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폐지없는 한반도 평화는 모순이다

[기고] ‘분단’의 냉전과 ‘국가보안법 폐지’의 열정 사이

해바라기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하릴없이 하늘만 쳐다본다. 코스모스는 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거리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이제 울긋불긋 고운 단풍이 하늘 아래 온산을 물들 채비를 하고 있다. 이런 날 산을 오르다 보면 하얀 쑥부쟁이, 노란 들국화가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인사를 한다. 정말 가을 풍경에 몸을 맡기고 한가로이 거닐고 싶은 계절이다.

그런데 바쁘다 보니 맘먹은 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짬을 내어 잠시 쉬곤 한다. 이때 그 동안 못 봤던 영화를 보곤 하는데, 최근 <전설의 고향>, <므이>, <검은집>, <해부학교실> 등 2007년도 상반기에 개봉한 대표적인 한국의 공포영화를 봤다. 영화 감상은 때를 놓치면 보기 어렵기 때문에 나중에 비디오테이프나 인터넷으로 보는데, 화면이 작으면 감흥이 떨어져 때때로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곤 한다. 게다가 한국의 공포영화는 서로 제살 깎아먹기에다 비슷하면서도 식상한 내러티브의 반복으로 시간을 낭비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유령보다 정말 끔찍하고 징그럽고 지겨운 유령이 남한사회에 60여 년 동안 배회하고 있다.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기점으로 지난 2007년 10.4 남북정상선언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많이 변했음에도 국가보안법은 단 한 줄도 바뀌지 않았다.

남한 사회 국가폭력의 대명사는 국가보안법이다. 개인의 내면마저 통제하고, 국가가 제시하는 가치관과 입장에 반대하는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도 반국가사범이 되어야 하는 국가보안법의 존재는 남한을 질곡과 고난의 땅으로 만들었다. 남한 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이 존재할 수 있는 양식은 국가폭력 질서가 용인되는 토양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국가보안법이 지킨 것은 ‘국가안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독재세력의 ‘정권안보’였다.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하여 지배세력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고 재생산하는 것이었다. 즉 국가보안법의 제정과 적용으로 해서 지켜온 국가와 지배질서가 친외세 민족반역자나 탈법·인권유린·부패·비합리적 행위자들의 기득권을 온존시켜주는 것이었다. 안보는 법률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법률적으로도 국가보안법만이 국가안보를 지키는 법률이 아니다. 국가보안법은 북의 대남전략 방어를 위한 수단이 아닌 남한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법으로 즉각 폐지돼야 한다. 시대가 변한 만큼 개정보다는 과감한 폐지가 필요하다.

시대가 많이 변했음에도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국가보안법 구속자 수는 2007년 9월 현재 158명에 이르고 있다. 남북 최고 지도자가 7년 만에 회담을 진행했음에도 국가보안법 관련 구속자가 증가하고 있고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분단체제의 모순적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국가보안법을 바탕으로 수사를 펼치고 있는 곳은 경찰청 보안수사대와 국정원, 기무사 등 3곳이다. 특히 각 지방경찰청에 소속된 전국 35개의 보안수사대는 국가보안법 사건을 집중적으로 ‘만들어내는’ 기구이다. 2006년 기준으로 경찰청 보안수사대는 소속 인원 2,232명인데, 이들 부서 가운데 57%인 20곳에서 2년 동안 보안사범을 한 명도 검거하지 못했다. 이들 공안부서들이 담당하는 사건의 88.6%가 노동관계법 위반으로 대부분 고용주의 임금체불 사건으로서 보안수사대의 역할이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미미한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최근 늘어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들은 대부분 공안기관들이 실적을 위해 만들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최근 국가보안법의 적용사례를 보면서 또 한 번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일심회 사건은 그 토록 말이 많았던 제7조나 10조가 아니라 제8조인 ‘회합·통신’ 조항을 적용하였다. 또한 사진작가 이시우 사건은 제5조인 ‘자진 지원’ 조항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였다. 물론 이들 사건들에게 국가보안법이 적용되는 법리의 구성과정이나 집행의 양상은 여전하다. 국가보안법의 유연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셈이다.

이들 사건을 통해서 여전히 국가보안법은 한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인 것을 확인하였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한물 간 과거의 법이 아니라 역사를 관통하는 오래된 문제이자 현재와 미래의 문제인 것이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집권세력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다고 국민들과 빈번히 약속하였지만 번번이 그 약속을 깨버렸다. 이들은 국가보안법을 보수 세력과의 담합을 위한 정치적 도구로 전락시켜 버린 커다란 죄를 저질렀다. 이들의 가슴에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다면 지금이라도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

지식인들에게 국가보안법은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이는 인류의 진보를 위한 절대적 조건인 진리를 탐구하려는 창조적인 인간 활동을 가로 막는 것이다. 학문의 자유는 국가의 문화발전이나 국민의 생활향상을 위한 정신적 토대이다. 따라서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인류의 진보가 가능하게 되며 언론.출판의 자유나 사상·양심의 자유 등 모든 정신적 기본권이 그 실질적 내용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학문은 인간정신의 귀중한 성과이며, 인류문화의 집중적 표현이기에 특별한 배려와 신중한 대응이 요청되며, 학문의 진보는 문화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기에 모든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오늘날 거의 모든 학자들이 사상표현의 전제로서 학문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보안법 폐지가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한반도가 평화와 화해의 길로 나가기 위해서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되어온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 수 없다. 현재 남북한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신뢰구축이다. 믿음은 말보다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효과가 있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서는 민간 차원의 교류와 남북 주민들 상호간의 신뢰와 연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2007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 쌍방은 서로를 적대시하고 협력관계를 가로막는 법과 제도를 전면적으로 폐기해야 할 것이다. 남북 화해.협력과 교류가 확대 강화되는 시대에 북을 적대시하는 국가보안법이 존재할 이유도 없어졌다. 또 남북이 서로 제도와 이념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문제도 정상회담을 계기로 더욱 진전되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은 단결해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말

배성인 님은 한신대 교수로, 본 지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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