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과 도시빈민운동

[빈민운동사] 우리사회의 빈민운동사 (4)

80년대는 운동의 전환점이자 사실상 새로운 출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박정희 군부독재라는 엄혹 시절에도 모든 부문 운동이 존재했지만 운동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마침내 1979년 10월 26일 사태를 통해 박정희 군부독재는 종식을 하게 되지만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12·12 쿠데타를 통해 새로운 전두환 군부독재가 들어서게 되고 이들 신군부의 치밀한 계획아래 계엄령이 선포되며 마침내 광주학살 만행이 전개된다. 하지만 80년 광주항쟁을 통한 대학살은 전 국민의 저항과 민주화에 대한 공분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으며 80년대 내내 투쟁의 구심이 되어 나갔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이 도시빈민운동도 지난 시기 전개된 경기도 광주도시빈민투쟁을 비롯하여 개발지역과 거리에서 펼쳐진 수많은 철거와 단속에 저항했던 활동들이 모여 작은 내를 이루어 나갔다. 그리고 80년대 촉발된 사회운동과 결합하여 빈민운동은 커다란 강이 되어 나갔다.


1. 80년대 공영재개발과 합동재개발

1980년대 전두환 독재정권은 중동의 건설경기에 투자한 인력과 기술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개발 붐에 편승하여 ‘재개발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당시의 재개발방식에는 ‘공영재개발’ 이 있었다. 공영재개발은 정부가 철거에서부터 아파트의 건설과 분양, 판매의 전 과정을 장악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으로 건설업체는 정부에서 건설부분만 하청을 받았고 정부가 고시한 가격에 입찰하여 아파트를 건설함으로써 평균이익과 차액을 챙겼다. 그러나 정부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온 공영재개발은 민간건설회사의 분양과 판매를 전담하려는 요구와 대립하였다. 가옥 주와 세입자들의 보상과 주거의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커다란 대중투쟁에 직면했다.

철거민들이 정부를 상대로 투쟁하고 저항하자 철거하는 데에만 2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자 정부는 건설과 매매의 전 과정을 건설회사에 양도함으로써 자신의 폭력성을 은폐하기 쉬운 ‘합동재개발’의 방식을 1982년 채택하게 된다. '합동재개발방식‘ 은 가옥 주들이 주택을 제공하는 대신 재개발조합을 구성하여 건설회사와 함께 개발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상계동과 사당3동, 창신동, 양평동 등지에서 실행되었다. 이제 영세 가옥 주들은 땅을 내놓는 대신 아파트 입주권이나 토지에 대한 보상이 보장되었기에 이들은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반면 세입자는 영세 가옥 주에게 보증금이나 이사 비용을 받아야 했으므로 세입자와 가옥 주간의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공영재개발에 있어서 갈등은 정부와 가옥 주 사이의 문제였으나 합동재개발 방식은 가옥 주와 세입자 간의 대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합동재개발에서는 소유주가 소유한 토지나 주택에 대한 보상으로 분양권과 함께 재개발이익의 지분이 보장되었지만 모든 가옥 주에게 무조건 아파트를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즉 건축비와 소유주의 지분을 비교해서 건축비보다 부족한 부분을 지급해야 입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건축업체는 참여 조합으로서 재개발사업에 참여하면서 건축을 담당하고 조합에 사업추진에 필요한 지도와 자금을 담당하게 된다. 건축업체는 재개발사업에 투여한 건설비용과 개발이익을 수취하는 당사자로서 가옥 주에 대한 보상용 아파트나 세입자용 영구임대아파트 제외한 일반분양용 아파트를 매각해서 막대한 개발이익을 확보하게 된다. 따라서 건축업체는 임대아파트의 비중을 낮추고자 다양한 방법으로 세입자들을 내모는 것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재개발지역에 포함된 국공유지를 가옥 주들에게 불하하면서 국공유지 매각에 따라 직접 이익을 얻으며 재개발사업을 통해 발생하는 이익 중에서 도로나 하수도 등의 공공시설에 대한 지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정부는 뒷전에 머물면서도 재개발로 인한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반면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재개발사업은 건설업체들에는 폭리를 취하게 했지만 전? 월세의 폭등과 주택가격의 상승을 가져왔으며 기형적인 형태로 도시가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건설자본과 정치인들의 유착과 비리를 낳았고 복부인이나 부동산 업자들 그리고 철거전문의 용역 깡패들이 활개 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합동재개발방식은 1985년 11월 총 15개 지구에서 14만 평의 땅에 4,010동 주택과 90여 동의 아파트가 건립되었거나 건립 중이었는데 이는 1974년부터 당시까지 시행된 재개발 실적의 절반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다.1) 이밖에도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서울시에서만 무려 236개의 빈민지역이 재개발지역으로 고시되었다.

