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 30분 전, 그러니까 낮 3시에 난 그 앞을 지나갔다. 장사를 준비하는 포장마차를 보았다. 점심을 거르고 나온 터라 어묵이라도 하나 먹고 갈까 했는데 막 준비하는 거였는지 꼬마김밥만 랩에 싸여 놓여 있었다. 한참 그 꼬마김밥에 눈길을 주면서 '참 예쁘게도 말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일을 보고 나서 돌아가는 길에 그 포장마차에 들러 어묵 하나를 먹었을지도 몰랐다.
제공 - 삶이 보이는 창, 박상경 님 |
그런데 1시간 30분 전에 장사 준비하는 모습을 보았던 그 포장마차가 길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가지런히 쌓아놓았던 꼬마김밥은 길바닥에서 으깨져 있었다. 꼬챙이에 일일이 꿰어져 있던 어묵은 통째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핫도그며, 닭꼬치며, 나무젓가락에 끼어진 햄과 핫바도 뒹굴었다. 도로에는 튀김반죽이 쏟아져 있었고, 껍질이 벗겨진 삶은 달걀은 그 하얀 살을 보이며 떨었다. 기름이 쏟아졌고 기름솥이 나뒹굴었다. 포장마차 위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어야 할 것들이 모두 길바닥에서 뒤죽박죽이었다. 포장마차의 지붕은 도로로 떨어져 나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랬다. 어이없는 상황에서 포장마차 지붕은 마치 하늘을 쳐다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 같았다.
하루 노동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 출출한 배를 채워 줄 저 음식들, 가난한 허기를 500원으로, 1000원으로 달랠 수 있는 저 음식들, 찬바람에 몸도 춥지만 마음까지도 추운 사람들을 따뜻하게 데워 주는 어묵 국물(어묵 하나 먹으면서 종이컵에 네댓 번은 국물을 떠 마시며 배를 불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래도 눈치 주지 않는 노점상들을 나는 많이 보았다),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 힘을 내게 해 줄 저 먹을 것들이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낮 3시 무렵 이곳에 나와 장사 준비를 하기 전까지 오전 내내 장을 보고, 꼬챙이에 어묵을 꿰고, 밀가루를 이겨 튀김반죽을 하고, 떡볶이 양념을 만들고, 물을 채우고 했을 한 사람의 노동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포장마차 노점상 한 사람이 아니라 여기에 내팽개쳐진 모든 먹을 것들을 길러내고 만든 이들의 수고와 손길이 죄다 무시당하고 모욕당했다. 농민, 노동자, 상인 그 모든 사람의 노동이.
급하게 전화를 했다. 내 가방에는 종이와 볼펜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종이와 연필이 그다지 많은 일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구로 시장 안에 있는 '삶이 보이는 창'에 전화를 걸어 사진을 찍을 줄 아는 후배에게 사진기와 녹음기를 챙겨오라고 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전국노점상연합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낮 3시 30분에서 4시 사이에 구로구청에서 보낸 철거용역 깡패 2, 30명 정도가 와서 말 한 마디 없이 무작정 오함마로 포장마차를 때려부수었다고 한다. 포장마차의 주인 김용애 씨(52세)는 울었다. 전국노점상연합 차에 연결된 마이크를 들고 시민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나 이야기했다. 오른손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용역깡패들이 타고 온 차를 못 가게 막는데 용역깡패들이 팔을 꺾어 인대가 늘어났다고 한다. 병원에 갈 형편도 안되어 임시방편으로 붕대만 감았다.
"눈으로 봐도 깡패인지 아닌지 딱 티가 날 정도로 덩치가 큰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해놓았어요. 저거 오함마로 뚜드린 거예요. 이 아주머니 쌀이 떨어졌어요. 진짜 가난한 분이에요. 나와야지 먹고살죠. 20일 동안 굶다가 오늘 나왔는데……"
같은 노점상인 한 아저씨의 말이다. 목이 메어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아저씨는 어제 뉴스에서 울산 노점들이 지게차로 강제철거 된 게 나왔다며 지금 곳곳에서 이렇게 강제 철거를 한다고 전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전국에서 한나라당이 구청장이 된 곳이나 시장을 하는 곳마다 강제 철거가 자행된다고 한다. 아주머니를 잘 아는 할머니가 다가오셨다.
