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서울의 인구증가분의 비중은 48%가 인구이입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전 도시 이입인구의 1/3이 서울로 집중했다.1) 이러한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는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였다. 따라서 서울시의 인구 과밀과 주택 부족의 문제는 쉽사리 해소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개발지역을 인근지역으로 넓혀 갈 수 밖에 없었다. 영동지구 구획정리 사업 등으로 1천여만 평의 강남지역이 파헤쳐졌고 목동·개포·수서 등지로 개발지역은 영역은 점차 확장돼 갔다. 상계동과 일산을 끝으로 더 이상 북쪽으로 올라갈 곳을 찾지 못하던 도시는 점점 남쪽으로 발을 뻗어 분당·과천·산본·안양 등을 거쳐 용인·천안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인구의 증가로 인해 무허가 주택의 증가도 덩달아 뒤 따랐으며 이에 대한 단속과 전면철거를 단행하였지만 한편 이들에 대한 이주지를 제공하여 정착 시키는 것도 필요 했다.
우리나라의 아파트 역사는 사실상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아파트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57년 11월 경 서울 성북구 종암동 숭례 초등학교 위에 17평 규모의 종암아파트가 건설되면서 부터다. 이날 준공식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참석하게 되면서 적국적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그후 1958년에 서울 중구 주교동의 중앙아파트, 59년 서울 충정로에 개명아파트등 주로 층이 낮고 규모가 작은 아파트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1967년 4월 서울을 뒤덮고 있던 무허가 건물 13만 동을 양성화하겠다며 보조비를 지급했지만 개량 실적이 미미했다. 그래서 내놓은 대안이 시민아파트 건립이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파트가 건립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울시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간 시민아파트 2000개 동을 공급해 9만 가구가 입주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70년대 빠른 속도전에 밀려 급조된 아파트 건립은 마침내 1970년 6월 8일 서울시가 마포구 창전동에 야심차게 추진했던 지상 5층, 15개동 규모의 와우아파트 한 동이 푹석 주저앉는 사건이 벌어졌다. 준공된 지 석달만에 일어난 사고였다. 건물은 무너지면서 가파른 경사 밑에 지었던 판잣집을 덮쳤고 아파트에서 잠을 자던 주민 가운데 33명이 사망했으며 38명이 다쳤다. 아파트 아래 판잣집에서 잠을 자던 1명도 세상을 떴고 2명은 부상을 입었다. 2)
70년대 아파트 사를 둘러싼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이다. 지금시기 이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는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도시공간의 물리적 재편과 아파트건립이라는 개발 사업이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삶에 현장에서 밀어내고 피눈물을 흘리게 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70년대 와우 아파트 붕괴사건이 주는 교훈은 지금도 형태만 달리할 뿐 반복되어 나타나는 모순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72년부터 74년까지 부동산 파동을 거치면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두 배 이상 뛰기 시작한 아파트 열풍은 식을 줄 모르고 확산되어 나갔다. 주택공사가 완공한 반포단지를 시작으로 아파트개발의 신호탄이 올려 진 것이다. 이후 잠실을 중심으로 초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중동 건설에 참여했던 현대건설은 본격적으로 아파트 건설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정부는 동부이촌동과 반포단지 개발을 위해 AID 차관을 받았는데 이 지역에서는 부유층을 겨냥해서 최소평수 22평부터 최대평수 복층 64평까지 아파트가 설계되었다. 아파트 분양이 시작되자 엄청난 인파가 장사진을 이루었고 이 때문에 정부는 아파트 분양추첨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77년 9월에 착공한 5차분 분양에 시비가 일었다. 총 728가구의 절반은 사원용으로, 다른 절반은 일반 분양용으로 승인받은 아파트가 애초의 평당 30만 원에서 준공도 되기 전에 3배 이상 가격이 뛰어버린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사원용으로 승인을 받은 아파트를 특수계층 6백여 명에게 특혜 분양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아파트 분양을 둘러싸고 복부인과 프리엄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면서 이 사건을 통해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의 서곡이 열렸던 것이다.3)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