한편,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위기감을 느낀 노태우 정권은 주거생활의 안정을 위해 백만 호 주택건립을 약속했고 1989년 5월 세입자에게 19만 호 정도의 영구임대주택을 제공한다는 서울시의 시행령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주택 문제가 그리 쉽게 해소 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당시의 대표적인 철거투쟁은 바로 목동과 상계동, 사당3동 등에서 세입자와 철거민 중심의 조직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80년대 주요 철거투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전두환 정권시기 철거투쟁

- 목동 공영개발사업

목동은 서울시가 직접 개입하여 1983년 4월 12일 신시가지건설 사업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목동의 전체 철거대상은 2,359동 가운데 허가건물 580동과 무허가는 1779동이었으며 세입자는 2,846가구와 가옥주 2,359가구를 합해 모두 5,205가구에 이르렀다. 총인원으로 따져도 철거를 강요받는 세입자만 1만여 명에 육박했다. 서울시는 주민들의 토지를 평당 7만원에서 14만 원에 강제 매입하고 채권입찰제를 채택하여 호화 고층아파트건설을 계획했으며 분양가를 평당 105만 원에서 134만 원으로 책정하여 개발이익을 남겼다.

목동은 대부분 철거지역이 그렇듯이 서울시가 과거 정착지 사업을 통해 이주단지로 조성됐던 마을이었다. 그러나 가옥 주들에게는 연고권을 인정하여 부분적으로나마 대책이 마련되었으나 세입자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목동투쟁은 1984년 8월 27일 양화교 점거농성을 시작으로 하여 1백여 회가 넘는 대대적인 투쟁을 전개되었다. 목동투쟁은 초기에 가옥주들을 대상으로 한 투쟁이었으나 이후 세입자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세입자 문제를 전 사회적 문제로 촉발시킨 커다란 사건이었다. 또한 목동투쟁은 아파트입주권 부여와 임대아파트 보장 등을 관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2)

- 특별분양권 사업과 사당동

사당동 판자촌은 1960년대 말에 형성된 서울의 판자촌 2백여 곳 가운데 한 곳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근시안적 철거민이주 정책의 결과로서 중구 양동과 용산구 이촌동 철거민들이 새롭게 삶의 터전을 이룬 곳이 사당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10년 만에 그 규모가 약 10배 넘게 증가할 정도로 급속히 팽창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러던 도중에 1981년 사당동의 산 22번지 일대에 약 1천 6백여 명의 철거반원 등이 들이닥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통해 약 5백여 가구의 판자촌이 철거되었고 19명의 부상자가 발생되었으며 급기야 철거반대 주동과 공무집행방해를 이유로 이승용 씨가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후에도 사당동 재개발추진위는 설계비 부정착복과 토지매입의 부정, 입주권 남발 등을 폭로한 추진위 감사인 이연수 씨가 역시 공무집행방해 등의 사유로 구속되는 등의 일들이 벌어졌다.3)

그럼에도, 사당동 철거민들은 1985년 1,052세대를 중심으로 결성된 세입자대책위를 중심으로 무려 2년 6개월 동안 재개발법 철폐와 생존권 보장 등의 요구조건을 내세우며 기나긴 싸움을 전개해 나갔다. 사당동 투쟁은 철거에 대응한 경찰서, 국회, 민정당사 농성, 구청항의방문, 가두시위 등 공세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으로서 평가된다. 세입자보호를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못하고 조합 측에서 간단한 이주비를 받는 것이 전부였던 이전까지에 비해 사당동투쟁은 세입자 특별분양권 보장과 특별분양권에 대한 340여만 원에 상당하는 전매보상책을 받는 등의 성과를 남긴다.

