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집으로 쓰던 노란 서류철 날개에 그렇게 견고딕으로 박아 붙이고, 절대로 잊지 말자는 주술을 걸듯 책꽂이에 꽂아두고 시를 썼다. 그리고 그 이름 아래 구속되어 있던 시들을 모아 두 권의 시집을 더 냈다. 그러는 사이, 세상은 더 악랄해졌고 더 양극화되었으며 더 우울해졌다.
나는 참여를 선택했다
80년대 초반, 민주주의니 뭐니 ‘이상한 시’로 등단이라는 걸 했을 때, 내게 시를 가르쳐주신 고등학교 때 선생님은 ‘외도를 했다’라는 표현을 썼다.
선생님이 외도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하였던 것은 우선은 시의 내용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 다음은 등단매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랬다. 순수니 참여니 논쟁이 아직 뜨거울 때 나는 ‘참여’를 택했다. 아니 택했다기보다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운명이었고 필연이었고 원죄와 같은 것이었다. 살아있는 한 풀어야 할 숙제였다.
그리고 아직도 거기 매달려 있으며, 적어도 시 쓰는 일을 멈춘다 할지라도, 사는 방식이나 사유의 틀까지는 바꿀 의향이 없다. 적어도 이십 년 이상 다져온 각오다.
산으로 간 글쟁이들
YS-DJ-노무현으로 이어지면서, 그 때의 수많았던 ‘글쟁이들’은 산으로, 전원으로, 황토집으로들 떠나갔다.
그들은 아주 급진적 우파가 되어 갔다. 우파로 사는 것에 멈추지 않고 좌파들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때론 그 공격이 치명적이기까지 했던 것은 그들이 획득한 ‘명성’이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그랬다.
혹자는 권력을 혹자는 명성을 혹자는 부를 얻었다. 학사는 석사를, 석사는 박사를 향해 질주했다.
그러는 사이 많은 이들이 죽었다. YS 때보다는 DJ 때에, DJ 때보다는 지금,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그렇게 죽어갔다.
그래서 환경이니 생태니 평화니 통일이니 민족이니 자주니, 그렇게만 쓸 수가 없었다.
애만 쓴 꼴이 됐지만 가족주의로 귀결되는 삶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사회적 책무
리얼리즘의 사전적 우리말 해석이 ‘사실주의’라거나, 리얼리스트를 ‘사실주의자’라고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이라고 쓰는 것은 그 한 마디가 포괄하는 의미가 너무 크고 넓기 때문이다. 아직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유효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세상이 지속되는 한 리얼리즘은, 적어도 ‘생각’ 있는 사람들이 글 쓰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행위가 세상의 변혁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깊어져야 한다.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 보다 날카롭게 벼리는 일, 그것이 작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나는 늘 작가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 고민한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모름지기 정답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작가 자신이다. 그래서 작가의 사회적 책무는 엄중하다. 그렇게 느끼는가 느끼지 않는가, 그것이 우파와 좌파를 나누는 하나의 경계가 되어야 한다.
나는 내가 속한 노동조합 내의 소위 ‘좌파그룹’에 속해 있다. 내가 좌파가 되고자 하는 것은 ‘내 입으로 말 한 것이나 내 손으로 쓴 글의 절반이라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책무 때문이다.
리얼리즘 문학은 좌파 작가의 필생의 과제여야 한다. 이제 문학이 곧 실천인 작가들만이라도 모여서 이 반민중적 자본의 역사를 멈추는 일에 나서야 한다.
작가들의 동맹이 필요할 때
작가들의 취약점은 이름이다. 작가들은 돈 되는 일에는 좀 등한해도 이름 내는 일에는 기꺼이 얼굴을 감추지 않는다. 그래야 ‘리그’가 형성된다. 그래서 꼭 경계해야 한다.
실천하는 작가들의 모임은 친목 모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단에 하나의 파벌을 만들거나 또 다른 권력으로 형성되어서는 정말 안 된다.
작가로서, 분명한 사회적 역할을 감내해 낼 수 있는 작가들의 동맹이어야 한다.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연대여야 한다.
분명한 노동계급적 관점을 가지고 글을 쓰는 작가들의 모임이 필요한 때이다. 이 때 오래된 논쟁, 이른바 NL이냐 PD냐의 시비가 있을 수 있겠지만, 논쟁이 격화된다고 해도 이것은 결코 무모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들의 연대를 통해서 천만을 향해 치닫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피폐한 삶을 내 문제로 껴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들의 현재 고민은 내일의 실천으로 형상화 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해방문학을 들춰본다
80년대에 경쟁적으로 노동을 팔고 민중을 팔아 작가가 된, 명망을 얻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가. 표지는 나달나달하고 속지는 누렇게 빛바랜 ‘노동해방문학’을 다시 들춰본다. ‘삶과 노동과 문학’이라는 부제를 단 ‘실천문학’을 다시 펼쳐본다. 격세지감이라고 묻어두기엔 작가들의 변화가 너무나도 무쌍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에 대한 기억에만 머물지 말고 남미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새김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리얼리즘 작가들의 포부여야 하지 않겠는가.
시인으로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 힘든 까닭은 남들과 똑 같은 노동현장을 살아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을 지면 위에 옮겨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해야 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이 땅 구석구석 삶의 나락에 처박혀 신음하고 있는 뭇 민중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아야 할 의무를 지녔기 때문 아니겠는가.
이 개 같은 세상
노동과 노동자를 대상화하는 글쓰기에서 벗어나 직접적인 연대로 함께할 때라야, 이 땅 리얼리즘 문학은 그 동안 못다 한 죄 값을 치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오류를 정정하지 못할 영영 돌아오지 못할 우파의 길로 떠나간 작가들을 대신하여 사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다시 리얼리즘이다. 날 선 작가들의 자기 선언을 기대한다.
최근 읽은 가장 감동적인, 삶에 힘이 되는 시가 있다. 김호철 ‘동지’가 자신의 글에 곡을 붙이고, 박준 ‘동지’가 입으로 부른 시 ‘이 개 같은 세상을’이다.
얼마나 내공을 닦아야 이런 글 한 줄 세상에 쏟아놓을 수 있을까···.
노동자의 피눈물 고여 붉게 물들여진 땅
죽도록 일만해야 목숨 붙여 사는 땅
생존을 위해 해방을 위해 노동자 피를 뿌리니
역사여 큰 소리 내어 답하라 이 개 같은 세상을
가녀리게 움틀거리는 야윈 풀잎의 노래
어둠 깊어갈수록 온몸으로 타올라
산맥을 넘어 성벽을 깨고 해방의 불을 사르니
역사여 큰 소리 내어 답하라 이 개 같은 세상을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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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소 시인은 1984년 [시인]을 통해 작품 발표를 시작하였으며 1985년[강원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논개가 살아 온다면](1987), [수업시대](1990), [반성문](1991), [다리 위에서 개천을 내려다보다](200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