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다 늦은 시간에 가려니 뭔 방법이 딱히 보이지 않더군요. 그래서 아이한테 “내일 아침 일찍 가자. 점심도 싸 가고, 물도 얼려서 가지고 가자.”고 했죠. 그러고는 공책에 적었습니다. ‘내일은 소풍이다.’ 소풍이라니, 대추리로 가는 길이 얼마나 중요한데 가볍게 소풍이라니, 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래도 내일은 걷는 게 일이고 저항일 것 같다’라고 적었습니다. 나의 저항은 걷는 것. 걸어서 끝까지 대추리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못 가게 막는 길이라면 가볼 수 있는 데까지 걸어보는 것이지요. 아니, 가볼 수 있는 데까지가 아니라 어떻게든 걸어서 대추리에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걷는 거 자체로 나는 저항해보겠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무수히 걸어 만든 길을 따라서.
6월 18일 일요일 아침, 새벽 일찍 출발한다고 했는데 마음처럼 그렇게 안 되더군요. 점심으로 싸가자고 사 놓은 유부초밥 재료는 만들어서 아침으로 다 먹어 도시락은 없이 얼린 물만 두 병, 가방에 넣어서 아이와 집을 나선 게 낮 1시가 넘었습니다. 지금 가 보았자, 라는 생각도 들고, 어딜 가려면 부지런해야 하는데 이래서야 원, 이라는 생각도 들고, 참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도 가자, 하고 아이와 길을 나섰습니다.
후배에게 연락을 해 보니 일이 있어서 못 갈 상황인데 안 가고 있으려니 마음이 불편해서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려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나나 후배처럼 뒤늦게 출발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을 겁니다. 안 온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고, 기다려 주는 대오나 깃발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닌 사람들, 혼자 멋쩍게 길을 나서야 하는 사람들, 마치 나 같은 사람들이 여럿 있을 겁니다. 먼저 도착한 후배는 둔포 쪽으로 간다고 하더군요. 늦게 도착하는 우리를 차마 기다려 달라고는 못 하겠더군요.
평택역에서 내려 평택 극장 앞 버스 정거장으로 갔습니다. 그 길을 가는데 아이가 “여기 그때 왔던 데잖아?” 합니다. 아이는 평택 역 앞에서 택시를 타 본 적은 있어도 여기로 와 본 적이 없는데 싶어서 “아니야, 여기 너 오늘 처음 오는 데야.” 했더니 “지난번에 아빠 안경 때문에 이쪽에 왔잖아?”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오던 길을 뒤돌아보니 그 공간이 확 눈에 들어옵니다.
작년에 평택 역 앞에서 집회가 있었고, 그때 아이와 함께 세 식구가 왔다가 아이 아빠 안경테가 문제가 생겨 급하게 안경점을 찾아 들어온 골목이 바로 평택극장 앞 골목이었던 것입니다. 6월초에 한번 혼자 와서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찾을 때 나는 이 거리가 영 낯설기만 했는데, 그리고 처음 온 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이는 시간을 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나 봅니다.
나와 아이에게 아무 관계가 없을 줄 알았던 공간에 우리는 그렇게 들어섰나 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땅 어디든 길이 연결되어 있듯이 그 길 위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모든 길과 땅과 이어져 있습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땅과 길이 아프면 사람이 아프고, 사람이 아프면 땅과 길도 마찬가지로 아플 것입니다.
대추리로 들어가는 16번 버스는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오늘 하루, 대추리로 가는 버스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택시를 불러 갈 수 있는 데까지 가자고 하고 싶지는 않더군요. 왜냐하면 오늘은 걷는 것이니까요. 20번 버스마저 못 간다면 평택역부터 걸을 작정이었습니다. 20번 버스가 옵니다. 행선지에 ‘안정리, K-6’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처음 타보는 20번 버스, 종점에서 내리면 그 다음은, 그 다음에 생각해야지 하며 탔습니다.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렸습니다. 내리니 경찰들이 죽 서 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슨 기도회 같은 걸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 기독교인들이 오늘 범국민대회에 이렇게 참여하나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무대에 걸린 펼침막을 가만히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문정현 신부님을 규탄한다는 문장이 적혀 있고, 대추리를 지키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뭐라고 하는 말들이 적혀 있더군요. 분위기가 참 묘했습니다. 사람들한테 절망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독여야 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가게에 들러 대추리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으려는데 조금 주저하게 되더군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런 두려움들을, 주저함을 이겨내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가게 주인에게 대추리 가는 방향을 묻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어쨌든 가는 길 내내 전경차와 전경들이 죽 서 있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습니다.
