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전쟁에 따른 파괴와 폐허의 흉터가 거의 복구되고 도시가 발전하면서 사회구조는 또다시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 농촌경제의 몰락과 피폐화를 대가로 하여 추진된 산업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시로 몰려든 이농민들의 대부분은 산동네와 이른바 무허가 판자촌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여 생계의 터전을 닦게 되었다. 1960대 중반부터 15년 동안 서울의 인구는 489만3500여 명이 증가했다. 이는 하루 평균 894명의 인구가 15년 동안 꾸준히 도시로 유입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의 1960년 통계청 자료를 살펴보면 서울의 주택 75,804동 가운데 16.4%가 움집이나 판잣집이었을 정도로 주거문제가 심각했다. 주거문제 못지않게 실업률도 6.8%로 늘어났으며 이에 따른 도시의 취업문제도 갈수록 악화하였다.
따라서 농촌에서 유입된 인력들은 당장 현재의 생계를 위해서라도 소자본의 노점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대 도시 곳곳에 노점상들은 급속히 늘어났으며 노점상이 유일한 생계방편이기도 했으나 또 많은 노점상들은 새로운 직장을 얻을 때까지 임시방편의 수단으로 누구나가 노점상을 하였다. 이때의 국가경제의 정책방향은 내부적인 성장이나 서민경제의 안정화보다는 수출 위주의 고도성장에 맞춰져 있었다. 정부당국이 내수시장의 발전에 무심한 상황에서 사실상 노점상들의 증가는 정부당국자들에게 커다란 걱정거리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당국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저소득 도시빈민과 비공식 부문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노점상을 통해 부분적으로 생계를 보완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속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이들을 수수방관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60년대의 사회복지정책의 흐름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1년 12월 30일 노령, 질병, 기타의 이유 등에 의해 근로능력이 상실되고 생활유지의 능력이 없는 자등에 대한 보호를 위한 생활보호법이 공포되었다. 이밖에도 아동복리법과 직업안정법, 군사원호보상법 및 1963년 사회보장에 관한 법률과 군인연금법, 산업재해보상법, 의료보험법 등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이 제정됨과 동시에 모두 제대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성장 제일주의에 밀려 재정적,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대부분의 실질적인 시행은 뒤로 한참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생활보호법은 1969년에 가서야 시행령이 제정되었고 의료보험법은 그보다 훨씬 늦은 1980년대에야 시행되었다.
무허가지역과 철거민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 경제개발 정책의 직접적 피해자인 이농민들이 도시빈민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그 대다수가 1정보 미만의 농지를 보유한 영세·소농 출신으로서 가구 단위로 이주를 하기 시작하였다. 산업화과정에서 농업지역과 공업지역 간 또한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 등의 격차가 갈수록 커져 영세·소농의 가계를 유지하기 어렵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다. 따라서 장년층의 가구주들은 당장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가족을 이끌고 서울 등 대도시로 대거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학력과 미숙련의 상태에 있었던 중장년층 이농민 가구주들은 경제성장의 주축인 근대적 산업부문의 노동력 수요에 적합하지 못했다. 더욱이 1960년대 제조업 부문도 이농을 통해 대규모로 공급되는 신규 노동력을 모두 흡수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이농민 가구의 젊은 연령층에 속하는 일부 구성원만 근대적 산업노동자로 취업할 수 있었을 뿐이었고 이농민 가구주들은 일차적으로 소규모의 영세상이나 행상?노점상, 건설노동 등과 같은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1)
거주 현황과 관련해서는 1966년의 조사에 따르면 서울시 인구 380만 명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127만 명이 무허가주택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2) 따라서 주택 부족률도 1960년까지는 40%미만이었으나 1966년 50%까지 급증하였고 주택 당 인구수도 1958년의 8.8명에서 1966년 10.5명으로 늘어났다.3) 상황이 이러하니 도시빈민층을 구성하던 이들은 정상적인 주거단지에 거주할 형편이 아니었기에 과거의 토막민들처럼 주거지의 사각지대인 산비탈 등지에 달동네를 형성하거나 비 올 때마다 침수를 당하는 하천변 또는 시 외곽의 유휴지에 조성된 무허가 판자촌에 들어가야 했고 온 가족이 서너 평의 단칸방에 거주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나마 전기나 상하수도 시설은 물론 수천가구가 몇 개의 우물에 의지해서 생활을 하는가 하면, 몇 가구가 재래식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등 생활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전기나 상하수도 시설도 온전히 기대할 수 없었고 수천 가구가 적은 수의 우물에서 식수를 공급받거나 재래식 화장실을 많은 수의 가구가 공동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 박정희 군사정권은 1950년대 무허가정착지에 대해 무대책철거를 집행했던 것과 달리 이재민의 경우에 대해 빈민구호의 차원에서 시 외곽 공유지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1958년 미아리정착지 조성사업을 시작으로 해서 1972년 말까지 48,718주택동과 64,140가구의 30여만 명을 시 외곽 98개 지구의 980만 평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무허가정착지 사업과 이주정책은 이주민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이들을 생계의 현장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4) 결국 인구팽창에 따라 포화상태가 된 도시는 주택문제의 해결을 위해 대대적인 주택공급 정책을 시행하면서도 다른 한쪽에서는 해방 이후 전국 곳곳에 피난민들이 짓고 살아온 무허가건물들을 철거하는 이중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에 반발한 주민들이 대규모로 저항하는 사건이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이 시점부터 도시빈민은 하나의 실체로 등장하게 된다.