이밖에도 사당2동에서는 철거민 임우택 씨의 3남인 임채의(남 5세) 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1987년 12월 27일 오후 2시경 주일 예배를 위해 사당2동 산 17번지에 있는 남성교회로 갔던 임채의 군이 교회 앞에 있던 서울시립 새마을유아원 부근의 담장이 무너지는 사고를 당해 현장에서 압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 합동재개발 사업과 상계동

1985년 4월 20일에 재개발사업 지구로 지정된 상계동은 1980년대 대표적인 철거반대 투쟁지역이었으며 상계동은 세입자대책위를 중심으로 약 520세대의 세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기존 투쟁에서 더욱 진보한 ‘빈민생존권을 부정하는 재개발의 철폐와 도시빈민 생활권의 보장, 구속자석방, 살인철거 즉각 중단’ 등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투쟁을 전개해갔다. 그뿐만 아니라 가옥 주들이 중심이 된 민간 주도의 합동재개발 방식에서의 세입자대책과 같은, 세입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밖에도 상계동 투쟁은 학생운동의 현장 진출이 두드러진 지역이었고 도시재개발사업의 전면철폐 주장이 대두되는 등 정치적운동의 성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1987년 4.13 호헌조치 이후 4월 14일 강제철거가 감행되자 상계동 주민들은 명동성당으로 거점을 옮긴 후 농성을 진행해 종교단체의 지원을 이끌어내고 87년 6월 항쟁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울시 외곽의 남양주시에 건설된 나래마을과 부천시 고강동 등의 이주단지에 공동체 마을을 형성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특히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조합 측으로부터 약 1년간의 투쟁에 따른 생계 대책 비를 보상받기에 이르렀다. 즉 5인 가족의 2개월 치 생계비에 상당하는 852,700원과 100만 원 정도의 보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4)
비록 상계동 투쟁을 통해 정착지가 마련되는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이것은 공식적인 대책이 아니었고 비공식적적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한편, 1987년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상계동에서는 철거민의 자녀인 오동근(남 9세) 군이 사망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상계동 주민들이 명동성당에서 천막생활을 하며 농성을 하던 바로 그때에 오동근 군은 다른 친구 3명과 함께 예전 살던 상계동의 동네 골목으로 놀러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이 놀고 있던 주변의 철거가옥의 담벼락이 무너지면서 그들은 돌무더기에 깔리게 되었다. 결국 오동근 군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으며 다른 친구들도 모두 중상을 입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오동근 군의 시신을 안치한 서울기독병원에 사건 발생 이틀 뒤에 경찰병력이 침투하였고 오군의 시신을 탈취하여 화장까지 해버렸다고 한다. 결국 이 사건을 통해 독재정권의 비인간성은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5)

그후 상계동 투쟁 과정을 담은 한국독립영화의 대표적인 작품인 김동원씨의 ‘상계동 올림픽’ 이 제작 되어 독립영화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 인권의 유린의 상징이 된 신당동

신당동에서는 1985년 4월 26일 서울시의 고시가 있었고 1986년 10월 31일 강제철거가 진행되면서 문제가 촉발됐다. 구청의 철거반원과 경찰 등 1,500여 명이 투입되어 철거가 강행되자 주민들은 사전통고 없이 자행된 철거에 맞서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면서 가옥주 대책추진위의 회장인 고춘삼 씨의 아들 고희남(당시 한양대 1년)이 인부들에게 폭행당해 뇌 파열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연강철 어린이는 화장실에 빠지는 일도 일어났다. 또한 김어간 씨와 이영식 씨가 조합사무실 2층 난간을 점거하면서 강제철거에 격렬히 저항하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근처에 휘발유를 부으면서까지 필사적으로 경찰에 저항을 했던 것이다. 특히 이영식 씨는 마지막으로 자식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었으나 경찰이 이를 거부하자 몸에 불을 붙이고 조합사무실에 뛰어 들었다. 경찰들이 급히 소화기를 두사람에 몸에 뿌리고, 두 사람을 연행하려 했으나 결국 화상 정도가 가장 심한 김어간 씨는 병원에 호송되고 말았다.6)

