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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조제를 열어라, 철거하라

[주용기의 생명평화이야기](11) - 아리아케해 어민들의 생생한 재판 증언

정부는 새만금사업을 초기 계획할 당시 일본 규슈의 이사하야만 간척사업을 검토한 바 있다. 그런데 이사하야만 간척사업 이후 방조제 외측의 아리아케해 전역에서 생태계 변화와 어민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이에 새만금 소송 담당 변호사들과 지난 12월 8일부터 3박 4일간 아리아캐해를 직접 돌아보고 어민들로 부터 피해상황을 들었다.

지난 12월 9일은 일본 사가지방법원에서 ‘소생하라! 아리아케해 소송’이 제개되었다. 이때 방청을 했는데, 이사하야만 간척으로 인해 아리아케해에서 어업활동을 하는 어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 지를 어민 3명이 직접 증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간척사업으로 인해 주민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아래와 같이 그대로 싣는다.



어민 증언.1 : 후쿠다 노부오 (구마모토현 아라오시 구라미쯔 1079-2)

저의 어업경력 등
저는, 쇼와 15년(서력 1926년)에 태어났습니다. 쇼와 49년(서력 1974년)부터 아라오에서 어업을 해 왔습니다. 벌써, 어업을 시작한지 30년 이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번 돈으로 매년 가족을 여행에 데리고 갔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들과 아내의 약간의 아르바이트 수입과, 이웃사람들이 나누어 주는 야채 등으로, 겨우 먹고 살고 있습니다.

어업을 하기 전은, 사진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쇼와 49년(서력 1974년), 당시 아라오에서 어개류의 중개인을 하고 있던 저의 숙부가 병에 걸려, 중개인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숙부는, 저에게, 중개일을 물려받는 것은 어떻게는가고 말을 걸어 왔습니다. 저는, 어업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대량으로 잡히는 바지락 등의 이야기를 듣는 중, 바다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아리아께해에 인생을 걸 것을 결정하고, 중개일과 바지락 잡이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2세와 1세의 2명의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먹여 살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저는, 바지락 잡는 법에 대해 초보적인 것부터 배웠습니다. 바지락이라고 하면, 가족을 먹여 살릴 만큼의 양을 잡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때문의 기술은 오묘합니다.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일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아리아께해는, 일하면 일한만큼, 그에 따라서 받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여하튼, 제가 일하고 있었던 아라오지역의 갯벌은, 모래가 아니고, 조개 껍때기가 부서져서 만들어진 갯벌입니다. 매우 풍족한 바다입니다. 풍족할 때의 아리아께해에서는, 바지락 잡이 만으로도, 1년간에 600만엔 정도의 수입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정신 없이 일하였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부드러웠던 저의 손의 표면은 두꺼워지고, 저의 얼굴도 햇빛에 그을려서 검게 되었습니다. 저의 생활도, 마음도, 아리아께해처럼 풍족하였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는 몸도 마음도 동료들과 같은 어부가 되었습니다.

이사하야간척공사 개시 후의 어업피해에 대하여
그런데, 이사하야만간척공사가 시작되어, 아라오의 어업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헤이세이 5년(서력 1993년), 6년(서력 1994년)쯤은, 바지락을 가득 채워 넣은 10톤 트럭이 매일 달렸습니다. 저와 아내 2명이 매일 2시간 일하는 것 만으로, 2톤 이상의 바지락이 잡혔습니다. 많을 때는, 1주일에 130만엔 정도의 어획량이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3월, 4월, 5월, 9월은 어떤지요? 바지락의 어획량은, 합계해도 겨우 35만2,425엔! 1개월에 겨우 8만엔 조금입니다. 이것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습니다.

