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5월 4일 평택 대추리 ‘학교’가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경찰과 군대의 폭력에 다치고 끌려가던 그 날에 아이 아빠도 머리가 깨졌습니다. 전날 밤 지역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간다는 전화를 받고 다치거나 연행되거나 둘 중 하나의 일이 벌어지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아이 학교 문제만 아니라면, 아니 그건 문제도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자는 아이를 깨워 그 밤 나도 대추리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속없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남편한테 왜 나는 못 가고 당신만 가느냐고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아이 혼자 외롭게 자게 내버려두고 나는 컴퓨터 앞에서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새벽까지 인터넷으로 대추리 상황을 지켜보다가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나보니 대추리는 국가의 폭력으로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있더군요.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혹시라도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없으면 할머니한테 가 있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대추리로 가지 못하면 국방부 앞에 항의 시위라도 가야겠다 싶어 서둘러 준비를 하는데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남편에게 전화를 해 보니 응급차를 타고 병원 가는 길이라고 하더군요. 머리가 깨졌다고요. 지난 3월 15일에는 목을 다치더니 이번에는 머리입니다. 몇 가지 물건을 챙겨 평택행 전철을 탔습니다. 평택역에 내려 병원 위치를 확인하고 택시를 탔습니다. 병원에 가 보니 다친 사람들 투성이었습니다.
한 열댓 명이 그 병원에 와 있더군요. 다들 머리에 땜방을 하고 있었습니다. 눈 바로 위를 돌에 맞아 시퍼렇게 아니 거의 시커멓게 멍이 들고, 얼굴이 두 배나 퉁퉁 부어 있기도 했습니다. 새벽 내, 아침 내내 국가의 폭력에 맨몸으로 맞서느라 지쳐 버린 사람들은 환자복으로 갈아입지도 못한 채 그냥 병원 침대 위에 쓰러져 죽은 듯이 자고 있었습니다.
전경이 던진 벽돌에 이마 위 머리를 맞아 여섯 바늘 꿰맸다는 남편은 윗옷과 바지에 피가 묻어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전경들한테 잡혀 집단구타를 당한 한 남학생은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얼굴이 부어있었습니다.
평화를 지키겠다고, 전쟁기지를 만들려는 세력에 반대하겠다고, 아름다운 땅 대추리를 지키겠다고 나선 이들이 가진 것은 오직 마음과 맨몸뿐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찍어 내리는 방패를 막을 그 무엇도, 얼굴을 향해 무자비하게 내려치는 곤봉을 막을 그 무엇도, 등짝을 밟아대는 군홧발을 막아낼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
국민을 향해 한 점 부끄럼 없이 폭력을 자행하는 노무현정권!
나는 그 정권을 믿지 않습니다.
평생 허리 굽혀 땀 흘리며 일궈놓은 살아 숨 쉬는 들판을 아무 주저함 없이 철조망으로 둘러친 세상!
나는 그 세상을 부정합니다.
깨진 머리를 몇 바늘 꿰맨 사람들은 짧게 한 숨 자더니 곧 병원을 나섰습니다. 자신들 아픈 몸보다는 철조망 둘러쳐진 대추리 황새울 들판이 더 아플 것이라 느꼈을까요. 무너진 대추초등학교 엉엉 우는 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렸을까요.
5월 5일, 어린이날 병원을 나와 우리 세 식구는 대추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이에게도 평택 대추리는 낯선 곳이 아니었습니다. 2004년 겨울 대추리에서 ‘들이 운다’ 문화행사가 있을 때 하늘 높이 연도 날려 보고, 문무인상이 있는 저 쪽 들판까지 찬바람 맞으며 걸어도 보고, 아빠와 친구들이 만든 평화동산에도 가보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구름다리에 매달려 잘난 채도 해 보고, 그렇게 눈에 익혀 놓은 곳이 대추리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따라다닐 때 좋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가면 좋아했지만 대추리 아닌 다른 곳도 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왜 꼭 대추리냐구?” 하는 말을 가끔씩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이가 5월 5일 어린이날도 대추리에 갔습니다. 다행히 그때까지는 ‘어린이날인데 어디 가자’ 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본정리 농협으로 가지도 못하고 길이 막혔습니다. 그 길이 열려 본정리 농협 앞으로 갔습니다. 다시 그 길이 막히고, 길을 열고, 길이 막히고, 길을 열고. 무슨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길을 열어주기도 하더군요.