1986년 12월 2일에는 신당동 철거민이었던 최홍숙 씨가 화를 당했다. 당시 이미 신당동 일대의 재개발구역은 10월 31일에 철거가 완료된 상태였다. 하지만 세입자들은 철거로 폐허가 된 땅에 새로이 비닐천막을 짓고 살고 있었다. 그러자 12월 2일 철거반원들이 이 비닐천막마저 철거하려고 했고, 신당동 철거민들이 이에 강하게 저항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최홍숙 씨는 무자비한 철거폭력에 항의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다. 경찰은 주민들이 지키려했던 시신을 사인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리고 12월 4일 오전에 경찰 측에 의해 최홍숙 씨의 시신은 매장되었던 것이다.7)

신당동투쟁을 통해서는 이밖에도 많은 피해사례들이 보고되었다. 1987년 9월 2일에는 포클레인 1대와 철거반원 20여 명이 술을 먹고 1지구 천막을 철거하면서 주민들과 격렬히 충돌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철거반원들은 김효순(여 23세)의 바지를 찢고 끌고 다니는 등의 짓을 저질렀으며 장덕례(여 64세)씨를 폭행하고 최오란(여 59세)씨의 안면과 흉부로 강타해 실신시키는 등의 만행도 일삼았다. 또한 철거를 위해 쌓아놓은 흙더미로 주민을 밀어 넣고 생매장하겠다고 위협을 한다거나 철거반장이 속옷만 입고 여자 혼자 있는 집에 뛰어 들어가 그 여성을 모욕하고 희롱하기도 했다.8)


3. 88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행사와 노점상 투쟁9)

  80년대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인 노점상 [출처: 전국노점상연합회]
1980년대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정권 시기에는 정권의 비정통성을 은폐하고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유독 국제적인 행사를 많이 개최하였다. 대표적으로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등의 행사를 치르면서 이들 대회를 통해 짧은 시간에 고도성장을 이룬 성과를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바빴던 정권의 입장에서 길거리 노점상들은 눈에 가시와 같았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거리질서의 확립이나 도시환경 정화라는 명목으로 노점상들은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야 했고 무자비한 단속 앞에 미천한 존재가 되어야 했다. 이들에게는 존중받아야 할 인권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고 단지 불법을 저지르는 범법자로만 인식될 뿐이었다. 이렇듯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이라는 화려한 국제행사의 이면에는 노점상과 철거민으로 대표되는 도시빈민들의 피와 눈물이 점철되어 있었다.

몇가지 단속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6년은 4월의 성남 모란시장의 폐쇄반대 투쟁이 벌어지면서 한 노점상이 자살을 기도했으며 서울운동장의 노점상 오정례(여 50세) 씨가 단속으로 인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육교에서 투신자살을 하였다. 이밖에도 그해 12월 16일 수원의 김유태(남 27세) 씨가 분신자살을 기도한 사건까지 일어났다. 손수레를 끌고 화장지 행상을 하던 김유태 씨는 시청 단속반에 적발되어 이제는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시장을 찾아가 면담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면담을 거부당한 김씨는 ‘굶어 죽으나 불에 타 죽으나 마찬가지다’ 라면서 분신을 기도해 중화상을 입고 병원에 옮겨졌다.

또한, 안산 노점상들의 철거항의 시위도 1986년 격렬하게 진행되었는데 1986년 7월 7일 안산시 플라자 호텔 앞에서는 2천여 명이 모인 노점상 집회가 열렸었다. 그러자 전투경찰들이 무차별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집회를 강제 해산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두 살 박이 어린 아이가 최루탄에 맞아 기절하고 상가 할아버지 한 명도 머리를 심하게 다치는 등의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흥분한 노점상들은 온몸으로 전경들을 몰아내었고 다시 그들 중 3백여 명은 평화적 거리행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경찰당국은 이 평화적 행진조차 가로막으면서 다시 최루탄을 발사하고 무차별의 구타를 자행했다. 그리고 그들 중 34명을 연행하였고 다음날 보조차량 4대와 대형버스 2대에 철거반을 동원해서 철거를 단행하였다.