키조개는, 1997년쯤을 정점으로, 감소할 뿐입니다. 키조개 잠수잡이는, 후쿠오까쪽에서는 오전 9시에서 11시까지의 2시간밖에 잠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라오에서는,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잠수하였습니다. 그 정도로 잘 잡히는 어장이었습니다. 많을 때는 1일 80kg정도는 잡혔습니다. 매일 50만엔 정도의 어획량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자원보호를 위해, 채취하는 장소를 결정하면, 그 이외의 장소는 남기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작년 태어난 키조개는 거의 없습니다. 금년 태어난 것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2년째에 들면, 폐사하고 맙니다.

그 때문에, 키조개의 조개관자는 겨우 2그램 정도입니다. 7그램에서 8그램이 안되면, 상품가치는 없습니다. 고기잡이의 대상이 되는 키조개는, 이미 없어져 버렸습니다.

참서대도, 1997년쯤까지는, 많으면 1일에 100상자에서 120상자는 잡혔습니다. 지금은 1일에 겨우 5, 6장입니다. 1개의 상자 안에는, 5, 6장의 참서대가 찰싹 달라붙어 있을 뿐입니다. 지금부터 1, 2년이 지나면,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겠지요.

가자미는, 금년은 전혀 없습니다. 산란도 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전멸상태입니다. 해저의 물고기는 완전히 가망이 없습니다. 해저가 Sludge화하여, 빈산소 상태로 되어 있어,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새우를 잡으러 갔지만, 잡힌 것은 3마리인가 5마리인가고 말하였습니다.

해저의 생선만이 아닙니다. 문어, 오징어, 전어 등의, 바다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도 없습니다. 요 전날도 바다에 나가 보았지만, 어군탐지기에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습니다.

어선을 출발시키는 데는, 20에서 30리터의 경유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상태에서는 연료비조차 벌어 들이지 못합니다.

이처럼, 기요틴을 낙하시킨 것으로, 어선어업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저는, 김이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어기를 늘리거나, 노력을 하면 그때그때 대응할 수 있는 부분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선어업은 그렇게는 안됩니다. 조개와 생선이 없어지면, 노력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미 끝입니다.

그 김조차, 요즘은 혹독합니다. 오오무따와 아라오의 김은, 그것은 심하게 뚝 떨어진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어선어업은, 그보다도 더 심합니다.

노력해서 조금이라도 잡힌다면, 저는 어떤 노력이라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아리아께해는, 노력의 사해조차 없습니다. 그런 바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참을 수 없이 슬픕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65세가 되었습니다만, 일을 할 수 없는 몸이 아닙니다. 잡힌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생선을 잡으러 나가겠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저는 완력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도중에 어부가 되었기 때문에, 아라오의 바다에 대해 남보다 더 연구를 하였습니다. 제가 가장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다른 사람에게는 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선을 잡으러 나갈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인생을 아리아께해에 걸고 어부가 되었습니다. 인생 그 자체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저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이제 와서 다른 일 등은 할 수가 없습니다. 할 일이 없는 것이, 이렇게도 고통스러운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수입이 없기 때문에, 그날그날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언제나 심한 초조함과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의 상태로는, 빛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의 아리아께해는,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생명을 키우는 농후한 수프와 같았던 아리아께해가, 오로지 소금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다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생명의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기요틴을 막은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지꾸고 오오제끼의 공사때도, 3년에, 바다는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 왔습니다. 하지만, 기요틴이 막힌 상태에서는, 바다는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 오지 않습니다.

지금과 같은 바다의 상태에서, 젊은 사람에게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생활의 괴로움, 일을 할 수 없는 고통스러움으로부터,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농수성 앞에서 자살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그런 상태로까지 이르렀습니다.

이것으로 좋을까요? 도대체, 인권이란 무언가요? 저희들에게는 정말로 보장되어 있는 건가요? 저희들의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게 빼앗겨 버려도 좋다는 것인가요?
저는, 저의 인생을 되찾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서 있습니다.

