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4일 국방부에 무너졌던 평택 대추리 솔부엉이 도서관이 5월28일 재개관하자 아이들은 신이 났다. 어른들도 흥겨운 개관식을 갖고 솔부엉이 도서관이 영원히 지켜지기를 기원했다. |
아기염소 벗을 삼아 논밭길을 가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
나는 야~~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흙에 살리라
정태화 할아버지의 구성진 노랫소리가 28일 새로 개관한 대추리 솔부엉이 도서관 앞마당에 울려 퍼졌다. 막걸리가 돌고, 머릿고기와 떡에 아이들과 주민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흥겨움 속에 정태화 할아버지는 “나이를 많이 먹고 나서 컴퓨터를 쪼끔배웠어요. 컴퓨터로 인쇄해서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며 고향의 봄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진달래” 그리고 이어진 노래는 ‘흙에 살리라’였다. 어느새 주민들의 눈가에는 눈물이 살짝 맺혔다. 주민들에게 미군기지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일은 특별한 결의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고향에서 살고, 흙에서 살겠다는 것이다. 고향을 버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 개관식에 모이는 마을 주민들 |
지난 5월 4일 국방부의 폭력적인 행정대집행으로 폐허가 된 대추초등학교는 주민들의 꿈이었다. 미래 세대를 키우기 위한 교육의 공간. 그것이 학교였고 학교는 삶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이날 새로 도서관을 연 진재연 솔부엉이 도서관장은 “5월4일 초등학교가 무너지고 나서 주민분들이 많이 상심하시고 가슴에 피멍드는 경험을 하셨어요. 그 이후 마을에 철조망이 쳐지면서 주민들이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많이 힘이 드셨다”면서 “솔부엉이 도서관을 다시 만든다는 것은 국방부가 아무리 파괴해도 우리는 다시 새롭게 만들고 마을을 지키겠다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도서관을 다시 만들자 가장 기뻐한 것은 역시 주민들. “도서관을 만드는데 주민들이 직접 책장을 만들고 문도 고쳐주셨어요, 누구보다도 도서관을 새로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기뻐해 주셨어요. 앞으로도 마을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을 잘 지켜 나가겠습니다”
축사에 나선 이상렬 도두2리 이장은 “대추초등학교가 부모님들의 힘이 약해서 국방부로부터 쓰레기더미로 되어 있지만 하느님이 내려 보시는 가운데서 행한 이 일이 정당하다고 생각치 않을 것”라며 “우리 부엉이 도서실이 어린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공간과 학교에서 귀가해서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영구히 되었으면 고맙겠다”고 전했다.
개관식에 참가해 노래도 불렀던 정태화 대추리 노인회장은 “국방부가 헐었지만 다시 이 곳에 영원한 도서관을 차려서 감사하다”며 “도서관이 영원히 오래갈 수 있도록 많이 힘을 모아달라”고 말했다. 도서관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마을도 영원히 존재할 터. 올해 10살인 신연수 어린이는 "초등학교가 부서졌을때 너무 슬펐다“면서 ”우리동네가 힘을 모아서 다시 초등학교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추리 명가수 이민강 할아버지도 마이크를 잡았다. 이민강 할아버지의 부인은 지금 병원에 입원한 상태라고 한다. 지난 5월4일 학생들을 끌어가는 경찰을 제지하다가 경찰이 할아버지의 팔을 비틀고 발길로 차는 모습을 보고 뇌수술 받았던 것이 재발되었다. “재발이 되는 건 문제가 아니라 20일 동안 중환자실에 있는데 사람을 몰라보는 거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런데도 어제 무난히 아들 장가를 보냈어요. 장가도 못보내고 홀애비 되는 줄알고....” 그리고 ‘눈물을 보였나요, 내가 울고 말았나요’ 라며 노래를 흥겹게 불렀다.
▲ 정태화 할아버지의 노래소리가 솔부엉이 도서관 앞마당에 퍼졌다. |
아이들의 공연도 이어졌다. 그리고 한 아이의 편지.
“저는 대추리 사는 김선민입니다. 도서관을 잘 지키기 위해서 마을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 지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5월4일은 경찰들이 들어와 마을을 시끄럽게 했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제가 다니던 군문 초등학교로 전학간 후 맞이하는 첫 운동회였습니다. 그런데 경찰들이 길을 막아서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이 경찰과 싸우는 것을 보고 운동회를 가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대추리를 직접 손으로 메워서 갯벌을 농토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어렸을때 할아버지 할머니랑 같이 밭에 나간 기억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맨날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 땅을 꼭 지키려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 도서관을 함께 짓고 촛불집회 하면서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여전히 아이든 노인이든 할 것없이 마을을 떠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강제행정대집행에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는 더욱 커져 있다. “왜놈들 갈 때 또 쫓겨났는데. 그땐 맨주먹으로 그냥 나온겨. 지금에 와서 또 나가라는데 지금은 다 이렇게 살만하게 해놓고 있는데 우리네가 분통 터져서 나가? 즈히 넘들이 사람이 방에 앉아 있는데는 못 때려부수겠지. 들판은 저 지랄 했지만서도 우리가 사는 집은 사람이 들어 앉아 있으면 때려 부수지는 못하겠지. 내 지금 생각 하는 건데 이놈들이 달려들어서 강제 집행한다고 개지랄 하는디 때려부실라나 모르지. 그래도 안 나가” 황필순 할머니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