경기도 광주 대단지 투쟁
[출처: [한겨레21 594호] 때려부수기 좋은 시간은 언제죠?] |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지금의 경기도 성남에서 도시빈민들에 의해 벌어진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이러한 암흑기를 지나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점차 고조되면서 빈민운동도 하나의 본격적인 사회운동 세력으로서 그 실체를 서서히 드러내게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개발계획은 성남시를 탄생시킨 광주대단지 조성사업이었다. 그러나 총 2만 세대의 12만 명을 집단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경기도 광주 도시빈민들의 커다란 항쟁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당시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목을 받았던 이 사건은 1968년 김현옥 전임 서울시장이 계획하고 1970년 양택식 후임 시장이 확정하였으며 경기도 광주 200만 평의 부지에 서울시의 철거민들을 이주시키겠다는 목표 아래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지구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급증하는 도심지역의 철거민을 서울시의 한정된 유휴 국공유지만으로는 다시는 수용하기 어려워지자 서울시는 도심지역의 과밀인구 분산책의 목적으로 위성도시 건설을 연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1967년 서울시는 23만여 동의 무허가 주택과 127만 명의 주민을 서울시 밖으로 철거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웠고 경기 광주군 중부면에 인구 50만 명이 살 수 있는 대단지를 조성해서 주택도시로 개발하려고 했다. 이주계획이 시행되면서 용두동과 마장동, 청계천변 등에 거주하던 판자촌 주민 2만 세대를 1969년 5월 2일부터 광주군 중부면 탄리와 단대리로 시 청소차와 군용 차 등에 실어 날랐다. 대규모 이주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상? 하왕십리 등의 무허가 정착지에 밀집·거주하던 빈민들마저 내 집도 갖고 일자리도 갖는다는 희망에 부풀어 상하수도와 전기시설은 고사하고 택지조차 제대로 조성되어 있지 않았던 광주대단지로 몰려들게 된 것이다.5)
사건의 발생 직전 광주대단지에는 판자촌 철거민 2만 1천3백여 가구의 10만여 명과 전매입주자 6천3백여 가구의 1만 4천여 명, 기타 전입자 2천9백5십여 가구의 1만 3천여 명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무계획적으로 조성된 이 지역은 암담하기 이를 대 없었다. 가장 비참한 곳은 언덕바지의 수용지대에 붙은 천막들이었다. 변소의 오물은 넘쳐서 주변에 악취를 풍겼고 주민들은 끼니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거리를 찾아 서울까지 가는 것도 시간과 비용 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6)
애초에 서울시는 평당 400원 정도에 경기도의 대지를 사들이고 철거민을 보내서 도시를 만들면 자연히 땅값이 상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따라서 서울시는 유보지만 팔더라도 토지매입비와 시설투자비, 행정지원비를 뽑을 수 있다고 계산하였고 궁극적으로 인구 50만 명 이상이 거주하게 되면 주민들 간의 자력갱생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급자족하는 도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막상 개발과 건설이 시작되자 토지 거간꾼들이 날뛰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거대한 폭리를 취해나가면서 투기를 부추겼다. 때마침 불어 닥친 선거 바람을 타고 개발붐은 절정에 달했다. 수많은 사람이 입주권을 사고자 아귀다툼을 벌였다. 그러자 서울시는 1970년 7월 14일 분양권 전매행위를 금지하고 ‘전매 입주자들은 매수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라면서 대지를 평당 8천 원에서 1만 6천 원 등에 불하하였다.
