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다른 ‘나’를 만나는 시절

[기획:촛불에 미치다]

“공유물부터 먼저 먹어 치우고 나중에 개인 걸 먹는 게 현명한 거야”
며칠 전 가족 모임에서 밥 먹는 중에 중 2짜리 큰 조카가 내뱉은 말이다. ‘엉, 이게 무슨 소리지?’라고 의아한 순간, 그 애 엄마가 거든다. “맞아. 탕수가 있을 때는 탕수부터 열심히 먹고 나중에 자기 짜장면을 먹는 거지?”

“이런, 얌체들!” 소리치려다 보니, 그게 아니다. “공유물부터 먼저 먹어치운다”는 말을 꺼낸 장본인인 큰 조카는 옆에 앉은 7살짜리 사촌 동생에게 먹기 좋은 부분을 열심히 챙겨주고 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 연신 양보하고 있다. 얄미운 맘이 뚝 가시면서 흐뭇하게 지켜본다. 그러다 궁금해진다. 어느 쪽이 진짜 조카의 모습일까?

지난 몇 달간 궁금했던 건 촛불 속에 있는 ‘나’들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였다.

맛난 반찬부터 먼저 열심히 골라 먹고 맨 나중에 자기 국을 먹겠다는 정신으로, 아등바등 누군가를 밀어내고 자리를 확보해야 하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부대끼며, 학교건 병원이건 어디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요, 이윤을 많이 내는 게 최고라고 여겨왔다.

경제만 잘 된다면야 흠 있어도 돈 버는 능력 있는 자를 선택해야지, 도덕적이면 뭐해 그게 다 무능력의 상징이지, 공공재가 어찌 됐든 일단 내 집값만 오르면 돼, 표현의 자유 같은 건 잘나가는 지식인들의 단골메뉴지 나와 무슨 상관있겠어, 환경은 먹고산 다음에 생각할 일이지, 경찰이 폭력을 행사하는 건 공공의 적을 상대하려면 어쩔 수 없지, 교통방해의 주범인 시위 같은 건 거리에서 사라져야 해, 광우병 쇠고기·비정규직·미친 교육·대운하 등등 골치 아픈 일들이야 전문 운동권들이 나설 일이고 나야 무슨 할 일이 있겠어, 사회단체들이 그렇게 외쳐댈 때는 본 척도 안 하던 시민들이 갑자기 웬 민주투사가 된 거야, 촛불을 너무 띄워 주기만 하는 거 아냐? 난 촛불이 불편해…

이들 속 어디에나 1/n 정도의 ‘나’의 모습이 있다. 그런 ‘나’가 또 다른 ‘나’를 만난다.

물 있습니다. 목마른 분 물 드세요. 김밥 있습니다. 필요하신 분 드세요. 우리가 너무 빨리 물러나면 물대포 앞사람들이 위험해요. 자리를 지키면서 천천히 빠집시다. 이야, 저 구호 정말 기발하다. 정말 속 시원한데

저 방송차 정말 싫다. 뭐, 조중동이 보고 있으니 쓰레기 주우라고, 우릴 뭐로 보는 거야? 우리 여기 놀러 나왔습니까, 우리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나요? 이제 촛불을 접었으면 한데, 지들이 시작한 것도 아닌데 접긴 뭘 접어, 종이비행기야?

난 ‘나’를 훌쩍 벗어나 또 다른 ‘나’가 되어 외친다.

입시교육 옛날에 졸업했고 사교육 시킬 자식도 없는 ‘나’, ‘나는 미친 교육을 거부하는 청소년이다, 미친 교육 심판하자!’할 때 목소리 커진다. 옛날에 채식주의자로 전환한 ‘나’, ‘광우병 쇠고기는 내 문제’라고 선언한다. 인터넷에 댓글 달아본 경험 전무하고 댓글 문화를 혐오하는 ‘나’, ‘인터넷 표현의 자유 보장하라’고 댓글 달기 시작한다.

절반이 비정규직이라는데 나만은 아닐 거라고 여겨온 ‘나’,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하자’에 가슴이 울렁인다. 언제는 병원이 돈벌이 안 했나, 보험 들어 두는 게 최고라고 여겼던 ‘나’, ‘의료 민영화 반대한다’고 힘준다. TV 뉴스, 시사프로 따윈 보지도 않는 ‘나’, ‘공영방송 사수하자’는 또 다른 내가 된다. 박봉에 고생하는 경찰들이라고 혀차던 나, ‘경찰 폭력 물러가라, 경찰이 용역 깡패냐’며 온몸이 분노에 떤다.

수많은 또 다른 나를 만나다 보니 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죽기 살기 투쟁을 되돌아보게 된다. 너도 나도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인간이고, 그러하기에 너도 나도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인간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에 대해 자주적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릇된 걸 바로잡기 위해 손잡을 수 있는 인간이란 느낌을 갖게 된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바쁘게 돌아가는 시계를 가진 한국 사회의 그렇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 멍청한 시계를 부수고 스스로의 시간표를 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릴 권리의 폭과 깊이를 설계하고 싶다.

그런 나는 양심선언을 하는 의경이 되고, 새벽녘까지 거리를 지키는 투사가 되고, 다음 단계에 무엇을 해야 할까 골몰하는 전략가가 되고, ‘때려라, 찍어라, 잡아라, 돈 물려라’는 정권의 폭력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강한 진지를 구축하려는 양심이 된다. 지금은 수많은 다른 ‘나’를 만나는 시절, 그래서 진짜 내가 되는 시절이다.
덧붙이는 말

류은숙 논설위원은 인권연구소 ‘창’(http://khrrc.org)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