한 할아버지께서 밭에서 일을 하시다 우리를 보고 말씀하십니다. “대추리로 가려면 저쪽을 돌아가면 돼. 그쪽은 안 막고 있을 거야.” 그렇게 길을 알려주십니다. 할아버지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할아버지께서 하시지 않은 말씀을 귀 기울여 봅니다. ‘어서 가 봐. 가서 힘을 모아 줘.’ 이런 말씀을 하시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왜냐면, 할아버지는 5월 진초록으로 나뭇잎들이 물드는 이 때, 봄볕 따뜻하게 가슴에 내리쬐는 이 때 시커먼 군홧발들이 논을 짓밟고, 밭을 짓밟고, 사람들을 짓밟는 것을 보고 가슴 쓸어내리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들을 따라 걷고, 달리고, 빙돌아 대추리를 찾아 갔습니다. 저쪽이 대추리라는데 아이가 말합니다. 사람들은 빙 돌아가더라도 우리는 그냥 논으로 쭉 가자고. 그러면 더 빠르지 않느냐고. 가는 길 힘들지만 순간 순간 아이는 신나기도 했나 봅니다. 그러다가는 지치기도 해서 업어달라고 합니다. 포대를 하나 얻어서 거기에 태워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한참 가니 문무인상이 나오고, 더 걸으니 평화동산이 나옵니다. 철조망이 점령한 땅이지만 그 날도 일을 나온 마을 주민들이 오는 사람들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와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눈에 땀이 흘러 들어갔는지 눈이 무척 매웠습니다. 고립시키려고, 차단시키려고, 막으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길을 만들고, 찾을 것입니다.
한숨 돌리고 아이와 무너진 대추초등학교로 가 보았습니다. 한 주 전 일요일, 그러니까 4월 마지막 일요일에 아이가 두 팔 짱짱하게 매달렸던 구름다리는 땅에서 뽑혀져 벌러덩 누워있더군요. 아이가 얼굴은 사자고, 몸은 호랑이라고 했던 사자상도 제자리에 있지 않았고, 구름옷을 입고 있던 소년상은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아이는 울지는 않았지만 울먹이는 듯한 소리로 말하더군요. “학교를 찾을 수가 없잖아.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잖아.” 운동장 끝에 있던, 살아오면서 그렇게 예쁜 민들레는 본 적이 없었을 만큼 싱싱하게 피어있던 민들레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이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주민들이 만들었다는 학교. 학교를 만들기 위해 돈을 마련하고, 터를 닦고 공을 들였을 시간이 무수했을 텐데 정부는 순식간에 학교를 무너뜨렸습니다. 학교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오열 하는 할머니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 눈물은 말 그대로 피눈물일 것입니다. 그 늙은 할머니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이 나라의 총리는, 이 나라의 국방부 장관은, 이 나라의 정치가라고 하는 인간들은 대추리를 향해 자신들이 지금까지 쏟아왔던 말들이 부끄러워 땅으로 숨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우리는 압니다.
무너진 학교 건물 잔해 위로 누군가 ‘평화’라는 두 글자를 써 넣은 깃발을 꽂아 놓았습니다. 정부는 전쟁기지를 만들어 평화를 구하려고 하는가 봅니다.
정부는 막강한 무기들로 평화를 얻으려고 하는가 봅니다.
정부는 전쟁을 통해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가 봅니다.
전쟁기지와 전쟁무기, 군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포와 불안, 두려움을 안겨줄 뿐입니다.