"그동안 구청에서 리어카를 두 개 훔쳐갔어. 이 사람 거하고 동생 거 하고 집에 묶어놓았는데 밤인가 새벽엔가 두 개 훔쳐 가버렸어. 그래도 우리가 가만히 있었거든. 그란데 또 이 식으로 나가면……. 사람이 배고프면 울 안 넘어갈 놈 없다고, 그 많은 식구에, 20일 동안 장사를 못 했으면 오죽했겠어요. 눈 뒤집혀요, 눈 뒤집혀 정말. 구청에서 정말 이렇게 해야 하는가."
잠시 김용애 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김용애 씨는 말하는 도중 계속 울었다.
"나는 정말 구로구청에서 이런 횡포를 부린다는 것은 생각도 안 했어요. 있는 사람이 누가 노점상을 하려고 하겠어요. 나도 진짜 이런 탄압 받으면서 혼자 한 게 몇 년인지 몰라요. 아주 지겨워서……. 내가 여기서 13년째예요. 모르는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저렇게 버니까 많이 버는구나' 할지 모르지만 진짜 없어요. 내가 진짜 통장에 돈 10만원만 있어도 부자라고 생각해요. 그렇잖아요. 노점상들이 돈이 많을 것 같으면 가게 얻어서 편안하게 살지 왜 이렇게 마음 졸여가면서 하겠어요."
13년째 이 자리에서 포장마차를 해왔다는 아주머니는 그 시간만큼 철거와 폭력에 몸과 마음이 시퍼렇게 멍들었을 것이다. 애경백화점이 만들어지기 전에 공사하던 때에는 애경백화점을 짓던 노동자들의 출출하고 허기진 배를 채웠다. 애경백화점이 들어선 뒤에는 애경백화점 직원들의 간식거리가 되어 애경백화점마저도 이 아주머니에게 장사하라 마라 아무 소리도 않고 지나온 시간이었다.
나도 구로에서 9년째 살면서, 그리고 구로에 처음 발을 딛은 것까지 하면 12년인데 어쩌다 구로역에서 이 앞을 지나가게 되면 이 포장마차를 보았다. 그런데 장사하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아주머니 말대로 나도 어느 땐가 '저렇게 장사하면 많이 벌겠네'라고 쉽게 생각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언제 철거 폭력이 닥칠지 살얼음판 걷는 듯한 그 심정은 모르고, 리어카를 빼앗기고, 리어카가 부서지는 일들을 13년 동안 수없이 당한 그 사실은 모르고, 내동댕이쳐져도, 부서져도 다시 이곳에 나올 수밖에 없는 그 형편은 모르고…….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아주머니의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다. 노점상들 대부분이 그렇다고 한다. 앞에서 이야기 한 아저씨말로는 오후 서너 시에 나와서 하는 장사인데 벌면 얼마나 벌겠냐고 한다.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더운 여름날, 리어카 빼앗기는 날들, 이런저런 날들을 빼면 일 못하는 날도 많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13년을 했을 때는 어느 고역을 당했겠어요, 진짜. 구청에서 계속 리어카를 가져가서 장사를 못 하게 하는 거예요. 이게 구청이 할 짓이 아니잖아요. 내가 장사 안 한 지가 20일 되었어요. 진짜 돈이 10원도 없어요. 우리 동네 노인네들이 있는데 제 일을 좀 도와주셔요. 동네 노인들 모시고 바람을 쐬러 좀 나갔는데 리어카를 철거해 갔어요. 그래서 우리가 갔더니 용역을 시켜서 세워 놓았더라고요. 면담을 하라 그래서 면담하러 갔는데 그 과장이 내 이름을 부르기에 나라고 했더니 면담 안 한다고 책상을 탁 쳐서 무릎을 2주 진단 나오도록 맞았어요. 그게 구청이 할 짓이 아니지요. 그 곤욕도 내가 받았어요. 그래도 내가 인터넷 안 올리고 그냥 있었어요. 근데 이제 와서는……. 예고도 없이 오늘 그냥 작살 다 내고 갔어요. 이게 어떻게 해서 구로구청이 할 짓이냐고요. 딴 때 같으면 몰라요. 12월 달이야, 12월 달. 없는 사람들……."