70년대 들어 자본에 의한 도심권 개발과 도심 외곽지역의 정비정책이 강력히 전개되자 주민의 경제적 동원에 기초한 주택재개발 정책인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 이하 임시조치법’ 1973년 3월 제정되었다. 당시의 주택재개발 정책은 주민의 자조적인 현지 개량방식을 빌려 국가 주도의 도시빈민 관리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으로서 임시조치법을 통해 재개발지구 지정과 함께 공원과 녹지 등의 불법 건물을 도시계획법에 따라 합법화하는 법제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또한 이를 통해 주민들이 무허가 주택의 소유권을 획득할 수 있는 제도적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러한 제도에 의해 도시빈민들이 시장으로 편입될 수 있었고 재개발 과정에서 필수적인 도시기반시설 설치비용을 국공유지의 매각 대금으로 충당할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부당국의 입장에서는 무허가 정착지 주민의 경제력을 동원함으로써 해당 지역을 재개발하는 데 소요되는 재정을 줄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당국은 ‘무허가 거주 촌’을 묵인함으로써 직접적인 자본축적의 기반인 노동력을 대도시에 집중시킬 수 있었고, 나중에는 바로 이 ‘무허가’를 근거로 해서 자본의 공간적 축적 방식인 ‘도시재개발’을 위해 무허가 정착지의 주민들을 더 열악한 곳으로 추방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임시조치법 3조에 따른 재개발 지구의 지정은 도시빈민의 주거지역을 공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일반주택 지구와 구분하고, 이를 통해 이들을 사회적으로 격리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따라서 ‘임시조치법’은 결국 도시빈민을 제도권 외곽의 배제대상이자 통제대상으로 두는 분할통치의 기제로 기능하였다.4)
이렇듯 70년대의 정부정책은 새로운 무허가 정착지는 강력하게 억제하되 기존의 무허가 정착지는 현지 개량을 통해 부분적으로 양성화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미 아파트 투기가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현지 개량이나 재개발 방식을 둘러싸고 정부당국과 철거민들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사회적으로는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을 둘러싼 정치적 부정부패와 투기 열병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1978년 2월과 7월 사이 아파트를 둘러싼 극심한 투기를 막는다는 이유로 363개 동의 아파트 단지를 특정지역으로 고시하였고 8월 투기억제책인 8?8조치가 발표되었으며 12월 국토이용관리법을 개정해서 토지거래신고제와 허가제가 시행되기도 했다.5)
전라도 광주 무등산타잔 박흥숙 사건
▲ 박흥숙 모습 [출처: MBC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보도자료] |
사건이 벌어진 1977년 4월 20일 새벽 광주시 동구청 철거반 직원 7명이 속칭 무등산 증심사 계곡 덕산골 주변의 한 무허가 집을 철거했다. 이 집은 비록 무허가였지만 한 박흥숙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이 단란하게 살던 곳이었다. 자신이 살던 집이 철거로 불에 타자 분노한 청년 박흥숙 씨는 철거반 직원 오 모 씨를 인질로 잡았다. 그리고 붙잡힌 오 씨를 구출하고자 동료직원 4명이 차례로 다가오자 박 씨는 흉기를 휘둘러 철거반 원 네 명을 숨지게 하고 이들을 구덩이로 던져버렸다. 그는 사건 직후 도주하였다가 서울에서 검거되어 1978년 5월 사형 판결이 났다. 그후, 각계각층에서의 구명운동이 시작 된다. 당시 구명회원 참여자에 따르면 “공부해 보려고 꿈을 갖고 사는 소시민이었다. 평소 효성이 지극했고, 순진한 성격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사람을 네 명이나 잔인하게 살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63명 정도의 회원을 시초로 광주 전역에 구명운동 확산되기 시작한다. 6)
그러나 결국 박흥숙은 사형집행을 당하게 되는데 최후진술을 통해 “당국에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도 그 추운 겨울에 꼬박꼬박 계고장을 내어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을 개 취급했다. 집을 부숴버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당장 오갈 데 없는 우리들에게 불까지 질렀다. 돈이나 천장에 꽂아두었던 봄에 뿌릴 씨앗도 깡그리 타버렸다. 이처럼 당국에서까지 천대와 멸시를 받아야 하는 우리인데 누가 달갑게 방 한 칸 내줄 수 있겠는가? 옛말에도 있듯이 태산은 한 줌의 흙도 거부하지 않았으며, 대하 또한 한 방울의 물도 거부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살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이와 같은 최후진술을 남긴 박흥숙은 1980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7) 시간이 지난 후 한때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2005년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또 다시 세상에 알려진 박흥숙 사건은 한 개인의 엽기적인 범죄 행각이나 살인마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사건이었다. 