사람들이 논에 둘러쳐진 철조망을 끊으러 갔습니다. 아이와 나는 청색 옷을 입은 경찰도 보고, 얼룩덜룩 군복을 입은 군인들도 보았습니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막대기로 때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군인들이 그냥 논바닥에 사람을 패대기치고 그 위로 깔고 앉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 아이는 군인을, 경찰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학교에서 시험 문제에 군인들이, 경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문제가 나온다면 우리 아이는 그 문제를 틀리거나 거짓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군인은, 경찰은 아무런 자위 수단이 없는 민간인을 때리고, 잡고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생들이 “주한미군 몰아내자”라는 구호를 외치니 아이가 묻습니다. “저기 있는 군인들이 미군들이야?” 아니고 우리 나라 군인들이라고 하자 “미군만 없으면 이러지도 않을 텐데 왜 우리가 미군들 때문에 여기 와야 하냐고?” 합니다. 논에서 군인들과 사람들이 대치하자 조금씩 아이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기나 봅니다. 아이를 데리고 온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안 보면 모를 텐데, 아이가 충격을 얻어가지는 않을까, 내가 너무 섣부르게 생각한 것은 아닌가 여러 생각이 순식간에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눈앞에서 보지 않았다고 해서 이 일이 없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같은 시간, 에버랜드이거나 서울랜드, 혹은 어느 극장, 어느 패스트푸드점, 선물점 그 어느 곳에서든 행복하게 어린이날을 즐기고 있을 그 어느 아이든 그 아이들 모두 대낮에 폭력이 자행되는, 전쟁기지를 제공하기 위해 농민들의 땅을 빼앗는, 평화는 무력이라는 잘못된 공식을 가르치는 이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폭력으로 평화를 말하는 이 나라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5월,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 같은 아이들에게 당신들이 물려주고 싶은 나라는, 당신들이 만들어주고 싶은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아이는 논두렁에 앉아 예쁘게 핀 작디작은 들꽃을 봅니다. 논에 대어진 물을 봅니다. 파란 하늘을 봅니다. 얼굴에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을 봅니다. 바쁘게 농사일을 돌봐야 하는 이때, 날과 시간의 흐름에 민감한 농사가 아니던가요, 이런 때 평생을 일궈온 땅을 빼앗으려 하고, 평생을 해 온 일을 빼앗으려 하고, 이 들판에서 만났을 들꽃과 새들과 바람을 떠나라 합니다.
아이가 무섭다고 해서 우리는 논을 나왔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걱정되어 마음이 시무룩하기만 합니다. 마을로 돌아오고, 더 있자 사람들이 돌아오고, 정리하는 모임을 합니다. 하루 종일 걷고, 처음 보는 장면들을 눈으로 본 아이는 피곤했든가 봅니다. 낮에도 컵라면으로 배를 채웠는데 저녁도 안 먹고 그냥 잠이 들었습니다. 12주 동안 대추리에서 다양하게 움직인 문화예술인들과 노인정에서 마련한 밥을 가져다가 먹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정리 집회를 마치고 다들 돌아가고 있을 시간인데 전경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람들을 연행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먹던 밥과 콩나물국, 무생채를 그냥 두고, 잠자는 아이를 들쳐 업고 그야말로 피난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무조건 연행이랍니다. 미처 마을을 못 나간 사람들은 이곳저곳 숨을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참,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군사보호시설이라고요? 무단침입이라고요? 주민들의 말에, 국민들의 말에 제대로 귀 기울이거나 이야기 나누어보려고 하지도 않은 정부야 말로, 국방부야말로 평화로운 이 대추리 땅에 무단침입한 자들이 아닌가요? 통지서 하나로, 이주금 하나로, 소금물 배인 땅을 옥토로 일구어낸 이 땅을 빼앗아 미군기지로 만들려는 당신들이야말로 무단침입자들 아닌가요?
마을에 들어와 있는 지킴이집들을 무조건 칠 것이라는 말에 먹던 밥을 그대로 두고 불을 끄고, 자던 아이를 업고, 피할 곳을 찾는 사람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저 만치 눈앞에는 수십 대의 전경차가 서 있고, 새까만 군인과 전경이 마을 곳곳에서 길을 막고 서 있고. 사람들의 핸드폰으로 긴급한 상황이 문자로 들어오고. 이게 2006년 5월,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1980년 5월 광주가 흘린 눈물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았을 텐데요.
