례 대책회의를 했다는 문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 중에는 세브란스병원 사무팀에서 병원장 보고용으로 작성한 문건(‘세브란스병원 청소용역(태가비엠) 민주노총 가입사태 및 향후대책’)과 세브란스병원과 태가비엠이 만든 ‘민노(민주노총) 탈퇴 3단계 단기 전략’ 문건도 있다.

하지만 세브란스병원 측은 노조파괴와 관련한 조치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지부 활동가와 조합원들을 업무방해·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하고, 가처분 소송을 하는 등 노조탄압에만 열을 올렸다. 세브란스병원은 4년간 8억 원이 넘는 임금체불과 입찰비리 문제 등 끊임없이 문제를 야기하는 태가비엠과 두 차례나 재계약하며 7년 동안 청소 업무를 맡겨왔다.

서울서부지법에서 사측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노동조합은 지난해 11월 11일부터 노조파괴 문제 해결(진상규명과 사과, 태가비엠 퇴출, 교섭권 보장 등)을 촉구하며 병원 앞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매일 농성장과 본관 로비에서 선전전도 진행한다. 이제 20일 후면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1년이 된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이제 5명 남은 조합원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 조합원 모두 세브란스분회가 만들어진 이후에 입사한 노동자들이다.

나이 오십에 떡 먹었다고 쓴 시말서

“태가비엠이 저희 용역인데, 엄청나게 못되게 굴었어요. 떡 먹다가 시말서 쓴 게 저예요. 떡을 먹은 것도 아니에요. 먹었으면 그날 체했을 거야.”

변순애 씨(세브란스병원분회 분회장)는 2017년 6월에 입사했다. 순애 씨가 아직 신입이던 어느 날 새벽 6시였다. 한 노동자가 떡을 먹고 일을 시작하자고 했다. 순애 씨와 동료 노동자들이 떡을 막 집어 드는 순간, 이들이 소속된 용역업체 태가비엠 관리자들이 왔다. 관리자들에게도 떡을 먹으라고 권했는데 그들은 그냥 돌아갔다. 그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용역업체 사무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용역업체 관리자는 순애 씨와 순애 씨의 동료 노동자들에게 근무 시간에 떡을 먹었다며 시말서를 쓰게 했다.

“‘시말서가 뭐예요?’ 그랬어요. 살림하다 왔으니까, 집에서 시말서 쓸 일은 없잖아요. 그랬더니 부르는 대로 적으래요. ‘한글은 아시지 않습니까?’ 해요. 무시하는 말인데, 여기가 워낙에 그런 일이 다반사여서 그때는 그게 이상한 건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썼어요. 억울함도 억울함인데, 너무 창피하고 수치스럽더라고요. 나이 오십에 떡 먹었다고 시말서를 쓰게 하다니.”

나중에서야 민주노총 소속이던 동료를 타겟으로 한 것이었음을 알게 됐다.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용역회사는 그 내용을 빼달라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그때는 뭘 먹어도 숨어서 먹어야 되고, 앉아 있다가 감독이나 반장 발소리 들으면 일어나야 되는 게 생활이었어요. 커피 먹다 (관리자가 나타나면) 개수대에 쏟아버리고 그랬어요. 다리가 아파 앉아있으면 소장이 와서 ‘다리가 아파서 앉아 계세요? 그럼 조퇴하세요’ 했다니까요. 원래는 1시간에 10분 쉬게 돼 있는데, 병원 청소 일이 그렇게 딱딱 끊어가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2시간을 계속해야만 할 때도 있거든요.” (변순애 분회장)

  10월 20일 오후, 세브란스병원 병원장실 앞 약식집회에 참석한 조합원들
[출처: 연정]

“제가 그다음 해에 아파서 수술을 하게 됐어요. 그때 한 언니가 ‘너한테 민노(민주노총) 들라고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너 아프다는 이유로 해코지를 할 것 같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언니, 가입서 줘요’ 했어요. 갈등 안 했어요.”