걷다보니 미군기지 정문 앞이 나옵니다. 그런데 미군기지 앞, 상가들이 늘어선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대추리 가는 방향을 묻기가 좀 그렇더군요. 아, 이제 대추리라는 말은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이다 라고 나타내는 표식 같은 것이 된 것 같습니다.
가도 가도 대추리가 안 나오니 아이는 어째 좀 이상하다고 길을 물어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길을 물어보려고 해도 사람이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건너편 전경들한테 길을 물어볼 수도 없고. 전경들이 계속 있는 걸로 봐서는 영 틀린 길은 아닐 것 같아 그대로 걸었습니다.
가는 길에는 새로 지은 집들이 많았습니다. 미군들에게 빌려주려고 지어놓은 집들이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문구를 영어로 쓴 펼침막들이 집 벽에, 혹은 집들 사이로 걸려 있기도 하고요. 아이는 그런 집이 멋져 보였나 봅니다. 한참 서서 눈여겨봅니다.
가는 길에 꽃을 보았습니다. 아이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예쁘다, 예쁘다” 했습니다. 꽃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나는 마침 그 옆에 작은 함바집 밖에서 뭔가를 고치고 있는 아저씨한테 꽃 이름을 여쭈어보았습니다. 접시꽃이었습니다. 참, 이름은 알고 있으면서 꽃은 모르는 나였습니다. 아니,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을 텐데 여태껏 이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 꽃뿐이겠습니까. 이름만 알 뿐 실재는 모르는 것이. 머리로만 생각할 뿐 현실은 모르는 것이. 어쩌면 대추리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차례 발걸음하고, 오늘도 그곳에 가지만 여전히 나는 대추리라는 그 이름만 알고, 대추리를 머리로만 생각할 뿐, 그 실재와 현실은 제대로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접시꽃이라도 색이 갖가지더군요. 옅은 진달래빛, 붉은빛, 검붉은빛. 보지는 못했지만 노란빛과 하얀빛도 있다고 합니다. 오늘, 대추리와 마음을 함께 하기 위해 모여 있을 사람들도 이렇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한 길을 가지만 저마다 빛깔이 다다른 개인들. 빛깔이 다 다르기에 우리의 저항은 더 풍성하고 아름답지 않을까요. 그런데, 혹시라도 그 빛깔이 쉽게 무시당하거나 배제되거나 삭제당하는 그런 일은 없겠지요. 하얀 개망초가 무더기로 피어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건너편 전경들도 이 땡볕 아래, 지나가는 차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이 길에서 이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꽃을 바라보지만 꽃들도 사람들을 바라볼 것입니다. 꽃들은 우릴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꽃만 아니고 나무도 한 그루 눈에 띄었습니다. 나무가 엄청 큰데 나뭇잎들이 무슨 회오리처럼 나무줄기를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온통 감싸고 있었습니다. 뭔가 하고 가만히 보니 은행나무였습니다. 늘 보던 은행나무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은행나무가 아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오랜 세월 동안 맞은 바람과 볕이 저 은행나무를 있게 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아이가 그러더군요. 마을마다 저렇게 큰 나무가 한 그루씩 있는 거라고. 어디서 보고 들은 것인지 아이는 제법 재미난 말들을 한 마디씩 합니다. 당산나무에 대해서 들어본 것이겠지요. 마을을 지켜주던 당산나무들. 그 당산나무들이 곳곳에서 뿌리 뽑히고, 고향에서 쫓겨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 그동안 많았을 겁니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무작정 걸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대체 우리가 어디쯤에 와 있는 것인지 알고는 가야 할 것 같아서, 아주머니 두 분, 아저씨 두 분이 어느 집 앞에 앉아 계시기에 길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평상도 없고, 의자도 없이 사람들이 세 들지 않은 빈 집 앞 시멘트바닥에 앉아서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계셨습니다. 아저씨 한 분은 그곳에서 집을 짓는 노동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방향은 틀리지 않았더군요. 좀만 더 걸으면 네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왼쪽으로 쭉 올라가면 대추리 쪽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 봤자 길을 막아 못 들어갈 텐데라고 하십니다.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안정리 사람들이 오늘 범국민대회 반대 집회를 했다고도 합니다.
