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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같은 나무, 리기다소나무

[강우근의 들꽃이야기](33) - 리기다소나무

지난 겨울이 추웠던 탓에 봄이 조금 늦다.


계곡엔 얼음이 드문드문 남아 있고 생강나무는 아직 꽃피지 않았다. 산개구리들만 짝을 찾아 흐느끼듯 울어대고 있다. 겨울 흔적이 다 사라지기 전에 소나무 얘기를 해야겠다. 소나무는 봄, 여름, 가을, 겨울 크게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늘 거기 있지만 겨울이 아니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넓은잎나무들이 잎을 다 떨구고 나면 소나무는 조그만 나무 한 그루까지 모두 모습을 드러낸다. 갑옷 같은 나무 껍질을 두르고 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소나무는 겨울 숲을 지키는 장수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소나무는 겉모습처럼 강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숲 속 소나무는 넓은잎나무와 자리다툼에서 점점 밀려나고 있다. 소나무는 공해나 병충해에도 약하다. 지난 해 소나무 재선충 때문에 많은 소나무들이 죽었다. 재선충 매개 곤충인 솔수염하늘소를 박멸하려고 많은 살충제를 공중에서 뿌려댔지만 소나무 재선충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살충제는 아마 솔수염하늘소보다도 애꿎은 다른 숲 속 동물한테 큰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솔수염하늘소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알을 낳기 시작하면 또다시 더 많은 소나무들이 죽어갈지 모르겠다. '소나무가 줄어들면 해충의 삶 터전이 악화되어서 해충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자연 그대로 두면 깨졌던 균형도 복귀되기 마련이다.'(「한국의 송백류」) 문제는 소나무에 의지해서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 삶 터전이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지 않은가.

같은 소나무 종류인데도 리기다소나무는 소나무와 참 다르다. 소나무가 귀족처럼 우아하다면 리기다소나무는 직장에서 퇴출당한 옆집 아저씨처럼 수염도 깍지 않은 부스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곁가지도 어수선하고 솔방울도 많이 달린 데다, 검고 거친 줄기에까지 제멋대로 삐죽삐죽 잎을 내밀고 있다.

리기다소나무는 옹이나 송진이 많아서 땔감 정도로 밖에 쓸모가 없다. 하지만 리기다소나무는 털털한 생김새처럼 성질이 까다롭지 않아 건조한 곳에서도 쑥쑥 잘 자라고 공해에도 강하다. 특히 소나무에게 치명적인 송충이, 솔잎혹파리, 재선충 따위에도 강하다. 리기다소나무는 이런 성질 때문에 헐벗은 산을 푸르게 하는데 쓰여 왔다. 리기다소나무는 일제 수탈과 육이오전쟁으로 민둥산이 되어버린 산을 푸르게 가꾸어낸 일등공신 가운데 하나다. 리기다소나무는 숲을 만드는 노동자 같은 나무였다.

지금 숲 속 리기다소나무는 볼품없고 쓸모없는 늙은 노동자처럼 남아 있다. 얼마 전 산림청에서는 경제 가치가 없다는 까닭으로 리기다소나무를 십 년에 걸쳐 연차적으로 베어낸 뒤, 참나무나 유실수, 약용수 따위 소득이 높은 나무를 대신 심겠다고 발표했다. 리기다소나무가 1907년에 북아메리카에서 도입되었다고 하니 이 땅에 들어온 지 내년이면 백 년이 된다. 백 년 동안 숲을 일궈낸 리기다소나무를 단지 경제 논리만으로 모두 베어내 버리려 한다니, 그저 어이없고 퇴출당하는 이 땅 노동자 처지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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