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사태가 기-승-전을 거쳐 결로 치닫고 있다. 진실게임은 형식적인 확인 절차, 또는 법적 절차만 남겨놓게 되었다. 더 이상의 반전은 없을 듯 하다. 황우석 사태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는 병리와 고통의 크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PD수첩은 진실게임에 나섰을 뿐이지만, 황우석 사태는 거짓을 넘어 우리 사회 반동의 지배코드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낱낱이 보여주었다.
▲ 삼성 본관 |
올해 우리는 연속성을 갖는 다른 두 개의 사건과 조우했다. 'X파일'과 '황우석'은 서로 다른 계기로 폭로되었다. 그런데 출처가 동일할 뿐 아니라, DNA 지문도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시공을 초월한 두 사건이 비슷한 시기에 조우하게 된 것은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불행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반동의 지배코드, 그 작동시스템의 균열 때문에, 순전히 자유주의자들의 위기 관리의 한계에서 비롯된 해프닝이기 때문이다.
X파일이 8년 전 '정치-재벌-언론-검찰권력'이 권력재편을 앞두고 벌인 사건이라면, 황우석 사태는 국가-의료산업자본-언론-학원의 4자동맹이 만들어낸 신자유주의 권력 재생산 구조의 실체를 드러낸 사건이다. X파일은 '황우석'을 잉태했고, 8년이 지난 지금 황우석은 X파일을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X파일의 체세포가 황우석이라는 테라토마로, 완전한 줄기세포로 성장한 장면을 펼쳐보였다.
X파일은 자본가가 제공한 돈을 언론이 운반하고, 정치권력이 사용하고, 검찰이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시 검찰이 눈감고, 정치권력이 요구하고, 언론이 전달하고, 독점재벌이 돈을 만드는 시나리오를 보여주었다. 황우석 사태는 국가(정부)가 지원하고, 의료산업자본이 맞장구를 치고, 언론이 눈과 귀를 틀어막고, 학원이 결탁해서 연출한 제2의 X파일이다.
X파일 작동시스템 털끝 하나 안 다쳐
X파일은 우연하고 돌발적인 방식으로 세상에 유출되었다. X파일이 오픈되자 X파일에 연루된 등장인물은 아연실색을 했다. 그 공모자들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조치를 내리기 시작했다. 정치권이 특별법이나 특검을 거론한 것도 사태 해결 코스가 아니라 관리 코스였다. 독수독과라는 바이러스 퇴치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공소시효 이야기 나오고, 시간 벌기와 물타기 국면으로 이어지더니 이상호 기자가 순식간에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되어버렸다.
X파일을 작동시켰던 구래 시스템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상대는 초일류기업 삼성이고, 삼성과 결탁한 권력 라인이 펄펄 살아있는데, 그 골리앗에 맞서는 쪽은 그저 정의감만 충천해보이는 기자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공모자 내부의 균열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 그 이상의 기대를 걸지 못했다. X파일이 처음 열렸을 때부터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X파일 문제를 해결하고 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것은 익숙한, 너무나도 익숙한 지배정치의 작동메카니즘에 대한 본능적 직감에서 연유한다.
황우석 사태는 어찌될 것 같은가. 우리 사회가 황우석 사태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까? 훗날에는 어떠할지 몰라도 단언컨대 지금은 아니다. 황우석 사태는 황우석 교수와 황우석팀의 몰락으로 이어질 지는 몰라도 '황우석 사태'의 해결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진실은 이미 많은 부분 드러났고, 그리고 다 확인하고 갈 수 있다. 그런데 본질을 갖다놓고 격투를 벌이는 장면까지 연출할 수 있을까. 직감은 역시 회의적이다.
'진실' 파헤친 PD수첩, 그런데 상황은 수습국면
PD수첩 1차 방송 이후 황우석 연구팀과 PD수첩팀은 '진실'을 둘러싼 싸움을 벌였다. 한 쪽에서는 거짓에서 또다른 거짓을, 음모론에서 또다른 음모론을 확대하고, 한 쪽에서는 거짓과 음모론을 캐는 가운데 밀고 밀리는 싸움이 이어졌다. 시나브로 진실의 대강이 밝혀졌고 PD수첩의 완승으로 굳혀지고 있다. 그런데 웬일인가, '진실'이 속속들이 밝혀질수록 상황은 점점 더 수습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지 않는가.