이웃 주민 집을 찾아가자 반갑게 맞아들여주십니다. 마루 한 가득 이불을 깔아주십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빗줄기는 금방 굵어집니다. 그야말로 단비입니다. 자연과 함께 하는 농사, 농부는 단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새벽 물꼬 터주러 일찍 일어나야겠구나 할 것입니다. 밤 1시가 넘어도 전경차는 그대로입니다. 들리는 말로는 사복경찰들이 왔다 갔다 한다는 소리도 들리고, 주민 집도 칠 것이라는 말도 들리고. 한참 있다 차가 빠지는데 한 45대 정도라고 합니다. 한 차에 50명씩이라고 한다면 2천 명쯤 된다는 소리이지요. 빗속에서 주민 아주머니들이 경찰들과 싸우는 소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졌습니다. 국가권력에 저항하지 않으면, 싸우지 않으면 국민들이 봉인 줄 알고 마음대로 할 터이니 이렇게 싸워야겠습니다.
아침까지 비는 내리고, 그 사이 상황이 나아졌는지 사람들은 가고 없습니다. 특히 학생들은 무조건 연행이라고 하는데 무사히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토요일, 아이 학교 준비물이 핑킹가위와 빨강색양면색상지였습니다. 아마 수업 시간에 카네이션을 만들려고 했나 봅니다. 밤늦게 돌아올지 몰라 아침 일찍 집에 준비물들을 챙겨 놓고 왔지요. 하지만 아이는 어버이날 저랑, 남편에게 달아줄 카네이션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아이들 학교 갈 시간에 맞추어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사실 그대로는 말하지 못하고 지방에서 아빠가 다쳐서 병원에 왔다가 늦어서 가지 못했다고만 말씀드렸지요. 거기까지는 거짓말은 아니니까요.
아침 빗길에 주민 아주머니 한 분한테 차를 얻어 타고 대추리를 나오는데 여전히 곳곳에서 경찰들이 검문을 합니다. 아무도 여기 있으라고 붙잡는 사람 없는데 그냥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하루 있었던 병원에 가서 맡겨놓았던 짐을 찾고, 꿰맨 자리 치료를 받고 차를 탔습니다. “이제 집에 가는 거지?” 하는 아이에게 어린이날 선물로 비디오 2개 빌려주겠다고 하고 우리는 분당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대추리에 왔던 아는 분이 연행되어 분당 경찰서로 끌려간 것입니다.
철망을 자르던 대학생을 잡아 밧줄로 꽁꽁 묶어가던 군인에 항의하던 기륭노조 조합원을 군인이 끌고 가려해 항의했더니 다 끌고 가 버린 것입니다. 서너 시간을 알 수 없는 봉고차에 감금시켜 놓고, 화장실에 가자고 해도 그냥 논바닥에 누라고 하고, 핸드폰으로 통화한다고 빼앗고 때리고 그랬답니다. 언제 집에 가냐고 짜증내던 아이가 고속도로에도 택시가 다니냐고 그렇게 궁금해 했는데 자기가 택시타고 고속도로를 가니까 기분이 째졌나 봅니다.
웬만하면 가까운 곳에 가둬놓지 어째 그리 멀리도 끌고 갔는지. 이래저래 우리는 전쟁으로 이 세상을 유지하려는 세력들 때문에 많은 것을 뺏깁니다. 5월, 따뜻한 볕 아래 사랑할 시간도 뺏기고, 아이와 뛰어 놀 시간도 뺏기고, 없는 살림에 돈까지 뺏깁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평화라는 것을, 민주주의라는 것을 지금 송두리째 뺏길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것이 두렵습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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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정 님은 르포,극작가로『숨겨진 한국여성의 역사』,『내일로 희망을 나르는 사람들』등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