당시의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생적인 대응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몇몇 선진적 활동가들과 노점상들의 목적의식적 활동이 시작 되었다. 당시 남대문 상조회와 민중 신용협동조합, 민중 교회 등을 통해 이러한 활동이 전개되었었지만 정권의 강력한 물리적인 탄압에 의해 이들의 활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이 차츰 축적되면서 1985년 IMF/IBRD 총회를 앞두고 자행된 단속을 계기로 ‘노점상 생존대책위’라는 좀 더 발전된 형태의 조직이 만들어 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1986년 아시안게임을 끝내고 그해 12월 29일에 ‘도시노점상 복지연합회’로 결실을 보게 된다. 도시노점상 복지연합회10)는 당시 청계천과 동대문 일대의 책 노점상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주로 노점상 간의 친목과 상호부조 및 복지증진을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하지만, 도시노점상 복지연합회는 일정한 조직체계와 사무실조차 갖추지 못한 매우 열악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체계적이고 힘 있는 사업을 전개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 노점상의 조직된 투쟁 6.13대회

  80년대 노점상의 시위모습 [출처: 전국노점상연합회]

1987년 정국은 4.13호헌 철폐투쟁과 연이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에 따른 전 민중적 항쟁으로 말미암아 전면적 투쟁의 물결로 넘쳐나고 있었다. 특히 그해 6월에는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민중들의 힘이 전국적으로 분출되었고 이러한 힘은 바로 6월 항쟁의 배경이 되었다. 곧바로 이어진 6.29선언을 통해 한시적으로나마 투쟁은 가라앉는 듯했으나 또다시 7월과 8월 노동자들의 전국적인 파업과 투쟁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다.

한편, 이러한 항쟁을 통한 민주주주에 대한 열망과 정치적 공간의 확대는 노점상의 투쟁과 조직화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87년 여름 명동성당에서는 노점상 대동제를 치루면서 10월 19일에는 도시노점상 과 영세상인 보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도시노점상연합회(이하 도노련)’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도노련은 종로 지역을 비롯하여 20여 개의 지부와 4백여 명의 회원들을 갖추고 명동에 독자적 사무실을 마련하며 규약과 사업목표 등을 제정하게 되었다.

도노련은 1987년의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1988년 4.26총선 기간을 이용해 4월 18일 종로성당에서 5백여 명이 모여 공청회를 개최하면서 국제행사와 올림픽을 빙자한 노점단속 및 강제철거의 중지와 노점상에 대한 도로교통법 적용과 구류제도의 철폐를 요구 하였다. 이밖에도 도노련은 조직의 목표를 스스로의 경제적 이해와 요구를 넘어 ‘민주 쟁취와 생존권 쟁취로’라는 시대의 정치적인 요구까지 발전 시켜나간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결의 하였고 단속반과 경찰에게 매일 주었던 상납을 중단하고 노점상의 질서와 규칙을 마련해 ‘자율질서’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전개하고자 결의를 모의기도 한다. 이러한 결의는 노점상 단체가 운동성을 갖는 조직으로 거듭나며 우리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결합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는데 당시 진보적인 청년운동조직인 ‘사회민주주의 청년연맹’의 적극적인 참여와 개입이 이러한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급기야 88년 서울올림픽을 의식한 대규모 단속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자 생계에 위협을 느낀 노점상들은 1988년 6월 13일 성균관대학교 금잔디광장에 결집하여 ‘노점상 결의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날 모인 노점상들은 무려 3천여 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이들은 노점상단속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내무부 항의를 위해 행진을 벌이며 창경로 앞까지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17명의 노점상이 부상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면서 노점상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그러자 전국의 노점상들도 언론을 통해 ‘노점상 대회’의 소식을 접하면서 연합회에 속속 결합했던 것이다. 4월 안양, 8월 광주 그리고 연말까지 수원, 인천, 부산, 경주, 원주, 제주, 대전, 성남, 목포 등지의 전국에서 연합회에 가입하거나 참여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고려대학교에서 2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노점상 생존권을 위한 대중토론회를 열고 또다시 서울시청까지 행진하며 거리홍보전을 전개했다. 또한, 다시 성균관대학교에서는 노점상들을 중심으로써 철거민들과 기독교, 천주교 빈민단체들이 모여 반민중적 올림픽 개최로 탄압받는 ‘도시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함으로써 마침내 도시빈민들 연대투쟁의 장이 열리게 된 것이다.