주민들의 부담이 가중되는 가운데 이번에는 경기도에서 조차 등기도 되지 않은 가옥에 당시 돈으로 1만 원 이상의 취득세를 부과하였다. 마침내 선거가 끝나자 공장과 주택 건설의 붐이 점차 시들해졌으며 일자리도 줄어들었다. 건설 경기가 사라지자 입주권을 산 사람들이 돈을 벌어 집을 짓겠다는 꿈은 서서히 현실과 멀어져 갔고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더구나 당국에서는 전매한 땅에 1971년 6월 10일까지 집을 짓지 않으면 매각을 무효로 한다고 하자 이들 전매자들의 기대는 좌절과 분노로 변하였다. 결국, 주민들은 당시 서울시의 시민아파트 주민들이 시를 상대로 해서 시의 융자금 일시금상환 통고를 백지화시킨 싸움에 크게 고무되어 1971년 7월 19일 ‘분양지 불하가격시정 대책위원회’를 조직해서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담은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첫째 대지불하가격 인하(평당 1,500원 이하), 둘째 불하가격 향후 10년간 연부 상환, 셋째 제 세금 5년간 면제, 넷째 구호대책과 취로사업 보장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진정서에 대해 서울시가 회답을 보내지 않자 주민들은 대표 217명을 선출하고 1971년 8월 3일자로 대책위를 ‘투쟁위원회’로 변경하면서 8월 10일을 최후 결단의 날로 잡아 성남출장소 뒷산에서 궐기대회를 열게 되었다.
다음은 “한국 중앙연구원 김원이 쓴 8월의 현대사 :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이라는 자료에 당시의 모습이 잘 실려 있어 원문을 실어 보도록 하겠다.
“불만이 쌓여가는 과정에서 전매권입주자 등을 중심으로 문제를 정부와 협상 또는 담판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이들은 광주대단지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제1공화국 시기 공보처장이었던 제일교회 전성천 목사를 찾아갔다. 이들은 그에게 현재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전성천은 본인이 직접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면서 제일교회 장로인 박진하를 대표로 내세우고, 자신을 고문으로 한 시정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성한다. 대책위는 지역 내 11개 구역의 위원을 선정하고, 전성천 명의로 보낸 구두 사발통문(沙鉢通文)을 통해 “단지 내 각 반별로 유지 몇 명씩을 뽑아 7월 17일 오후에 제일교회로 모이라”고 알렸다. 실제 당일 아무런 약속이 없었음에도 불구, 100여명이 제일교회로 모였다.
이윽고 7월 19일 2,000명이 모인 가운데 ‘유지대회’가 개최되었다. 예상보다 너무 많은 인원이 모여서 마이크를 통해 거리 ‘집회’가 열렸으며, 각 구마다 2명의 대표를 추가해 33인으로 위원회를 확대했다. 이를 통해 대책위는 정부 측에 자신들의 힘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동시에 ‘진정서’ 제출을 통해 대책위를 협상의 대상으로 인정할 것으로 요구했다. 당시 결의된 4개항의 요구 조건은 가격인하, 불하대금 10년 상환, 감세, 구호대책 등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서울시는 오히려 분양 가격을 8천원에서 만2천원으로 올려 받겠다고 통보했고, 이에 격분한 주민들은 데모에 돌입하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만 전성천은 이를 진정시키고 23일 오후 합동대회를 통해 7월 31일까지 결의 내용이 관철되지 않으면 실력행사에 들어간다는 단서를 붙여 만5천 가구의 날인을 거쳐 가족서명으로 서울시장과 경기도 지사 앞으로 제출했다.