어찌 보면 이사건 처럼 많은 이들이 철거에 시달리다 소리 소문도 없이 생존권을 박탈당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당시의 노점상투쟁과 관련된 자료로는 정동익의‘도시빈민연구’를 통해 소개되고 있는데 1971년 8월 17일 인천시의 부평 공설시장 노점상 5백여 명이 노점상 단속에 항의하면서 인천 북구청에 몰려가 구청장실과 민원실의 유리창과 사무집기를 부수고 관용차를 뒤엎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8) 7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미명아래 거리의 노점상에 대한 단속이 산발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70년대 빈민 운동9)
[출처: 모노라 모토유키, 한겨레 2006년 4월 12일] |
경기도 광주 사건을 계기로 하여 도시빈민을 둘러싼 정부정책과 그 모순들에 대한 대규모의 격렬한 저항사건이 하나 둘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1971년에는 연희동 아파트 주민 농성과 청계천변의 시위 등이 전개되었으며 실로암 교회의 지원을 받은 송정동 주민 시위에는 전투경찰 약 1천여 명 이상이 출동하기도 했다. 또한, 1977년의 영동 철거민 사건, 1979년 해방촌 주민 농성사건 등 1970년대의 빈민투쟁은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특히 청계천과 창신동 철거투쟁은 도시 중심부이자 주변 대학가의 선진적인 학생들의 참여가 쉬웠기에 이러한 지리적인 조건으로 말미암아 야학과 공부방 사업 등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켜서 진보적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빈민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빈민현장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에 이들은 성서와 신학을 바탕으로 소외지역과 도시빈민을 위한 활동에 불을 지폈다. 특히 1969년과 1970년에 각각 발족한 ‘연세대 도시문제 연구소’와 ‘기독교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협의회’가 결성이 되었다. 그리고 1976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관계자들이 반공법으로 구속되어 해체될 때까지 이들은 도시빈민운동을 다방면으로 지원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10)
이 밖에도 하나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사건이 있었다. 청계천 노동자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진보적 학생들의 의식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사회운동 세력은 학생운동과 가톨릭 농민회를 중심으로 농민운동 그리고 산업 선교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으로 확대되어 나갔 다. 개인만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로 종교적 신념을 확장하고자 했던 종교인들의 힘은 1970년대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의 정치적 암흑기를 위기만이 아닌 미래의 발전을 위한 저항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당시 사회는 여전히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엄혹한 시기였으므로 종교와 운동의 결합은 필연적이었다.
이때의 종교운동을 통해 해방신학 외에 빈민 활동에 도움을 준 이론은 '알린스키’11)의 공동체 조직이론과 그 후‘프레리’12)의 민중교육론이었다. 알린스키의 조직이론과 방법론 및 프레리의 교육론에서의 사회구조와 체제에 대한 분석은 활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래와 같은 실천적 지침은 최근의 빈민 활동가들에게도 귀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조직된 주민은 행동하게 한다. 그 후 그 행동을 반성하게 하고 다음 행동을 유도한다.
둘째 지도력을 독점하지 않게 한다. 조직가는 지도자를 교체하거나 공유하게 한다.
셋째 공동체를 조직한 조직가는 그 공동체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해서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발전하게 한다.
넷째 주민지도자를 발굴하여 훈련하고 지도력을 개발한다.
다섯째 공동체 조직 과정을 통해서 인간관계의 예술을 창조한다.
여섯째 빈민의 부정적 요소를 극복하게 돕고,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성장하게 돕는다.
이러한 실천적 지침과 의식을 받아들인 빈민 활동가들은 주로 철거지역을 중심으로 거점을 옮겨 다니며 헌신적으로 조직 활동에 매진해 나갔으며 결과적으로 광주대단지 주민행동, 청계천 주민행동, 중랑천 주민행동 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다.