- 노점상들의 대단결이 시작되다

88년 서울올림픽은 이 땅 민중의 것이 아니었다. 실상 올림픽이란 행사는 독재 권력의 유지와 이윤창출을 위한 도구로 이용될 뿐이었다. 당연히 이 땅의 기득권자들에게 노점상을 비롯한 도시빈민들은 올림픽을 참관하는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88년 9월 마침내 노점상들은 스스로 올림픽 대동한마당 행사가 준비하였다. 이시기 내무부에서는 노점상단속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는 발표를 내보내기도 했지만 결국, 경희대학교에서 5천여 명의 노점상들이 참여한 노점상 올림픽 ‘대동한마당’이 치러졌다. 전국의 노점상들이 모여 손수레 끌고 달리기와 줄다리기 등의 운동회를 펼쳤다. 이날 노점상 스스로는 서울 올림픽과는 다른 ‘민중올림픽’이라 명명했던 것이다. 휘각소리에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던 노점상들이 아닌 것이다. 이들은 이제 동지를 알고 조직을 알았으며 단속에 맞서 집단적인 힘을 발휘 했을 때 이들의 자부심은 정말 대단했던 것이다.

한편, 1988년 10월 도노련은 ‘전국노점상연합회(이하 전노련)’로 개칭되며 본격적인 노점상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어 1989년 2월에는 규약을 개정하고 지부-지역-중앙의 체제로 조직을 개편했으며 총회와 중앙위원회, 운영위원회 등의 의결구조를 확정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정권은 곧바로 ‘노점상 종합대응정책’을 1988년 11월 5일에 발표하고 ‘노점상 양성화 계획과 노점상 관변조직 결성 등의 노점상 회유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강제 이주시키는 방안 등을 마련하면서 고도의 탄압책을 준비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전노련의 대응조직으로서 관변조직을 적극 육성하고 노점상 거리를 설치하여 노점상에게 입주카드를 발급한다는 것 등이 이러한 유화책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를 통해 그동안 탄압 일변도였던 정부의 노점상정책이 표면적으로는 변화하는 듯했으나 관변조직의 육성을 통해 서 체제내로 포섭 관리정책을 펼치지만 정권이 실제로 의도한 바는 규모가 커지고 확대되는 전노련의 와해였다. 즉 전노련 소속의 노점상과 말잘 듣는 노점상들과 분리시킴으로써 전노련 조직을 와해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점상 대책 안은 2천 년대 들어서도 각 지자체별로 ‘노점관리 대책방안’과 ‘노점상 실태조사’ 그리고 ‘노점상 유도거리’ 조성을 중심으로 조례안을 추진하는 등 현재까지 집요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각주)-----------------
1) 김형국, “빈민들의 주거형편에 대한 법적 지위” 『불량촌과 재개발』 (나남 1989년) p319
2) 한국도시연구소, 『철거민이 본 철거』1998년 p129
3) 정동익, 『도시빈민연구』(아침 1985년) pp184-185
4) 박유미, “상계동 철거반대투쟁 분석” 1989년 서강대학교대학원 사회학 석사논문
5) 전국빈민연합, 『빈민열사 자료집』1999년 p10
6) 천주교도시빈민회, '신당 6동 보고서' 1986년
7) 전국빈민연합, 『빈민열사 자료집』1999년 p9
8) 한국도시연구소, 『철거민이 본 철거민』 1998년 p154-155
9) 최인기, “전노련 10년 역사를 더듬어 본다” 『해방수레를 끌며 2호』 (전노련 1996년) pp16-73
10) 86년 도시노점상 복지연합회는 87년 도시노점상연합회, 1988년 전국노점상연합회, 2004년 전국노점상총연합으로 명칭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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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 참사 이후 재개발 문제는 계속되고 있지만, 관심있는 독자들도 꾸준한 소식을 접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계속되는 뉴타운과 재개발, 철거 소식을 참세상에서 계속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이런 재개발과 저항, 투쟁의 역사는 꼭 남겨지고 공유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획을 많이 다루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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