저희들의 현황을, 반드시 이해해 주실 것을, 꼭 정의를 실현해 주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어민 증언.2 : 요시다 도쿠히로 (나가사끼현 시마바라시 거주)

발단
저는, 나가사끼현 시마바라시의 시마바라어협에 소속하고 있는 요시다 도쿠히로입니다. 계절마다, 2∼4월은 미역, 5∼6월은 다시마, 7∼8월 전반은 병어, 8월 후반부터 11월까지 보리새우, 12월∼1월까지는 광어와 참서대를 잡고 있습니다.

저는, 고교를 졸업한 후 바로 가업의 어선어업을 하게 되어, 금년으로 23년째가 됩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어업을 시작한 것은, 초등학생 때부터 아버지와 숙부들의 고기잡이에 가서 거드는 것이 보통 생활의 일부이며, 또한, 다종다양한 생선이 많이 망에 걸리는 것을 보는 것이 즐거움이며, 저도 아버지들처럼 생선을 잡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흉어의 시작
이사하야 공사가 시작되기 전은, 해마다 풍어흉어는 있었지만, 흉어라 하여도 여유는 없다하여도 생활하는데에 필요한 양은 충분히 있었습니다. 적어도,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사하야공사가 시작되어, 서서히 어획량이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만, 버블경기의 영향으로 어획량이 조금 줄어도, 어획물의 단가가 높았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에 영향을 느끼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기요틴(강철판 274개를 떨어뜨려 물막이를 한 것을 세계 최대의 ‘단두대’로 표현)으로 방조제가 닫히고부터는, 어획량이 극단으로 줄어들기 시작하여, 생활이 궁색하게 되었습니다.

대충 말하면, 이사하야공사 착공 전을 10할로 하면, 1997년의 방조제 물막이 전에 7할로 감소하고, 익년 1998년은 6할로 감소하여, 현재는 3∼4할로 감소하였습니다.
  일본 아리아케해를 방문한 유기화(계화도 어민, 왼쪽)과 증언을 한 어민 요시다씨(오른쪽)


미역에 대하여
저의 어업의 1년의 사이클은, 2∼4월은 미역의 수확시기입니다만, 그 전에 로프에 씨앗 줄을 휘감는 작업이 있어, 전년의 10월말부터 11월 전반에 준비를 합니다.

방조제가 닫히고 나서부터 라는 것, 10월 후반에서 12월에 적조가 발생하여, 미역종묘의 싹이 떠내려 가서 수확량이 격감하는 현상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싹이 떠내려가는 것은, 1∼2cm정도의 미역이 뿌리부근에서 잘려서 떨어지는 현상입니다.

금년에 있어서는, 지금으로서는, 적조의 발생은 없지만, 하지만 영양염의 양이 전적으로 낮은 것 같습니다. 영양염의 데이터는 나가사끼현의 김 정보의 영양염의 데이터가 있는 것, 영양염의 수치가 높을 때는 성장하는 것이 빠르지만, 영양염의 수치가 낮을 때는 성장이 늦습니다.

그러므로, 내년 2월부터의 수확기가 지금부터 걱정입니다. 미역까지 잡히지 않게 되면, 폐업까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다시마에 대하여
5∼6월은 다시마를 수확합니다. 양식 다시마는 적조에 의한 영향으로는 강합니다만, 영양염의 저하로 이전보다도 성장하지 않으며, 동일한 장수가 잡히고 있지만, 중량이 25%정도 가벼워졌습니다.

1월의 작업이 모두 손 작업으로, 이 이상의 수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감수가 됩니다.

병어에 대하여
7∼8월 전반은 병어를 잡고 있습니다. 병어는, 1일에 잡힐 때는 굉장하게 잡히며, 잡히지 않을 때는 전혀 잡히지 않는 도박성이 큰 생선입니다만, 지금은 잡힐 때도 1번에 20kg정도이며, 이전은 100kg잡혔던 것으로부터 보면, 적어졌습니다.

병어는, 해저가 아닌 중층을 헤엄치는 생선이므로, 피해는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되지만, 치어 때에 아리아께해의 만 안쪽과 이사하야만의 갯벌지역에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하야만의 갯벌이 없어진 지금, 이사하야만에서 크게 된 생선이 없어진 분, 확실하게 감소하고 있습니다.