그러나 정부는 진정서에 대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 사건이 경기도의 ‘취득세 납부 통지’였다. 8월 3일 대책위는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무시한 취득세 통지를 보고, 좀 더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으며, 주민들 사이에서도 “당국은 우리를 죽이려고 계획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대책위는 전성천을 중심으로 확대 개편되어, 217명을 위원으로 하는 ‘투쟁위원회’로 변신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이 담긴 전단, 팜플렛 등을 집집마다 돌렸다. “백 원에 뺏은 땅 만원에 폭리 말라”, “살인적 불하가격 결사반대” 등이 그 내용이었다. 사태의 해결 방향이 보이지 않자 투쟁위원회는 초강수인 궐기대회를 8월 10일에 개최할 것을 결의하고, 대단지 곳곳에 현수막, 포스터와 “모이자 뭉치자 궐기하자 시정(是正) 대열에!”란 구호가 적힌 전단 3만을 도배하기에 이른다. 또 단지 골목골목 마다 “우리는 더 이상 속을 수 없다”, “대책을 세워 달라”는 등의 벽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8월 10일. 궐기대회에는 최소 3만, 최대 6만에 이르는 대규모 인파로 넘쳐흘렀다. 집집마다 1명씩 나올 정도로 많은 주민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또 서울시장이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려고 몰려들었다. 이들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주민궐기대회에 모여, 양택식 서울 시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떤 사람들은 비장한 결심을 한 듯 입술까지 깨물고 있었으며, 저마다 한 손에는 피케트를, 다른 한 손에는 뭉둥이를 들고 있었고, 좌측 가슴에는 “허울 좋은 선전 말고 실업군중 구제하라”는 노란색 리본을 달았다. 당시 상황을 기사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간간이 비가 내렸다. 성남출장소 뒤편 산비탈. 오전 9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남녀가 뒤섞이고 어린애들도 눈에 띄었다. 10시가 지나자 발 딛을 틈이 없었다. 3만, 5만, 6만 ... 헤아릴 수가 없었다 ... 적잖은 사람들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삽, 곡괭이, 몽둥이였다. 건드리기만 해봐라! 하는 각오였다. 군중 속에 스무살 쯤 돼 보이는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곡괭이를 들고 있었다. 생기를 찾아볼 수 없는 바짝 마른 얼굴이었지만 눈빛에선 불이 타는 듯 했다. 분노에 찬 듯 악을 쓰는 목소리로 그가 구호를 외쳤다. "일자리를 달라!" 순식간에 사람들이 따라 외쳤다. 이 날 누구랄 것도 없이 구호를 선창하면 모두들 따라 외쳤다 ...”
11시에도 기다리던 서울 시장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주민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존재를 무시했다는 감정,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가난한 자들은 국민으로도 보지 않는가에 대한 박탈감이 그들의 눈빛 속으로 전달되었다. 스피커로 30분만 더 기다리라는 사업소의 공지가 있었지만, 30분이 지나자 흥분한 청년들의 ‘나가자!’는 외침과 함께 사태는 봉기의 길로 내달았다. 주민들은 “속았다, 우리를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다”며 분노를 공공연하게 드러냈으며, 성남사업소, 출장소, 관용차량, 소방차, 파출소의 파괴와 방화 등 공공연한 폭력을 행사했다. 또 이를 막기 위해 등장한 기동경비대와 ’투석전‘을 벌이며 대치했다;
“ ... 출장소 본관 건물은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불을 본 뒤 시위 군중의 흥분은 가열됐고 군중 수는 늘어났다. ‘죽여라’, ‘밟아 버려라’는 외침 속에 출장소 앞에 세워둔 서울 관 1-356 지프를 불태운 다음, 출장소에서 100미터 떨어진 서울시 파견대단지 사업소에 몰려갔으나 비로 인해 방화에는 실패, 사업소 앞에 있던 경기 관 7-492번 빈트럭을 불태워 탄리천에 밀어 넣었다 ... 이들 중 일부는 몽둥이를 들고 서울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택시를 타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몇 끼니를 걸러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팔자 좋게 택시만 타느냐”, “죽어도 같이 죽자, 왜 도망가려하느냐”면서 모두 차에 내리게 했다 ...”
마침내 궐기대회가 폭동으로 발전하게 되고, 주민들이 차량을 이용해 서울로 진출할 기미를 보이자, 양택식 서울 시장은 대표단과 협상에서 구호양곡 확보, 생활보호 자금, 도로포장, 공장 건설, 세금 비과제 면제 등을 합의하고 곧바로 시청에 들르지 않고 총리공관으로 가서 상황을 이미 기다리고 있던 오치성 내무, 신직수 법무장관에게 보고하고, 주민들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통지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밑으로부터 대중 봉기의 위험성을 잘 알고, 대단지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것은 박정희 자신이었다. 국가기록원에서 비밀해제된 1971년 8월 11일자 대통령에게 보고된 ??보고서??(보고번호 제71-458호, 보고관 정종택)의 첫 페이지에는 박정희가 8월 10일 발생한 광주대단지 사건을 도시폭동으로 간주, “主動者를 嚴斷에 處하라”는 메모를 확인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남로당을 통해 대중의 힘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서울 바로 위에 휴전선이 그어진 조건으로 미루어 볼 때 위험천만하다는 판단을 했을만 하다. 실제로 당시 진상보고서에는 민심수습 다음 조치로 “난동자에 대한 조치”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7)
1970년대 당시로서는 독재정권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이 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00여 명이 부상당하였고 2천만여 원의 재산피해가 났으며.8) 김성배(남 26세)등 21명의 구속으로 마무리 되었다.
