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 주민들과 935일동안 함께 평화를 지켜왔던 지킴이들의 공연 |
935일 동안 매일 저녁에 모여 무엇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은 지독한 일상의 족쇄일지도 모른다. 촛불행사는 행사를 준비해야 하고 매일 사람이 모여야 하는 일상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행사가 끝날 때 승리라는 단어가 남아 있을 것 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의 공간이었다. 또한 어쩌면 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오래오래 살기위한 결의의 공간이이기도 했다.
효순이 미선이가 미군 장갑차에 죽었을 때 온 민중이 들었던 촛불은 다시 대추리라는 조그만 마을로 이어졌다. 국방부는 대추분교 안 비닐하우스에서 이어진 촛불행사를 두려워했고 결국 대추분교와 비닐하우스를 철거했지만 촛불의 외침은 농협창고 안에서 지속되었다. 촛불행사는 끝없는 희망을 만드는 공간이었고 기나긴 시간동안 동북아 군사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야만을 고발하는 공간이었다.
주민들에게 촛불행사라는 족쇄는 일상의 즐거움이었고 연대의 장이었다.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와 노무현 정부가 합작해 만들어낸 일상의 족쇄, 그 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던 대추리 촛불행사가 25일 끝이 났다.
▲ 대추리 타임캡슐에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넣는 주민들 |
마지막 촛불행사. 그것은 물리적인 족쇄가 풀린다는 의미지만 시간의 족쇄는 풀지 못했다. 다시는 대추리 농협창고에서도, 비닐하우스에서도 촛불행사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일상의 족쇄는 풀렸지만 그 족쇄는 평생이라는 시간동안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마음의 약속이 되어 남았다.
마지막 촛불집회의 절정은 사회단체 대표들의 발언도 매향제도 아니었다. 주민의 일상이 담긴 영상물의 상영이었다. 사회를 봤던 주민대책위원회 김택균 사무국장은 "우리의 935일에는 투쟁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라며 들소리 방송국이 만든 이 영상을 소개했다.
영상에는 고스톱을 치고, 술잔을 기울이고 함께 밥을 먹는 주민들의 일상이 담겨 있었다. 울고 웃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일상에는 언제나 촛불이 함께 하고 있었다. 영상이 이어지는 내내 주민들과 지킴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피었다.
"어김없이 촛불행사장으로 모여들던 935일간의 저녁은 힘들고 지난한 일상을 이길 수 있게 해준 힘이었다.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으며 함께 해 왔던 시간들과 촛불의 힘을 기억하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함께여서 즐거웠고 언제나 희망을 놓지 않으며 웃을 수 있었던 날들은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라는 영상 속 내레이션은 촛불을 치켜든 공간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소리. "오늘 촛불행사를 공식마무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촛불은 우리 땅을 다시 찾을 때까지 영원하리라 봅니다. 언젠가 이 땅을 찾을 것이고 내가 아니더라고 우리 자식들이 여기 와서 살기를 바라면서 마지막 촛불을 듭시다"
촛불을 치켜들고 나자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현실이 되었다. 초를 들어 올리고 나니 마지막 촛불 행사임이 실감 났다. 아니다 그전에 항아리 타임캡슐에 각자의 소중한 물건을 담을 때, 그 전에 기나긴 시간의 촛불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돌아볼 때, 아니 지킴이들이 마지막으로 모여 함께 노래를 부르던 도중 하나 둘 눈물을 흘리며 무대에서 나가 흐느낄 때, 그렇게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농협창고에 모인 이들의 마음에 영원한 시간의 과제로 돌아왔는지 모른다.
내 머리와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인정을 안해
이날 무대 위에 올랐던 보따리 학교 아이들은 "밝게 빛나는 초를 기억하고 저희가 어른이 되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습니다. 대추리의 마지막 모습을 저희 마음에 담으려고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기나긴 시간을 함께 마을에서 살아왔던 문정현 신부도 “주민이야말로 승리자”라며 “52년도에 쫓겨 날 때는 사진 한 장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타임캡슐, 매향제를 합니다. 두고 보면 속속들이 들어납니다. 그때 너희들은 부끄러운 놈들이고 우리 주민이야 말로 승리자라 이 말씀입니다”라며 촛불의 의미를 되새겼다.
“우리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싸움을 한겨. 이게 정당한데도, 우리가 언제 돈 많이 달라고 싸웠어? 인간의 기본적인 면만 갖추면 되. 왜 내 땅인데 지들이 가져가. 해명을 해야 할 것 아녀. 내가 백년대계로 해서 할 거면 그냥 줄 수도 있어. 근데 이게 아니야. 난 승복하는 게 아녀. 낼 모레 쫓겨나더라도 내 머리와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인정을 안해”
촛불이 꺼진 후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촛불 앞에서 토해낸 방효태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주민들의 촛불이 시간의 족쇄를 넘어 언젠가는 대추리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 "난 승복하는 게 아녀. 낼 모레 쫓겨나더라도 내 머리와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인정을 안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