보리새우
8월 후반에서 11월까지 보리새우를 잡고 있습니다. 보리새우는 源式網이라는 유망 잡이입니다. 큰 조수에서 작은 조수까지 15일간 있으며 작은 조수의 5일간을 제외한 10일간 고기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사하야공사 전은, 1년간의 수입의 반을 보리새우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사하야공사가 시작되기 전은, 8월부터 11월까지 1시즌 500kg정도의 어획량이 있었습니다만, 공사 착공부터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여, 방조제 물막이 전의 350kg정도였습니다. 물막이 후는 격감하여, 물막이 2년 후의 1999년이 제일 나쁘고, 1시즌 겨우 68kg밖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금년은, 70kg정도였습니다.

금년의 경우는 10월 후반부터 11월은 생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1일에 보리새우가 1∼2kg정도로 연료의 고등으로 연료비도 나올지 어떨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미역양식의 준비에 시간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래서는 생활해 갈 수 없습니다. 조금 전 말한 것 처럼, 이전은 보리새우로 1년의 수입의 반을 의지하고 있고, 중심적인 어종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는, 이 시기는 부모의 연금을 조금 저축하고 있었던 것을 조금씩 이용하여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름동안, 어구 등을 사도 지불을 할 수가 없어서 겨울에 조금씩 지불해 가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광어 • 참서대
12월∼1월까지는 광어와 참서대를 잡고 있습니다. 모두 저생물고기입니다. 광어 • 참서대도 마찬가지로 피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참서대는 이전은 1일에 많을 때는 500kg정도 잡히고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50kg정도밖에 잡히지 않습니다.

금년 겨울은, 현재, 광어와 참서대도 수 마리 정도로 1일의 어획량은 수 천엔 정도로 생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저는, 이것은 방조제의 영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정지에서의 배수로 나쁜 물이 이사하야만에서 아리아께해에 흘러 나와, 저질을 악화시켰기 때문으로 생선이 생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조류의 둔화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은 Red tongue sole이 없었던 어장에서 Red tongue sole가 잡히게 되었습니다. Red tongue sole는 진흙질을 좋아하여, Black tongue sole는 모래질을 좋아합니다. 해저를 보고 오지는 않았지만, Red tongue sole가 잡힌다는 것은, 모래질의 해저였던 곳이 진흙화되고 있다고 추측됩니다.

흉어가 생활에 미치는 영향
어구가 새로울수록 생선은 걸립니다만, 현재로는 새로운 망 등의 어구를 구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새 어구의 지불의 전망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요최소한의 어구만 구입하고 있습니다.

이전은 매년 새로 만들어 왔던 어구를, 최근에는 4∼5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망을 새것으로 바꾸어도 그다지 걸리지 않고, 하지만 낡은 망으로는 더욱 걸리지 않는, 라는 악순환입니다만, 망비의 지불을 생각하면 지금의 어획량으로는 좀처럼 구입할 수 가 없습니다.

시마바라의 어선어업자에 미치는 영향
이것은, 저만이 아니고, 저희들 시마바라의 어선어업자의 대부분은 아리아께해에서 어선어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사하야의 영향은 몸에 배어들어 느끼고 있습니다.

시마바라어협의 조합원은 현재 200명 정도입니다만, 30세대가 수 명으로 수 년 후는 40대 이상의 어민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젊은 후계자가 어업을 이을 수가 없을 정도로 수입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다음 수 년 계속되면, 시마바라의 어업자의 반 수는 폐업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저희들 어업자 모두, 이사하야가 흉어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지 나가사끼현에서는, 목소리를 내서 말하는 것이 삼가야 할 분위기이고, 지금까지 좀처럼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금년의 후쿠오까고등법원의 부당결정을 받고, 시마바라시에서도 100명을 넘는 어업자관계의 원고가 새로 일어섰습니다. 저도, 이제까지, 공해등조정위원회의 원인재정 절차에 있어서 신청인으로서, 아리아께해의 이변을 호소하여 왔습니다만, 이번은, 본 소송의 원고로서 일어선 사정입니다.