국민들이 충격을 받고 허탈해 한다지만 이건 측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또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그 양질의 크기와 규모가 측정되지 않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뭐 저런 거짓말쟁이가 다 있나" 혀를 차거나, 어이없어 하는 정도인데, 언론이 '충격' '허탈' '당황' 어쩌고 하며 부추기는 건지도 모른다. 난치병 환자의 가족들이나 연구 성과 자체에 소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크게 낙담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이 얼마만큼 충격을 받고, 허탈해 하고, 당황해 하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건 또하나의 언론조작일 수 있다.
대한민국 과학자의 우수성과 국익과 차세대성장동력산업의 부가가치를 따졌던 사람들은 정말 큰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진실이 폭로되는 것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던 지배세력들, 말하자면 청와대와 여야정치인들, 황금박쥐와 이너써클들, 청부언론들, 학원의 공모자들, 광기의 추종자들의 충격일지 모른다. "헉, 이럴 수가! 어떻게 된 거지?" 또는 "어라, 어떻게 저렇게 드러날 수 있지?"
▲ 서울대 수의대 |
공모자들, 일사분란한 위기관리 모드 돌입
지배시스템을 작동하는 공모자들은 위기 관리 모드로 전환하고 신속한 처방과 조치를 내린다. X파일을 수습했듯이 황우석 수습에 나선다. 황우석 찬양 언론들은 자성한다는 각양각색의 코멘트 한마디씩 하며 빠져나간다. 스타일이 구겨지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청부언론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YTN.
"PD수첩이 검증하겠다는 것은 자신이 검증하는 것과 같다"며 그 말 잘하던 유시민은 어디 갔나. 손학규는 마지막까지 기회를 줘야 한다며 뒷골목 의리심이라도 보여주는데. 그리고 끄떡없는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MBC 짜증난다", "이제 그만 덮자"고 떠들던 노무현 대통령도 말짱하다.
농민 2명이 대낮에 맞아죽고 한 달이 넘도록 데모하고, 머리 깎고, 굶고 해서 경찰청장 한 명 겨우 끌어내렸다. 내려오며 질질 짜는 경찰청장의 소극을 보며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쌀비준안 통과시키고, 농림부, 외통부, 재경부 한통속이 되어 그 실무 집행을 작동시키는 것에는 흠집 하나 못 냈다.
길거리에 철철 넘쳐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조만간 비정규입법 국회 통과를 지켜봐야 한다. 조만간 로드맵도 넋 놓고 쳐다봐야 할 처지다. 국회 앞에 텐트 치고 죽을똥살똥 해봐야 대세를 뒤집기 어렵다. 단병호 의원과 민주노동당이 올인하고, 노동조합운동의 모든 역량이 다 모여 덤벼도 이미 판세를 뒤집을 상황이 아니다. 이건 비관이 아니라 현실 진단이다.
다시 X파일 잠깐 보자. X파일 처리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일이다. 8년 전 쉬쉬하며 비밀리에 작동된 지배시스템이 X파일이었다면, 오늘날 X파일 문제 해결을 자임하고 나선 지배자들은 공공연하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지배질서의 위력을 과시했다. 삼성공화국-신자유주의정권-중앙일보-검찰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 지배라인이 철옹성을 하고 있는데 이걸 한번에 무너뜨린다? 어림없다.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은 "X파일? 다 알고 있던 거다 그래서 어쩌게"라는 분위기였다. 황우석 사태 보며 "황우석? 뭐 저런 놈이 다 있나" 하고 넘어가는 거다.
