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 그냥 가라

[이수호의 잠행詩간](28)

그냥 가라, 거기가 어디든
혹은 이름 모를 산새 울음이나
하염없이 흐르는 계곡 물소리
바위 위에 하얗게 부서지는 벌거벗은 햇살
광천 앞바다 시뻘겋게 일렁이던 노을
따위 발에 밟혀도
흔들리지 마라
눈물 보이지 마라

꼿꼿이 가라, 거기가 어디든
펄럭이는 구차의 깃발
빛바랜 낡은 구호
휘날리는 온갖 선전물의 쓰레기
흐물흐물 썩어가며 풍기는
낡은 이념의 비린내
아 한 때는 은어 떼처럼 반짝이며 빛나던 여울
억울해도 울음이 나도
그냥 가라
뒷모습 두려워마라

조용히 가라, 거기가 어디든
어느 날 씀바귀꽃 노랗게 피고
그 꽃 소리 없이 지고
꽃 진 자리마다 하얗게 홀씨 날리고
산 비알 돌 틈
그렇게 홀로 왔다 간들
누가 외롭다 하리
그리움이 붉게 물드는 저녁
북받쳐 눈물이 흐르면
그 뜨거운 행복
나누고 싶은 마음 안고
아련히 떠오르는 얼굴 있으면
그 이름 고이 품고
가라, 그냥 가라

*처음 먹은 마음 변치 않는, 그런 소신 있는 사람이 그립다. 그런 네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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