현재의 아리아께해의 상황에서는 어선어업은, 어업으로서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일각의 유예도 없습니다.

개문조사 등에서 보다, 1분 1초라도 빨리, 아리아께해의 재생에 필요한 조정지의 수질회복과 조류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 저희들 아리아께해 어민의 생활회복에 연결됩니다.

법원에 있어서는, 꼭 조기의 공정한 해결에 더욱더 진력할 것을 부탁 드립니다.


어민 증언.3 : 오오가 武浩 (사가현 후지쯔군 다라읍 오오우라 534번지 2)

저는, 사가현 다라읍 오오우라의 어부입니다. 저의 집에서는 아버지 오오가 義穗 시대부터 김양식과 바지락양식을 주력으로 어업을 영위하여 왔습니다. 저는, 1996년 이후, 아버지를 거들어 주력이 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이사하야간척금지 재판에서는, 제가 본 재판의 원고, 아버지 義穗가 새 가처분의 신청인이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오우라에서 키조개 잡이와 김양식업을 하고 있던 아버지의 등을 보고 성장하여, 어렸을 때부터 김양식업을 거들며 성장해 왔습니다. 김양식 일은 11월부터 1월까지 잘 틈이 없을 (수면시간이 3∼5시간 이하)정도의 노동, 그것도 겨울의 찬 바다를 상대로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김양식업은 품과 시간을 들여 케어하면 할수록 어획량이 올랐습니다. 노력하면 그것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 매력이었습니다. 또한, 가령 따뜻한 겨울로 김양식이 떨지않는 해가 있어도, 새로운 바지락양식에 기대를 가질 수 있었고, 그 바지락양식도 프로의 어부도 그다지 수확하지 않는 밤의 수확을 하는 등의 노력으로 높은 어획량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후쿠오까의 대학을 졸업하고 당연히 도회에서 회사원 등으로서 일할 선택도 있었지만, 이상의 이유에서 태어난 고장에 돌아와서 어업으로 살아가자고 정하고 되돌아 왔습니다.

재판관, 이 김을 봐 주십시오. 이 김이 금년 가을에 오오우라에서 잡힌 색이 빠진 김으로, 입찰에 걸어도 1장에 3엔이라는 최저의 가격도 붙지 않는 김입니다. 건강한 검은 김에 비하면 색이 틀리고, 광택이 없고, 보풀이 일어선 너덜너덜의 표면 등, 차이는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오오우라에서는, 이사하야간척의 방조제 물막이의 익년 이후, 기본적으로 「흉작(凶作)」「흉작(不作)」이 보통으로 되어 있으며, 저희들 김 어민을 막다른 지경에 까지 몰아넣고 있습니다.

1997년의 이사하야간척공사의 방조제 물막이 전에 있어서, 사가현 다라읍 오오우라에서의 김양식은 저의 집을 포함하여 1시즌의 평균 어획량은 약 1,000만엔 정도였습니다. 사가현 동부의 김양식업자 정도의 어획량은 아니지만, 생활하는 데에는 충분한 수입이었습니다.

하지만, 방조제 물막이 후, 오오우라의 김어장을 포함한 오오우라 앞바다의 조류가 매우 늦어졌습니다. 김이 떠 흐르는 어장에서 김을 움켜쥘 때, 망을 기계에 휘감을 때에 손에서 느끼는 조류의 압력이 방조제 물막이 후는 현격히 약해진 것으로부터 명확합니다.