아까 버스 내린 곳에서 기도회 하는 걸 봤다고 하니 이 동네 교회 사람들 다 갔지, 라고 하십니다. 대추리로 갈 수 있는 다른 길이 혹시 있을까 싶어 물었지만 없다고 하십니다. 내 짐작으로 방향이 맞을 것 같아 건너편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가는 샛길 없나요, 했더니 거기는 길도 없고, 그 쪽으로 가면 미군기지라고 합니다. 논두렁으로 간다고 해도 다 막아 놓았다고 그러시더군요. 그러고 보면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그리고 기껏 내가 아는 길은 16번 버스가 가는 길, 그 길밖에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대추리로 곧장 가는 그 길입니다. 길을 막고 있는 전경들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은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들 앞으로 가야 했습니다.
네거리에서부터는 전경차 바로 옆으로, 전경들 바로 앞으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조금 놓인 것은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그곳에 아이들이 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 아이들한테도 죽 줄 서 있는 전경차나 방패를 들고 서 있는 전경들이 편할 리는 없겠지만 아이들은 놀고 있었습니다.
이제 거의 다 왔나 봅니다. 막고 있는 전경들의 차나 수로 보아도 그렇고 버스나 차로 왔을 때 눈에 익은 곳입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앞에 있는 전경들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비록 저 편에 전경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지만 그들을 애써 바라보지 않고도 올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더라도 그들이 먼저 나한테 말을 걸어올 것이며, 이제껏은 아무도 길을 막지 않았지만 이제부터 그들은 우리 발걸음을 막으리라는 게 분명했습니다.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도,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제 걸어서 들어간다고 했던 대로 우리는 꼭 들어갈 거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들한테 우리, 대추리에 동참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겠지요. 드디어 가로막고 있는 전경들 앞에 섰습니다.
“대추리 가려면 이쪽으로 가야 하나요?”
“어떤 일로 가시지요? 주민이시나요? 여기 사시는 분들만 가실 수 있습니다.”
“미술 전시회 보려고 서울서 왔는데요?”
참 난감한 표정이더군요. 대추리 안에 있는 농협창고에서는 지금 ‘조국의 산하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날 전시회 보러 왔다는 사람을 두고, 아이 데리고 여기까지 걸어왔다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해 하더군요. 자기 선에서는 안 되겠던지 한 사람을 더 부릅니다.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들어가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들어가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습니다. 곧 이어 다시 검문. 이번엔 처음보다는 좀 윗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까다로울 텐데 아이가 옆에 있어서일까요,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 세 번을 멈추었다가 이제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버스로 갔던 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몇 번 오면서 참 아름다운 길이라고 생각했던 그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길에 사람이 없습니다. 꽉꽉 막아놓고 못 들어오게 해 길은 길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걷지 않는 길, 좀체 오가는 차도 없는 길, 그 길에 대추리 쪽으로 나와 아이가 걷고, 반대편에서 전경들이 둘씩 짝을 지어 걸어옵니다. 우리는 걷지만 그들은 경계근무이겠지요. 마을이 나오는 고개에서 아이가 개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걸 발견해 개미굴을 찾겠다고 들여다보고 있는데 미군기지 안에서 무슨 음악 같은 게 나옵니다. 5시인가 보다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국기 하강식도 아마 5시였을 겁니다. 그게 몸에 익었나 순간적으로 5시가 나오더군요. 시계를 보니 맞습니다. 걸은 시간이 꽤 되지만 그래도 아이와 나, 아직 지치지는 않아 다행입니다. 아이가 길이 맞냐고 합니다. 나는 ‘레이돔’이라는 그 ‘얄읏한 공’을 바라보면서 “응, 맞아. 저기 얄읏한 공이 있잖아.” 했습니다. 가는 길에 밭에서 일하는 분 딱 두 분만 보고는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너른 들판을 양쪽으로 하고 길게 난 길을 걷습니다. 이제 거의 다 왔겠거니 싶은데 저 앞에서 또 막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뭘, 하는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납니다. 롤러브레이드 비슷한데 스키처럼 생긴 걸 타고 오는 사람이 있더군요. 아이와 나는 그 신기한, 처음 보는 탈 것을 보고는 웃었습니다. 그 사람이 앞에서 검문 당하더니 통과입니다.