12월이다. 12월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어제부터 바람이 꽤 쌀쌀해졌다. 정말이지 없는 사람들한테 겨울은 어떻게 해서든 피해가고 싶은 계절이다. 구로구청에서는 말로써가 아니라 폭력으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나 보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5만원 주고 산다는 김용애 씨. 큰아들도 마찬가지로 35만원 월세로 산다. 일을 못하다 보니 그 월세마저도 밀려 있는 형편이다. 빼앗긴 리어카, 부서진 리어카. 리어카 한 대에 김용애 씨 식구들의 목숨줄이 달려 있는데 그 사실을 구로구청에서는 알까, 철거용역 나온 사람들은 알까. 자신들이 오늘 무엇을 부수었는지.
"아들만 셋인데 우리 식구 모두 이 리어카 한 대로 벌어먹고 살아야 해요. 아침에는 우리 아들이 토스트 장사해요. 직장 잘려나가서. 요즘 직장 잘려나간 사람 많잖아요. 우리 며느리랑 둘이서 해요. 그래도 그 아이들이 아침에 토스트 장사해서 먹고살겠다고……. 그리고 막내아들이 나를 도와서 둘이 벌어먹고 살아요. 둘째만 직장 다녀요. 내가 잘 먹고 돼지새끼 같으면 난 부끄러워서 못해요 이거. 내가 돈이 많고 땅이라도 사 놨으면 부끄러워서 이 짓 못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나보다 없는 사람들 때문에."
주위 분들에게 들어보니 김용애 씨는 자신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이 일을 해오는 13년 동안 없는 돈을 쪼개 가리봉동 쪽방에 사는 노인들을 보살피기도 하고, 복지관 자원봉사활동도 했다. 배고픈 사람을 보면 국수라도 말아 나누어주었다.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의 심정을 알기에 가난한 자신이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던 것일 게다.
가을에 두 차례 리어카를 빼앗기고 구청 쪽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20여 일 간 일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더 이상 일을 안 하고 있을 수 없어서, 그대로 굶어죽을 수 없어서 일을 나온 첫날. 자신의 리어카는 다 빼앗기고 없어서 아는 사람이 줘서 끌고 나온 리어카였다. 돈이 없어 재료도 살 수 없는 형편이라 옆에서 과일을 파는 아주머니가 전날 꿔준 돈 10만 원으로 이것저것 산 먹을거리들이었다. 살얼음 걷는 심정이라도 일을 다시 하게 되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하지만 그 마음은 오래 가지 못하고 다 산산조각 나 버렸다. 아니 구로구청이 철거용역 깡패를 사서 산산조각 내어 버렸다.
"나 돈이 하나도 없어서 어제 10만 원을 빌려줘서 재료 사왔어요. 근데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 이 사태는 아니야 진짜로. 구청장이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는 거야. 올해 처음부터 계속 마찰이 있었어요. 아까 내가 차에 매달리니까 나를 끌어내고 손을 비틀고 이렇게 해서 인대가 늘어난 것 같아요. 용역깡패 그냥 하는 게 아니에요. 돈주고서 시키는 거지. 우리 구로에 영세민 많아요. 그러면 용역 사는 돈으로 그 돈으로 불우이웃을 돕는 게 더 낫지."
구로구청의 정책이 무엇인지, 왜 한 마디 말도 없이 다짜고짜 오함마로 때려부수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리고 굳이 구로구청에 찾아가 물어보고 싶지도 않다. 그간의 사정을 모른다 해도 12월 14일 낮 4시 30분에 내가 눈으로 맞닥뜨린 상황만으로도 충분하다. 분명 잘못 되었다. 구로구청은 약하디 약한 사람한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다. 결코 이런 장면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아수라장이 된 포장마차를 바라보던 학생, 시민들의 눈빛과 얼굴을 보았다. 모두 어떻게 저렇게 할 수가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나이 든 아주머니들은 "먹고살게 놔두지", "어려우니까 이렇게라도 하려는 건데 때려부술 수가 있어"라는 말을 한 마디씩 던지고 갔다.
애경백화점 앞 나무들에는 작고 노란 전구가 달려 반짝였다. 백화점 앞에는 성탄절 트리도 세워져 있었다. 연말이면 사람들은 조금은 선해지고 싶고, 마음뿐일지언정 조금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고 싶어한다. 추운 겨울날, 2004년이 다 가는 이때에 구로구청은 가난한 사람의 살림을, 일터를 이렇게 부수고 싶었을까, 부수어야만 할 그 무엇이 있었을까, 다 부수고 난 오늘밤 편안하게 다리 뻗고 잘 수 있을까, 부수어서 없앴으니 앓던 이를 빼고 편안하게 잠들 것인가.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