또한, 적조가 빈발하게 되었습니다. 종래, 오오우라와 고나가이 등은 가을부터 겨울의 김의 시기에 적조가 발생하는 것 등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방조제 물막이의 익년인 1998년쯤부터 매년처럼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특히 11월, 12월), 적조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적조에서 해수의 영양염이 저하되어, 김의 색이 빠져 상품가치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1998년도 이후의 김양식에 대하여
적조로 색이 빠지기 때문에, 1998년도의 어획량이 약 350만엔 정도로 평년작의 반이 되었습니다. 이것으로는, 경비로 쪼개져 생활비에 충당할 돈은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오우라에서는 아리아께해의 「대흉작」이래, 오오우라의 김양식은 「흉작(凶作)」「흉작(不作)」이 보통이 되었습니다. 1999년도에 어획량이 약 1,000만엔이었던 것 이외는, 거의 매년 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리아께 전체의 「대흉작」이라 불려졌던 2000년도에는 약 650만엔의 어획량이었습니다. 아리아께해의 김의 「대흉작」이라 불려졌던 2001년도조차 평년작에도 차지않는 약 900만엔의 어획량이었습니다.

더욱더, 2002년도의 어획량은, 어획량 약 90만엔이라는 궤멸적 결과였습니다. 그 원인은, 10월의 교배에서 11월까지 약 1개월간 연속적으로 적조가 계속되어, 가을 싹 김의 맨처음 김을 움켜질 쯤은 망에 붙일 때부터 영양염 부족 (그것도 100이상 있으면 OK로, 15∼20의 영양염 밖에 없음)으로 움켜쥘 때는 색이 빠져 있었습니다. 물론 냉동망도 궤멸이었습니다. 약 90만엔이라는 어획량으로는 생활비는 고사하고, 경비의 대부분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2003년도에는 「흉작」대책으로서, 저의 집에서는 김 망에 붙이는 장수를 280장에서 320장으로 늘렸습니다. 이 해의 가을 싹 김의 작황은 그런대로 였습니다만, 12월에 고나가이 앞바다에서 오오우라 앞바다에 걸쳐 적조가 오고 가며 움직이지 않아, 냉동망은 12월 30일에 색이 빠지게 되어, 1월 10일에는 망의 철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냉동망의 움켜쥐는 자체, 2회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망에 붙이는 장수를 늘리면 그것만으로 노동량이 많아지게 되지만, 그래도 평년작의 6할의 약 600만엔의 어획량밖에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으로는 생활비에도 부족한 형편의 상태입니다.

다음의 2004년도는,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서 비가 많은 영양염을 많이 공급하고, 게다가 태풍이 많아 영얌염이 아리아께해 전체에 뒤섞이고, 게다가 따뜻한 겨울은 아니었습니다. 즉, 적조의 발생이 억제되어 김양식에는 최적의 기후조건이 주어졌습니다. 그 때문에, 지역에 따라서는 「장수는 사상 최고」 등의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풍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지역 분께 양보합니다). 그렇지만, 오오우라에서는 냉동망에 붙인 후 12월에 적조가 계속하여 1월 5일에는 색이 빠지게 되고, 1월 20일에는 냉동망을 철거시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김의 어획량은 약 650만엔 (평년작의 65%)에 그쳤습니다.

이처럼 김의 최적의 기후조건의 해조차도, 그 위에, 망에 붙이는 장수를 늘려서 노동량을 늘려도 김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아리아께해의 기본적 체력이 결정적으로 쇄해져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금년도 (2005년도)의 김약식의 상황에 대하여
금년은, 가을 싹 김에 있어서도 제 1회 입찰 전의 11월 20일쯤부터 색이 빠져 나와, 제 1회 입찰에 있어서도 장수 • 품질이 함께 작년을 밑돌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제 1회 입찰에서도 매출이 146만엔 밖에 되지 않으며, 작년과 비교해도 약 100만엔의 감소로, 경비 등을 뺀 실수입은 약 67만엔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본일의 수 일전에 바다가 변화, 다소의 비가 내렸습니다만, 현재도 색이 빠지는 것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금년도 김약식에서는 빨리도 「흉작」이 되는가 등 암담한 기분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지락양식의 상황에 대하여
방조제 물막이 전에는, 바지락양식 어장의 밑바닥에 넣은 새로운 모래가 진흙으로 검게 되는 데에 5년 정도 걸렸습니다. 하지만, 1998년 이후, 새로 넣은 모래가 1년 정도로 검게 변색하여, 모래냄새도 부패한 것과 같은 냄새가 강해졌습니다. 그것은, 빈산소수 때문으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0년 8월에 바지락의 4할이 사멸하였습니다. 더욱더, 2004년 8월에는 양식하고 있었던 바지락이 전멸하였습니다. 그 때는 고나가이 방면에서 적조가 퍼져, 바다의 색이 일면 장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적조는 작은 조류 때에 전혀 움직이지 않으며, 좁은 해협과 외해와의 경계에 있던 생선도 죽어 있었습니다. 또한, 저질도 죽은 Sludge의 냄새가 나서 진득진득한 Sludge가 2∼3cm쌓여 있습니다 (이상에 대하여, 말미에 첨부한 「Sunday 매일」2004년 9월 19일 호).

