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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들이 터득한 삶의 지혜

[강우근의 들꽃이야기](38) - 주름잎

봄풀들이 봄과 함께 져 버렸다. 둘레에서 자라던 냉이와 꽃다지는 씨앗을 다 흩뿌리고 누렇게 말라 꽃대만 앙상하다. 그렇게나 기세 좋게 자투리땅을 모두 차지하던 꽃마리, 갈퀴덩굴은 꼭 서리라도 맞은 듯 허옇게 세어 버렸다. 씀바귀는 꽃 피우는 일을 마치고 한가롭게 씨앗만 날리고 있다.

극성스레 뻗어나가며 자라던 봄풀들이 이렇듯 한순간 져 버리고, 지난 겨울부터 여름을 기다려 온 개망초 따위 여름 들꽃들이 무성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하얀 개망초 꽃이 빈 터를 덮고 그 아래 애기수영이랑 토끼풀이 어느새 수북수북 자라나 꽃을 피우고 있다. 빈 터 둘레에는 메꽃이 뒤엉키어 분홍빛 꽃을 피우고 있다.

이 초여름 들꽃 틈에서 지난 봄 내내 꽃을 피우던 주름잎이 아직까지 피로한 기색 없이 싱싱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주름잎은 한 곳에 무리 지어 자라는 냉이나 꽃다지 따위랑은 달리 서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란다. 또 주름잎 줄기는 별꽃이나 꽃마리처럼 넓게 퍼지지 않고, 꽃이 피고 지는 꽃대도 그다지 길게 뻗으며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주름잎은 어딘가 모자란 듯 비어 보이고 소박한 인상을 준다.


이런 소박한 풀에서 느낌이 전혀 다른 꽃이 피어난다. 주름잎 꽃은 겉이 보라색이고 안은 흰색인 통꽃인데, 안쪽 흰 바탕에 노란 점이 찍혀 있어 산뜻한 느낌을 준다. 공을 많이 들인 듯한 꽃은 소박한 인상과 부조화를 일으켜 조금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주름잎은 키가 아주 작은 풀이지만 공 들인 꽃 덕분에 벌이나 꽃등에가 많이 날아든다. 주름잎 꽃은 다른 들꽃에 견주어 그 모양과 색깔이 사뭇 다르다. 얼마 전 길가에 뚝뚝 떨어지던 오동나무 꽃을 꼭 빼어 닮았다. 물론 크기는 몇 십 배나 작지만 말이다. 도감을 찾아보니 역시 오동나무와 같은 현산과에 속하는 꽃이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주름잎일까? 주름잎 잎을 자세히 보면 이름처럼 주름이 져 있다. 주름잎이란 이름이 주름진 잎 때문에 붙은 거긴 하지만, 하필이면 예쁜 꽃을 놔두고 자세히 눈여겨봐야 보이는 주름진 잎에서 이름을 따왔을까? 봄부터 가을까지 싱싱하게 자라고 산뜻한 꽃이 쉼 없이 피어나는 이 풀에 주름잎이란 이름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주름잎 잎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아이 목욕시킬 때 보았던 손가락이 떠올랐다. 물놀이에 푹 빠져 물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는 아이를 건져내 닦을 때 보았던, 물에 불어 쪼글쪼글 앙증맞은 아이 손가락이랑 잎 모양이 닮아 보였다. 그렇게 보니 주름잎이란 이름이 잘 어울린 듯도 했다.

들꽃은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키를 낮추어 틈새에서 자라든 넓게 무리를 이뤄 자라든, 짧은 시간에 자라서 꽃 피고 열매를 맺든 긴 시간 끊임없이 꽃을 피워 많은 씨앗을 만들든, 들꽃은 홀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생존 방식을 터득해 냈다.

또 한편으로 들꽃은 홀로 살아가지 않는다. 한 가지 식물만 자라는 곳은 사람이 가꾸는 밭뿐이다. 밭작물은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한다. 들꽃이 자라는 곳에는 여러 풀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주름잎 둘레에는 질경이가 꽃을 피우고, 새포아풀이나 개미자리가 섞여 자라고, 개망초, 괭이밥, 다닥냉이 따위도 함께 어울려 자란다.

'스스로 서기'와 '함께 연대하기' 들꽃들이 터득한 삶의 지혜가 우리 삶에서도 여전히 필요하다.

농민 세바스티안은 이렇게 말한다. "투표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 예수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정치가가 하는 짓은 똑같이 다 할 것입니다. 자기 손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또 다른 농민 일다는 이렇게 말한다. "투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투쟁이란 남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폭력적인 것도 아닙니다. 투쟁이란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자기 손으로 해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투쟁할 수 없습니다. 연대하는 법을 배우고 함께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세계화와 싸운다(창비)」「녹색평론 79호」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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