순애 씨는 그렇게 민주노총 조합원이 됐다. 회사에서 병가를 주지 않아 모아놓은 연차 15일 치를 쓰며 암수술을 했다. 그리고 다시 출근한 순애 씨를 관리자는 ‘유동(메인 근무자가 휴무인 자리를 메꾸는 일명 땜빵)’으로 배치했다.

“내쫓으려면 미리 통보는 해줘야 내 짐도 챙기고 할 거 아니에요. 근데 그날 아침에 오니 내 자리가 없는 거예요. 유동은 보통 3~4개월 정도 하는데, 전 2년 가까이 했어요. 최소한 그 전날에는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것도 안 말해줘요. 어떤 때는 유니폼 입고 사무실 문 열릴 때까지 앉아있었던 적도 있어요. 하루에 몇 군데를 돌리기도 하고. 그래도 끝까지 버티겠다고 생각했어요.”

청소하면서 같이 울어요

순애 씨는 18개월 만에 중환자실로 왔다. 중환자실 청소 업무는 24시간 2인 1조 3교대로 돌아간다. 새벽 6시에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복도 화장실 청소다. 화장실 청소를 마치면 중환자실 안에 들어가 바닥 먼지 청소를 하고, 대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그사이 다른 한 사람은 소독제를 묻힌 손걸레로 침상과 환자 주변을 닦는다.

"병상 14개를 다 돌고, 쓰레기를 빼서 74박스(74리터 박스)에 봉해서 버리면 아침 식사 시간이 돼요. 9시부터 한 시간 동안 밥 먹고 쉬고 나면 또 쓰레기가 꽉 차요. 74박스 두세 개씩 나오는데, 엄청 무거워요. 그거 치우고 나면 이제 또 다른 일을 하는 거죠. 선생님 탈의실이랑 대기실 청소하면 또 쓰레기 뺄 시간이에요. 중간에 퇴원하는 방 있으면 퇴원방 청소하러 가야되고. 그러고 나면 또 쓰레기가 차요.”

하루의 마무리는 늘 쓰레기를 비우는 것이다. 순애 씨는 하루 스케줄을 어쩌면 이리 잘 맞춰놓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노동자들이 잠시도 쉴 수 없도록 치밀하고 촘촘하게 계획한 스케줄이다. 순애 씨는 중환자실에 와서 사망하는 환자나 임종 직전의 환자, 이들의 가족을 보며 많이 울었다.

“하루에 두세 명 보게 될 때도 있어요. 사망해서 나가고 나면 다른 환자 들어온다고 바로 청소해달라고 하기도 해요. 보호자들은 복도에서 울고불고하는데. 우리도 청소하면서 같이 울어요. 슬프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렇잖아요. 나이 어린 사람이 들어오면 또 가슴 아프고. 감정노동이 맞는 거 같아요. 그런 것도 있어요. 내가 임신했을 때는 임산부만 보이고, 내 아이가 중학생이 되니까 그 또래가 많이 보이고 그래요.”

올해 분회장을 맡게 되면서 순애 씨는 고민이 많았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초창기 조합원들도 떠나고, 다른 투쟁 사업장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보니 할 수 있는 투쟁도 많지 않았다.

“이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죽으라면 죽는시늉하면서 일하고 있었을 거예요. 노조파괴 문제로 싸울 일도 없었겠죠. 근데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노조파괴는 이 노동조합이 있음으로써 생긴 문제니까, 그 문제를 바로 잡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변순애 분회장)

다친 거 모르는 척해달라고 하기도 해요

[출처: 연정]

코로나19 초기, 곳곳에서 ‘코로나 영웅들’을 응원하는 격려 물품을 보내왔지만, 청소노동자에게는 음료수 한 개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명희 씨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곳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이와 동시에, 자신이 환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한다.

"안 아픈 사람이 없어요. 저도 일하다 다쳐서 허리가 안 좋고, 손가락도 많이 아파요. 박스를 뽀개거나 쓰레기 빼는 집게를 쓸 때, 아귀힘을 많이 쓰거든요. 직업병인 거죠. 정년퇴직한 선배들이 병원에 와요. 어디에 종양이 생기거나 암에 걸렸거나, 관절수술 같은 걸 하러 오시는 거예요."