종래, 양식 바지락 중 2∼3할은 사멸하는 일은 있었습니다만, 전멸은 처음으로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김양식에서 생활비도 확보할 수 없는 이상, 바지락양식이 의지의 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집에서는 마음을 새로이 하여, 2004년 가을에 약 140만엔분의 바지락의 새끼를 넣었습니다만, 금년 봄에 수확할 정도로는 성장하지 않아, 금년의 바지락의 수확 • 수입은 제로입니다. 금년은, 바지락의 성장이 이전보다도 늦어졌습니다. 물론, 2004년 여름처럼 적조 등이 찾아 오면 내년의 수확도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빈산소의 영향으로 저질이 금방 검게 되는 상황에서는 바지락이 사멸하기 쉬운 환경으로, 이제부터 바지락양식이 순조롭게 회복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더는 견딜 수 없는 막다른 지경에까지 몰아 넣고 있는 오오우라의 어민에 대하여
오오우라의 김양식은 방조제 물막이의 익년의 1998년도 이후 「흉작(凶作)」「흉작(不作)」이 보통이 되어 있어 막다른 지경에 까지 몰아 넣고 있습니다. 1998년도에는 13채 있었던 김양식업자 중, 2003년도 말에는 2채가 폐업하고, 더욱더, 2004년도 말에는 1채가 폐업을 하였습니다. 저의 집에서도 김양식만을 주력으로 하였다면 이미 폐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의 집에서는 바지락양식이 2003년도까지는 비교적 순조로웠기 때문에 폐업을 하지 않고 끝났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2004년도의 바지락의 전멸을 경험하며, 언제 폐업이 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김양식업자의 동료와 이야기를 할 때도, 「금년으로 끝나는가」라는 이야기가 복수의 사람으로부터 나와 어두운 마음이 될 뿐입니다.

또한, 오오우라는 잠수업의 키조개 잡이가 왕성한 토지로, 지역전체가 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조제 물막이 후에 급격히 어획량이 감소하여, 1999년도 ∼2002년도까지 어획량 제로가 계속되었습니다. 2003년도에는 「부활」이라 불려졌습니다만, 오오우라어협 전체에서도 30.25톤, 1일 1척의 어획량이 1만 7,800엔으로 「부활」과는 차이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도에 계속하여, 금년 2005년도도 키조개 잡이는 휴업하여 (2005년 11월 12일자 「사가신문」), 친척인 오오가 武吉 (이전 사가지방법원에서 의견진술을 함)도 포함하여, 키조개 어부들도 완전히 이제 다음이 없을 정도로 막다른 지경에까지 몰아넣고 있습니다.

법원에 바라는 것
오오우라에서의 김양식의 어업피해, 키조개의 어업피해, 바지락의 전멸 등, 시기와 그 밖의 사정을 고려하면, 이사하야간척공사에 원인이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어민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리아께해의 재생은, 이전의 조류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방조제를 열어, 방조제를 철거하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생각됩니다.

법원에서는, 어민의 마음을 헤아린 판단을 해 주시도록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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