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들녘에 볏짚으로 무대를 쌓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앉을 의자도 만들었습니다. 논가에는 구호를 적고, 시를 적은 만장이 바람에 펄럭입니다. 문학축전, 평화축전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시인들이 무대 위에서 시를 낭송하고,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불판을 피워 돼지고기를 구우며 김치와 함께 먹으며 술 한잔씩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꼿꼿이 앉아 무대만을 바라보는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넓은 들판은 누가 어디에 있건, 앉아 있건 서 있건, 무대를 바라보건 딴 곳을 바라보건, 멈추어 있건 움직이건, 들어있건 빠져있건 그대로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는 공간이었습니다. 봄과 여름, 가을 동안 생산에 힘 쏟은 들판은 이 겨울 사람들에게 광장이 되어줍니다.
참 넓은 들판이었습니다. 더 멀리 가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함께 간 아이와 행사장에서 빠져나와 길을 나섰습니다.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저쪽 어딘가에 문무인상을 세운다고들 다녀왔는데 그게 어디에 있을까 하며 그냥 걸었습니다. 논두렁으로도 걷다가 시멘트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민들레를 발견합니다. 이 겨울까지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지 않고 그대로 둥근 모습으로 논두렁에 남아있더군요. 어째서 지금까지 세상 어디론가 날아가지 않고 이 추위 속에 남아있었을까요. 무수한 바람이 불어도 자신이 기다리는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남아있음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을까요. 혹 그것도 아니면 벌써 오래 전 화석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그 속마음은 모른 채 우린 민들레 씨앗을 날려보냅니다. 후후 불어 겨울 한가운데로 날려보냅니다. 내년 봄에 어디선가 이 홀씨들이 다시 새싹으로 살아나오겠지요. 그때 민들레 새싹은, 민들레꽃은 모를 심는 농민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행사가 열리는 곳에서 점점 멀어지자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습니다. 참 넓기도 넓습니다. 눈 닿는 곳이 다 논입니다. 저 멀리 문무인상이 보이기는 하는데 만만한 거리가 아닙니다. 낮에는 그렇게도 따습더니 저녁이 가까워오자 바람이 제법 찹니다. 다행히 아이가 돌아가자거나 춥다거나 하면서 보채지 않았습니다. 사실 돌아올 길이 걱정이 되기는 했습니다. 어둑어둑해질 테고 다시 찬바람 맞으며 이 먼길을 되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좀 그러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벌써 걸어온 길이 어딘데, 가다보면 그곳이 나올 텐데 하면서 계속 걸었습니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뒤돌아서지만 않으면,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어떤 길이든 언젠가는 갈 수 있을 겁니다. 가 닿을 수 있을 겁니다.
사실 꼭 그 문무인상을 보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내가 사는 곳 도시와는 다른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봄여름가을 날마다 이 길을 걷거나 오토바이로 달렸을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조금이라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느껴보고 싶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어쩌면 나는 영영 그 마음을 모르고 지나갈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저 그이들처럼 한번 걷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용산 미군기지 확장이전 문제가 과연 평택 팽성읍 대추리 마을 사람들만의 일일까요? 마을에 도착해서 한 할아버지께 나는 “할아버지 여기 행사에 가세요?”, “여기 사세요?”, “걱정이 많이 되시겠어요?”라고 여쭈었습니다. 내 물음은 나쁘지는 않지만 잘못되었다는 것을 난 곧 깨달았습니다. 나는 다시 나에게 묻습니다. “대한민국에 삽니까?”, “당신은 걱정이 안 됩니까?”라고. 분명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닌데 어느 샌가 그 지역 사람들만의 문제로 몰아넣은 게 참 많습니다. 오래 전 광주의 문제가 그렇고, 부안의 문제가 그렇고, 새만금의 문제가 그렇고 천성산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내가 모르거나 잊고 있는 어떤 곳의 문제가 그럴 것입니다. 분명 일부 사람들만이 겪는 문제가 아닌데 일부만이 나서게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국가보안법철폐 문제가 그렇고, 파병 반대, 쌀 개방 반대 문제가 그렇습니다. 농민이, 노동자가, 도시빈민이 겪는 고통을 그대로 함께 겪지 못하는 일 나는 아직도 많습니다. 나는 언제나 뒤늦게 느끼기에 바쁘고 뒤늦게 알고 이해하기에 바쁩니다.
되돌아오는 길, 한참을 걸어도 저쪽 들판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꼭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벌써 다 끝나고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애당초 판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여전히 하늘을 나는 연들이 없었다면 말입니다.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소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쪽 들판에서 사람들이 모여 내는 소리가 들판 이쪽에 있는 나와 아이에게 들리지 않지만 엄연히 저쪽 들판에서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사람들이 소리내고 있었습니다. 나로부터 먼 곳에 떨어진 다른 사람의 삶의 자리에서 나오는 소리, 내가 듣지 못하는 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망설이며, 늦은 글로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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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촬영은 '삶이 보이는 창' 권기윤 씨께서 도와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