명희 씨는 오랜 기간 유동 근무를 하다 보니 수술실, 병동, 중환자실, 응급실, 채혈실, 코로나19 안심진료실 등 병원에서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다 가봤다. 병원 청소 업무를 할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을 묻자, 명희 씨는 다치지 않고 감염되지 않는 노동자 자신의 안전이라고 했다.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곧 동료 노동자와 환자·보호자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쓰레기를 담은) 감염박스도 출고 기한이 있어요. 보통 10일 이내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해요. 수술실이나 중환자실에는 반드시 번호를 써서 배출해야 하는 폐기물이 있는데, 그것도 신경 써야 하고요. 주삿바늘에 찔리는 거는 흔한 일인데, 사실 섬뜩하죠. 쓰레기를 봉할 때는 소독을 계속하면서 하는데, 이러다 빨리 죽겠다 싶어요. 이게 다 락스잖아요."

주의한다고 해도 다치는 일을 완전히 피하기 어렵다. 한번은 환풍구를 닦다가 손을 베인 적이 있다.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데도, 회사에서는 밖에 있는 다른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라고 했다.

“뜨거운 물에 화상을 입는 일도 마찬가지고,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데도 나가서 치료하고 오라고 해요. 산재는 생각하기도 어렵고요. 어떤 분들은 그런 일이 있으면 말이 많이 생기니까, 자기 다친 거 모르는 척해달라고 하기도 해요.”

명희 씨의 손에는 이날도 어디에선가 일하다가 다쳐 생긴 상처와 흉터가 여러 군데 있었다. 여기는 ‘알아서’ ‘능력껏’ 해야 하는 일이 많다. 일하다 다쳤을 때도, 업무 중에 필요한 장갑 등 작업 용품을 구하는 일도 그랬다. 명희 씨는 입사해서 2~3년 동안 새 유니폼과 새 신발을 받아본 적이 없다. 회사는 다른 사람이 버린 걸 빨아서 줬다. 청소노동자들은 간호사들이 버린 신발을 신기도 했다. 병원 측에서 노동자들의 유니폼과 신발 비용을 용역회사에 다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나서다. 최근에는 새 신발과 유니폼을 지급받고 있지만, 신발은 질이 좋지 않아 간호사들이 버린 걸 신는 게 더 낫다고 했다.

소신대로 선택한 일, 후회는 없어

명희 씨는 2016년 12월 말 입사 면접을 보러왔다. 간단한 면접을 마친 용역업체 감독은 옆에 있는 한국노총 노동조합 사무실로 명희 씨를 데려갔다.

“저보고 무조건 가입하라는 거예요. ‘3개월 후에 하면 안 될까요?’ 그랬더니 이걸 가입해야 불이익을 안 당한다고 해요. 그래서 저는 입사도 안 했는데, 면접 보면서 노동조합 가입을 했다니까요.”

회사 측은 신규 입사지원자들의 면접이 끝나자마자 한국노총 노동조합 사무실에 데려가 민주노총 노동조합을 비방하며 노조 가입서를 쓰게 했다. 가입서 작성을 망설이면 불합격 통보를 받는 일도 있었다. 2016년 8월부터 2017년 9월까지 13개월 동안 신규 채용 노동자 59명 중에 민주노총 세브란스분회 가입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일하다 다치거나 임금체불 문제 등 사건은 계속 생기는데, 한국노총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을 위한 그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다. 로비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피켓 선전전 하는 모습을 본 명희 씨는 ‘나도 언젠가는 민주노총에 들어가야지’ 하는 다짐을 했다. 2년 뒤 그 다짐은 현실이 된다. 자신의 소신에 따라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조합원이 많으면 더 좋겠죠. 지금 우리 다섯 명, 일하는 시간이 달라서 얼굴 보는 것도 쉽지 않아요. 그래도 민주노총은 우리 뒤에 있는 엄청난 백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집회할 때나 투쟁할 때, 늘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잖아요. 말뿐이 아닌 실천하는 곳, 그게 민주노총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이 문제가 해결이 되든 안 되든 잘못된 것들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자는 생각이에요.”(김명희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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