경기도 광주 대단지 투쟁의 성격
광주대단지 사건은 도시빈민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최근까지 많은 논쟁이 있어왔는데 요약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폭동과 난동사태로 규정하는 시각이다. 1971년 8월 11일 그리고 12일 양일에 걸쳐 각종 보수언론들은 이사건과 원인을 주민들의 ‘폭력’ 행사와 ‘무법천지’로 몰고 가며 세세히 보도를 하였고 배경에는 흥분한 청년들의 분별없는 폭력행사라는 것이다. 즉 광주대단지 주민들에 대한 지배적인 시각은 ‘가난’ 이 키운 ‘반사회성’ 이며 도시빈민을 반사회적이고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인식은 광주대단지에서 일어난 집단폭력을 쉽게 ‘폭동’ 혹은 ‘난동’으로 규정짓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김동춘의 경우 무정형적의 집합행동을 단순히 폭동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우며 그들의 행동은 정부당국의 빈민에 대한 무성의한 대우에 대한 항의에서 출발하였다고 주장한다.‘영세민을 더 이상 착취하지 말라’, ‘일자리를 달라’ 등의 구호가 그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대표자인‘광주대단지토지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 가 서울시 당국과 경기도에 계속 진정한 점과 이후 투쟁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보다 적극적인 요구를 제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묵살한 점에 대해 이들은 크게 분노하였다고 본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볼 때 이 사건은 적극적 항의와 걷잡을 수 없는 폭동이 결합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을 ‘항거’(抗拒)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항쟁(抗爭)이라 까지 부를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의 행동이 정부의 구체적인 탄압행동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며, 또 정치권력과의 분명한 대치 선이 마련된 것은 아니었고 일시적인 흥분으로 인해 확대되기는 했으나 양택식 시장의 요구 조건에 대한 수락과 더불어 곧바로 투쟁이 중단되었고, 군중들의 행동도 다분히 표출적(expressive)이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9)
이밖에도 최근 제출된 도시봉기론에 대해서 살펴보면 첫째 도시봉기는 아직 특수한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전정치적 운동이며 그런 의미에서 원초적 운동이다. 둘째 도시봉기의 주체들은 서민이라고 불리는 계층으로, 응집력이 강한 지역의 임금생활자, 소자산가, 그리고 구분이 어려운 도시빈민 등이다. 셋째, 도시봉기는 표면상의 목적이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든, 항상 부자와 권세 있는 자 정부, 권력 등을 향한 것이다. 넷째 도시봉기는 개량주의적 특성을 지닌다. 폭동들에서는 비리와 부정을 고친다는 목표에 머무를 뿐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혁명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섯째 도시봉기는 산업사회의 노동계급이 출현하면서 쇠퇴해갔다. (홉스본 『원초적 반란』1984, 19-21, 132-149) 이상의 주장을 통해 광주대단지 사건은 한국의 ‘도시봉기’로 이해를 한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특정한 도시의 모든 빈민층이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여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이루려는 운동이지만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조직성과 목적의식성을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운동이라기보다는 군중 행동의 일종인 도시봉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10)
이상으로 경기도 광주대단지 사건을 둘러싼 몇 가지 해석을 살펴보았다. 위와 같은 분분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분명 이 사건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빈곤과 도시빈민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었던 계기를 마련했으며 많은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빈민운동의 영역으로 끌어 들였고 이후 전개되는 민주화 운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무엇보다도 70년대 초 사회적으로 엄혹한 시절에 터져 나온 사건이라는 점에서 광주대단지사건에 대한 시사점이 크다 할 것 이다.
각주)-----------------
1) 윤종주, “근세한국의 민족이동에 대한 연구”『한국의 인구변동과 사회발전』(서울여자대학교 1991년) p46
2) 강준만,『한국현대사 산책 : 1960년대 편』(인물과 사상 2004년) p105
3) 장세훈, “도시화, 국가 그리고 도시빈민: 서울시의 무허가 정착지 철거정비정책을 중심으로” 한국사회사연구회 『현대한국자본주의와 계급문제』 (문학과 지성사 1988년) p125
4) 김형국, “도시화 국가 그리고 도시빈민”『불량촌과 재개발』 (나남 1989년) p190
5) 김동춘, “광주대단지 8?10 항거의 재조명” 1971년
6) 박기정, “광주대단지 사건” ??신동아??, 1971년
7) 고대문화, 한국 중앙연구원 김원이 쓴 8월의 현대사 :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8) “광주대단지 사건 자료 '성남시의 사람들은 왜 이사를 오게 되었나” 『서울 육백년사』참조 2000년
9) 감동춘. “71년 광주대단지 8?10 항거의 재조명” 『8?10 30주년 기념식 및 심포지엄자료』 2001년
10) 김수현,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연구” 서강대학교 대학원. 2006년 p7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