PD수첩은 진실을 캐는 제 본연의 일을 했다. 기자가 직업상 본연의 일을 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게 현실이다. 말하자면 진실을 밝히는 투쟁 그 이상이 있는 것이다. X파일과 황우석이라는 두 사건이 조우하고 연쇄 폭발을 일으키는 사이에, 비정규법안과 쌀비준동의안이 물흐르듯 다뤄져왔다는 데 주목해야 할 이유가 이것이다. PD수첩이 열어놓은 물꼬를 터야 하는데, 진실을 밝히는 그 이상의 것을 해야 하는데 안타깝지만 이 계기나 결절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는 비관이지만 동시에 현실 진단이다.
황우석 사태와 진보세력
지배시스템을 유지하는 힘과 그 시스템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시도 사이에는 끊임없는 모순이 발생한다. 때와 사안에 따라 여러 유형의 계급투쟁이 작동한다. 지금까지 모든 관심은 거짓이냐 진실이냐, 즉 진실게임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황우석 사태의 본질이 무엇인가로 확장되지 않고 있다. 진실이 밝혀질수록 사태가 평화롭게 수습되는 이상야릇한 국면이 연출되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진실이 밝혀졌으니 평화협정을 체결하자, 이것이 황우석 사태에서 벗어나려는 공모자들이 내놓은 해법이고, 황우석 사태 과정에서 표출된 공분은 마치 X파일 때의 그것처럼 수렴되고 있다.
X파일과 황우석이 조우하는 동안 도대체 진보세력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미 알만큼 아는, 탓할만큼 탓한 진보세력의 처지를 어디까지 재론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지식인은 도대체 뭐 하는 작자들인가' 라는 메시지를 던진 한 연구자의 자성의 목소리를 곱씹는 걸로 대신하자.
다만 유감이지만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의 발언은 짚고가지 않을 수 없겠다. 황우석 사태가 절정에 이르던 시기, 진보정당이 사회적으로 던진 중차대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 황우석 청부언론 YTN [출처: blog.naver.com/dajung] |
12월 8일, YTN이 가공할 공세를 취하고, PD수첩의 존폐가 왔다갔다하는 시점이었다. 권영길 대표는 12차 비대위 브리핑 자리에서 "황우석 연구팀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보여준 빛나는 성과에 대해 당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냈다"고 말해버렸다. 주워담을 수 없는 말, 민주노동당은 그 말 한마디로 황우석 사태 국면에서 진보세력을 무장해제 시켜버렸다.
더군다나 "MBC 취재과정의 윤리 위반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적이다"고 해버렸다. 당시 어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지, 싸움의 성격이 무언지, 진보정당의 대표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도대체 신중함이라곤 엿보이지 않았다. 또 "연구성과의 진위 여부는 정치권이 아닌 과학계의 몫"이라고까지 내뱉었다. 유시민이 며칠 전에 했던 바로 그 이야기 논리 아니던가.
자주민보를 만드는 이창기 기자는 "민족 무시하면 민의 버림받는다"며 아이러브황우석에 버금가는 황우석 찬양을 해댔다. 밖에서 진보를 참칭하고 다녔을 걸 생각하면 소름이 오싹 돋는다.
'진실' 파헤친 용기있는 사회구성원들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을 거스르는 반신자유주의 정치운동이 반독재정권 투쟁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데다, 단숨에, 일거에 진보정치의 비약을 꾀할 만한 계기를 가지기 어려운 조건에 놓여 있다. 더군다나 변화하는 계급투쟁 지형과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의 위기 관리 능력이 커진 데 비해 노동계급운동은 후퇴하고 더불어 진보적 정치운동도 사회구성원과 정치적으로 정책적으로 호흡을 잘 이루지 못하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진보적 정치세력이 X파일과 황우석 두 사건의 조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냉엄하게 판단할 정치적 안목을 갖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비정규직 투쟁하기에 벅찬 노동운동한테 책임 탓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맞아 얻어터져 사지에 몰린 농민운동한테 손 벌리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이런 가운데 목숨 걸고 '진실'을 파헤친, 상식과 이성을 가진 우리 사회 구성원의 일부가 진보운동의 체면치레를 해준 건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들, 보건의료 활동가들, 젊은 과학자들, 인터넷언론 기자들, PD수첩팀 등이 보여준 용기와 실천은 참으로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웹에서 진실을 파헤치고, 난자매매를 비난하고, 여성의 몸과 인권을 주창하고, 기초과학 지원의 형평성을 제기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저널리즘의 발전을 공언하고,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해체를 요구하고, BT 투자 중단을 주장하고, 과학진실성위원회 등을 제안하는 노력들이었다. 진실과, 이성과 상식의 회복을 위한 사회적 발언이 꾸준히 이어졌다.