한편, 교련반대 시위를 비롯하여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새로운 저항의 분위기를 감지한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와 시경의 대공 분실 등을 통해 이들의 활동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빈민 활동가를 포함한 수많은 활동가는 긴급조치위반이나 반공법 등으로 구속되는 시련의 시기를 지내야 했다. 이러한 탄압에서 일정정도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근거지는 교회였다.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야학과 탁아소를 설치하고 진료사업과 공부방 활동을 병행해나갔다. 이러한 활동은 1970년대 전후로 야학운동과 지역 아이들을 상대로 한 탁아소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된 계기가 되었다. 이시기 빈민들의 대중행동이 크게 폭발한 것은 목동 주민행동과 사당동 주민행동이었다. 특히 사당동 주민행동에는 학생들의 직접적인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모범적이고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는 평가와 함께 빈민활동의 전범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
이 당시 주목할 조직은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의 활동를 들 수 있다. 1970년대 도시빈민을 조직화하고자 한 최초의 집단적 노력이라고 보인다. 그동안 이 조직은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회’, ‘한국 특수지역선교위원회’ 등으로 그 명칭이 바뀌어 왔지만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통상 ‘수도권’이라는 약칭으로 불려왔다. 이 조직을 이끈 사람은 1968년 미국 연합 장로교회 죠지 타드의 도시선교에 대한 지원 약속을 받고 초교파적인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 박형규 목사였다.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가 연합하여 연세대학교에 ‘도시문제연구소’를 설립하였고 연구소 안에 각각 연구조사 분야와 도시선교 분야를 두었는데 도시선교 분야에서 다시 도시선교위원회(위원장 박형규 목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도시선교위원회는 도시빈민지역 활동가를 양성하기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로 하고 가톨릭과 개신교 각 교파에서 훈련생을 뽑아 행동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를 통해 도시빈민 조직 활동가들이 조직적으로 배출되었다. 그들은 1969년 판자촌에 배치되었는데 창신동 등지에서 쓰레기와 분뇨의 처리를 둘러싼 민원투쟁을 거쳐 철거 싸움 등의 경험을 통해 훈련되었다. 13)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는 1971년 9월 1일 9명의 위원이 모여 위원장 박형규 목사를 중심으로 건설된다. 그 후 1972년 10월 유신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기까지 신설동 4번지의 철거민 투쟁을 조직했고 평화시장 등지의 영세 상인들의 조세저항 시위가 벌어지고 나서 이를 조직화하기 위한 조사와 활동을 펼쳐나갔다. 또한, 광주 대단지와 남대문시장, 송정동 뚝방지역, 도봉동, 인천 화수동, 금화 시민아파트, 신정동 등지에 실무자를 파견해 일상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투쟁들은 현상적으로 드러난 측면에서는 자생적인 투쟁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위와 같은 활동가들의 활동이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끼쳐 발전해 나갔다. 이후 위원회는 ‘수도권 특수지역선교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유신체제가 모든 시민적 권리를 부정하고 사회통제를 더욱 강화해 나가는 상황에서도 여러 지역 주민들의 조직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1973년 4월 남산 야외 음악당에서 있은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박형규 목사, 권호경, 김동완 전도사 등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의 실무자들과 나상기, 황인성, 남삼우 등 KSCF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민주주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 "회개하라 이후락 부장", "꿀먹은 동아일보 아부하는 한국일보" 등의 민주회복과 언론자유를 촉구하는 전단을 살포하면서 준비된 플랭카드를 펼쳐 들고 전단 수백 장을 배포하다가 박형규 목사 등 4명이 구속되거나 1974년 1월 17일 김경락 목사 등이 "전국교회에 보내는 호소문" 발송하다 우편 검열시 문제 되어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수도권’의 위원들이 수배되기에 이른다. 14)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특수선교위원회’로 조직을 재정비하여 답십리, 봉천동, 신설동, 사당동 등지에서 도시빈민 활동을 계속해서 전개해 나간다. 1976년 5월에는 명칭을 ‘한국 특수지역선교위원회’로 바꾸고 부산, 전주, 제주 등지로 그 활동을 확대해갔다. 그러나 박정희정권의 탄압은 여전히 강력했고 그 수위도 점점 높아져만 갔다. 