우리가 그 앞에 서자 오늘 본 경찰 중에 가장 무섭게 생긴 경찰이 주민이냐고 묻습니다. 앞에서도 다 말하고 왔고, 들어가도 된다고 해서 왔다고 해도 쉽게 가라고 하지는 않더군요. 우리가 최초로 검문 당한 곳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길이 결코 짧지 않은 길인데, 우리를 막겠다니, 참. 막는다고 우리가 되돌아갈 줄 아나. 어쨌든 그곳을 통과해 오는데, 가는 길에 또 검문할 것이고, 여기와는 상관없는 곳이니 못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덧붙여 아이를 이런 곳에 데리고 오면 교육상 안 좋을 것이라고 제게 충고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에 오면 아이들은 맘껏 흙을 밟으며 뛰어놀 수 있고, 평화예술동산과 마을 집들 담벼락에서 갖가지 그림과 설치미술작품, 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철망이 쳐지고 파헤쳐져 울고 있지만 너른 들판을 볼 수 있고, 노래로만 불렀던 노을을 볼 수 있습니다. 유난히 크고 붉고 가까운 그 노을입니다. 거기에 사람과 사회와 역사까지도 살아있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대추리입니다. 곧 방학이 올 텐데 그동안 못 왔던 아이들과 어른들이 한번씩 다녀가면 좋을 것입니다.
이제 미군기지 철망을 옆에 두고 걷습니다. 미군기지 안에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다니는 차도 있고. 경계 서고 있는 전경들도 있고. 아, 이제 얼추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마지막 지점에는 군인들이 서 있더군요. 전경이 서 있는 것하고 군인이 서 있는 건 느낌이 다릅니다. 근 18년 동안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본 건 전경이었는데 군인을 본 건 올해가 처음입니다. 지금 대추리 땅에 군병력이 들어와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오늘의 대추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18년이라고 쓰고 보니 참 씁쓸합니다. 쉽게 편안한 세상이 오리라고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예전 스무 살 무렵의 내가 이 들판 어딘가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을 것이고, 예전에 지금 내 나이였을 어떤 내가 논두렁을 건너뛰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말입니다. 어쩌겠습니까, 할머니가 된 나이에도 이런 길을 걸어야 한다면 그때도 걸어야겠지요.
그렇잖아도 차 한 대 간신히 지나갈 좁은 길을 군인들이 거의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뒤에서 차 소리가 나기에 먼저 지나가라고 길 갓으로 비켜섰습니다. 그런데 차가 멈추네요. 타라고 합니다. 어, 이게 아닌데, 그냥 먼저 가시라고 비켜선 건데, 오늘 우리는 마을까지 끝까지 걸어가는 건데,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하면서 차를 탔습니다. 길이 너무 좁아 차가 그냥 가기도 그렇고 우리가 더 비켜 설 자리도 없어 얼떨결에 타고 말았습니다. 대추리 표지판이 걸린 마을 들머리에 까맣게 앉아 있는 전경들 앞으로 걸어오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끝까지 걷겠다는 계획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 무너져 조금 아쉽기는 했습니다.
농협 창고 앞에서 내렸습니다. 아이는 창고에서 전시하는 ‘조국의 산하전’ 작품을 둘러보고 창고 앞에서 작업 하는 화가도 보았습니다. 전시된 작품 중에 목판화로 찍은 작품을 보고는 “어, 그 아저씨가 만든 거다.”하며 들사람들 집에서 만난 목판화가 아저씨를 떠올립니다. 밖에서 화가가 건네준 용접용 보호구를 얼굴에 대고 타다닥 타오르는 불꽃들을 보았습니다. 무너진 대추초등학교 잔해를 가져다 만든 작품도 보고 철판을 잘라 만든 작품들도 보았습니다. 나무로 깎은 구름을 유독 갖고 싶어 하더군요. 속으로 좀만 작게 만들어서 주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면서요.
우리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의지가 아니라 이제 모든 게 끝날 무렵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마을에 들어온 때는 평화예술동산에서 제3차 범국민대회를 한 사람들이 도두리 쪽으로 갔다가 돌아올 무렵이었고, 밖에 있던 사람들은 촛불집회를 하기 위해서 평택역으로 가고 있다고 한 시간이었거든요. 단 두 사람, 여자와 아이쯤 들여보낸다고 큰일 나는 게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모하고, 대책 없고, 개인적이고…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다시 이곳에서 모인다면 그때는 평택역에서부터 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서울 내가 사는 곳에서부터 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속도와 양에서 나는 한참 뒤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게 내 모습인 걸.
걸어 들어가는 길이 전부였지 가서 뭐 하고 온 것도 사실 없습니다. 마을을 한 번 더 눈에 담아두고, 멀리서 어르신들 모습 한 번 더 보고, 바람 한 번 더 맞고, 나오는 길에 촛불집회에 가기 위해 함께 차에 탄 마을 어르신들 말씀 한 자락 얻어듣고, 그것이지요. 오늘 나의 저항은 가서가 아니라 가는 길이었습니다. 왜 걸어가야 하는지 이유도 묻지 않고, 덥다고 힘들다고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묵묵히 그 길에 함께 한 아홉 살 아이는 내 동지였습니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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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 51호에 같이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