황색4자동맹체제에 파열을 내려면
우리 사회 민중들, 사회구성원의 다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자유주의와 싸우고 또 눈에 보이는 노무현정권과 싸운다. 초기에 적군인지 아군인지 구분이 불분명했지만 집권 3년차를 경과하며 많이 선명해졌다. 초기 혼란은 민주화세력과 자유주의자들이 8년 전 집권에 성공한 이래 우리 사회 정치적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도 사학법을 놓고 보수세력과 줄다리기를 하며 민주주의의 진전을 꾀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 이 자유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라는 초국적자본운동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반동의 역사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오늘날 이땅의 자유주의자들이 겪고 있는 비극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을 때려잡고, 아펙을 개최해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추동하고, 한미동맹의 반동적 사슬을 끊지 못한 채 파병연장안을 결정하는데, 이미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멈추지 못하는 중독 단계에 이르렀다.
이미 8년 전에 예고된 일이다. 그들은 X파일을 등에 업고 집권했고 지난 8년동안 '황우석' 따위를 만들어내며 우리 사회 지배세력으로 군림해왔다. 황우석은 황우석 교수 개인이 아니라 오늘날 반동의 신자유주의 지배시스템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자리잡아왔다.
▲ 청와대 [출처: 청와대 홈페이지] |
황우석 사태의 본질, 그것은 신자유주의 정치에 있다.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는 영리법인 허용과 사회보험 도입 추진으로 의료의 공공성을 파괴하고 그 자리를 산업화 논리를 주입해왔다. 권력의 핵심 브레인들은 이너써클을 만들어 자본과 투합했다. 국익을 앞세운 BT 투자와 차세대성장동력산업 활성화 구상은 단지 그런 사실이 있다고 짚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이 구조를 해체시키지 않는 한 '황우석'은 죽지 않는다. 쉴 새 없이 복제된다. 의료산업 분야에 제한되지 않는다. 노무현정권이 초지일관 강행해온 국정방향의 기조인 것이다.
'황우석'이라는 신자유주의 지배정치의 반동적 상징이 깨진 것처럼 앞으로도 신자유주의정권의 정치 위기는 예기치 않는 여러 곳에서 우연하게, 또는 돌발적으로 발생할 거다. 당장 현실 진단은 비관적일지 모르나 신자유주의 정치를 깨뜨리는 노력은 곳곳에 존재한다. 전통적인 계급대립과 동일한 속성을 띤다고 해도 좋고, 계급투쟁의 새로운 양상을 예고한다고 해도 좋다. 분명한 건 저들에게는 4자동맹이라는 낡은 지배시스템, 위기관리시스템 뿐이지만 우리 인민들에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이다.
서구 정당사를 뒤져보면 색깔과 관련한 재미있는 데이타를 발견할 수 있다. 갈색은 나찌즘, 검은색은 보수주의나 무정부주의, 붉은색은 공산주의, 장밋빛은 사민주의, 녹색은 탈물질주의 신좌파를 상징하고, 노랑은 전통적으로 자유주의를 의미한다. 노빠들이 노란색 옷을 입고 선거운동에 뛰어든 것이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는 모르겠다.
8년전 X파일을 등에 업고 이 땅에 황색 바람을 일으켰던 민주화 세력들, 황우석 신화를 만들었던 자유주의자들, 황색저널리즘에 노무현과 황우석, 그리고 노빠와 황빠, 어쩌면 이름조차도 저리 노란색 투성이더란 말인가. 아! 이 황색4자동맹체제에 파열을 내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