반공이데올로기를 무기로 삼아 모든 민주화운동을 발본색원하고자 주민통제를 더욱 강화하자 ‘수도권’ 의 도시빈민을 조직화하는 활동을 전개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조직 활동가들의 활동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말에 도심의 판자촌이 철거되기 시작하면서 변두리에 새롭게 형성된 빈민지역의 생활조건은 이전보다 외양적으로 나마 개선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거세 질 수록 사회운동은 점차 조직화 되어 나갔다. ‘ 수도권’은 변화된 조건과 상황에 따라 지금까지의 활동을 지양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1979년 2월 마침내 해체되고 만다. 1975년 이후 뚜렷한 방향을 상실한 채 활동을 정비하거나 확장하는 과정을 반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수도권’의 해체에도 운동은 정체되지 않았고 새로운 활동을 전개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경주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하월곡동에서의 허병섭 씨의 활동과 난곡에서의 김혜경 씨의 활동, 송정동에서 출발하여 양평동을 거쳐 경기도 시흥시로 집단 이주한 제정구 씨와 정일우 신부 등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사건을 해결하는 해결사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민중과의 신뢰의 끈을 조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개개인이 달동네나 판자촌에 완전히 투신하고 주민과 하나가 되는 방법을 통한 ‘더불어함께 살기’ 라는 전략은 1970년대 시대상황 에서 빈민운동의 모범을 보였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들은 주민들과의 친화력을 우선시하며 정치, 사회적인 모순을 폭로하고 극복해 나가면서 각계각층의 사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나가는데 나름의 기여를 했으며 그후 1980년대 빈민운동을 활성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의 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빈민활동가들의 실천은 도시빈민에 대한 사회, 종교, 민주세력의 관심을 촉발시켰으며 목적의식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그 운동의 원칙과 방법에 대한 기초를 형성하였다. 물론 이러한 활동은 아직 종교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분명히 존재 하였고 우리사회 도시빈민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를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으로 확대 시키는 데는 아직 많은 한계가 있었다. 결국 ‘수도권’의 활동은 사실상 1970년대 엄혹한 시기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도시빈민운동을 전개했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실상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진되는 경제정책은 대부분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삶을 희생시키며 추진되는 것인 반면 이들에 대한 복지제도는 행정상 1976년 12월 보건사회부 ‘사회보장심의위원회’의 건강보험 확대방안을 중심으로 강제가입방식의 의료보험제도를 채택한 것 말고는 다른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상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제대로 된 복지제도가 전무하였다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정권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활동가들의 헌신성에도 불구하고 활동은 점차 위축되어 나갔다. 하지만 암울한 정세 속에서도 대중들의 저항의 불씨는 활활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좀 더 새로운 이론과 사상의 측면에서 무장한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각인하기 시작하였고 종교적 틀을 극복한 운동적 전망을 마련할 필요성이 대두 하였다.
각주)-----------------
1) 장세훈 『도시화 국가 그리고 도시빈민』나남 출판사 p202
2) 매일경제, 2009. 6. 8.
3)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인물과 사상 2002) p182
4) 김형국, 『불량촌과 재개발』(나남 1989년) p210
5) 강준만,『한국현대사 산책 : 1970년대 편』 p85
6) 2005년 5월15일 방송, MBC 「이제는 말 할 수 있다」보도자료,
7) 최인기, “빈민투쟁으로 숨져간 사람들” 참세상 네트워크 게제 2009년 / 인터넷 검색자료참조
8) 정동익, 『도시빈민연구』(아침 1985년) p168
9) 최인기, “도시빈민운동의 흐름과 방향'『해방수레를 끌며 9호』(전노련 2007년) p115
10) 정동익, 『도시빈민연구』(아침 1985년) p143
11) 알린스키에 대해서는 ‘알린스키생애와사상’ 대한기독교서회 조승혁 역을 참조 바람
12) 프레리는 ‘페다고지 Pedagogy’의 저자로 제3세계 민중교육학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음
13) 조배원, ‘바라에 눕는 풀 : 도시빈민운동의 대모 김혜경’ 『기억과 전망 통권 5호』2003년 p168
14) 민주화운동 정신계승 국민연대 민주운동일지 70년대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