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거를 앞둔 난곡의 모습 [출처: 인터넷자료] |
80년대 후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도시빈민을 둘러싼 정책들도 과거에 비해 눈에 띄는 변화가 시작된다. 정권의 정통성이 부재한 조건 속에서 이를 무마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이 등장하는데 노태우 정권은 공공 영구임대주택의 보장을 일시적으로 약속하지만 이는 곧 건설자본 이윤창출의 걸림돌로 인식되면서 극심한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자 임대주택이 남아도는 문제가 발생해서 영구임대주택은 우리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노태우 정권은 곧바로 영구임대주택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선회하기에 이른다.
이런 논리에서 세입자들의 문제를 영구임대주택이 아닌 보상금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따라서 영구임대주택은 시행된 지 불과 2년 만인 1991년에 공공임대주택으로 전환되었고 실질적으로는 폐지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서울시의 주택재개발 업무지침 제23조 13항의 2에서는 ‘세입자는 주거대책비와 영구임대주택 중 택일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 조항은 다시 1992년 8월 5일에 변경되는데 이때의 논리가 ‘민간부문 임대주택의 시장 활성화하려는 것이다. 세입자들은 집보다 돈을 원한다. 공공임대주택은 영구임대주택을 대체한 것이다.’와 같은 것이었다. 이런 논리에 따라 영구임대주택은 공공임대주택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처럼 영구임대주택을 공공임대주택으로 변경한 의도는 사실 다른 데에 있었다. 공공임대주택은 보증금이 900~1,000만 원 수준이었고 월 임대료는 15평 기준으로 약 9만 원 선이었던 데 반해 영구임대주택은 보증금 400만 원과 월 임대료 4~5만 원 정도였던 것이다. 즉 공공임대가 2배쯤 비싸서 도시빈민으로서 입주조건은 더욱 까다로워진 것이다. 영구임대주택은 국가와 관할구청이 관리하도록 했고 전매할 수 없기 때문에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될 수 없었으며 투기근절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공임대는 5~50년 이후에는 분양할 수 있었으므로 주택문제 해결의 대안이 될 수 없었고 공공임대 입주자가 주거 5년이 지난 후 분양을 받을 조건에 이르지 못하면 다시 세입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실제 공공임대 입주가구의 상당수는 임대료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임대료와 관리비를 체납하는 가구도 많았던 것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장기체납으로 인해 강제퇴거를 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노태우정권시기 철거민들의 희생
1987년 6월 항쟁으로 통치력이 약화된 군부정권은 6.29선언과 이어진 대선에서 또다시 집권을 하게 되었지만 노태우 정권의 집권 이후 1988년 4월의 총선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탄생했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도시빈민 투쟁 특히 철거민 투쟁은 대단히 격렬하게 진행 되었다. 특히 대부분의 도시빈민투쟁은 열사들의 계속된 죽음을 바탕으로 사회적 관심을 끌며 진행이 되었다. 비교적 자료가 잘 남아있는 몇가지 사례만 언급을 해보도록 하겠다.
- 돈암동 투쟁과 영구임대주택 쟁취
1988년 4월 서울시청으로부터 사업계획결정 고시일 (86년 1월)에 한해 지역 내 1개월 이상 거주하고 2인 이상의 직계존비속으로 구성된 주민등록등재 정상세대에 한하여 구역 내 소형아파트 방 1개 특별 분양권 내지 2개월분 주거대책비 중 택일 할 수 있도록 하겠음 이라는 공문이었다. 이에 5월 4일 세입자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돈암동 세대위는 투쟁에 나서게 된다. 돈암동 세입자 대책위는 6월 약 1천 3백여 명이 모여 “도시빈민 생존권 및 주민주택 쟁취대회” 를 개최하여 평화적인 행진을 하던 중 삼선교에서 경찰과의 충돌로 강미옥(여 29세)외 주민 23명이 커다란 부상을 당하게 된다.
1989년에는 1월에는 “도시빈민 생존권운동 탄압 폭로 규탄 및 분쇄 결의대회”에 6백여 명이 참여하는 등 강제철거에 맞서 투쟁을 전개 하였으나 2월 2일부터 전경과 백골단 1천여 명이 들이닥친 대대적인 탄압이 펼쳐진다. 이러한 와중에 2월 18일 오후4시경 암세대위 부위원장이었던 정상률는 같은 동네 세입자였던 권영춘씨(여 31세)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세 들어 사는 집의 가옥주가 행패를 부리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다른 세입자 한명과 황급히 권영춘씨의 집에 달려가 보니 가옥주 신광선(남53세) 가 만취된 상태에서 갑자기 식칼을 빼들고 정상률씨의 가슴을 찔렀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으로 정상률씨는 얼마가지 않아 사망하였다. 정상률씨를 사망으로 이르게 이 사건은 단지 가옥주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바라 볼 수 있는게 아니였다. 이사건의 이면에는 영세한 가옥주와 세입자간의 필연적인 갈등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바로 주택이 주거의 목적보다는 이윤을 창출하는 하나의 도구로 전락한 조건아래 근본적으로 재개발 지역의 투기바람을 일으키는 정부, 건설회사, 투기꾼들이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돈암동 철거반대 투쟁은 조직폭력배의 난동으로 점철된 투쟁이었다.
1989년 10월에는 회의가 끝난 후 해산하는 주민들 중 이경수씨에게 조직폭력배들이 난입하여 가스총을 쏘아 정신을 잃게 한 후 해머로 등을 가격하고 사시미 칼로 손목을 찌르며 우측 대퇴부를 난도질 하고 피를 흘려 쓰러져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폭력배가 왼쪽 상 완부를 손도끼로 가격하고 쇠파이프로 내리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사당의원에 입원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밖에 이날 조직폭력배의 난동으로 주민 5명이 커다란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곧바로 ‘서철협’ 주관으로 ‘돈암동 살인테러 규탄집회’ 를 서울역에서 개최하고 성북서 앞에서 항의농성을 벌인 끝에 조직폭력배 전원구속과 폭력을 사주한 재개발 조합장 구속되었다.1)
이러한 투쟁 끝에 1990년 3월 26일 돈암동 세대위는 구민회관에서 진행된 구청장 간담회를 통해 “세입자들의 요구를 받아 들여 영구임대주택을 건립 하겠다” 는 약속을 받아내고 4월 10일 재개발 조합장 오병천과 영구임대주택 건립에 대한 공증서 작성을 마치게 된다.
- 폭력으로 점철된 신정동 투쟁
1989년 4월 합동재개발 결정 고시가 된 이후 1991년 9월 1차 강제철거로 적준 철거용역반원 약 400여명이 투입이 되었다. 이로 인해 철거민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부상당한 사람들에 대한 상해자 보상 문제를 가지고 조합측이 세대위로 협상을 요구하여 이에 응했으나 진전이 없자 세대위는 즉각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지역에 상주해 있던 철거용역반원이 주민들을 집단 구타하고 부녀자의 옷을 벗겨 카메라를 들이대는 등의 강제추행을 시도하는 등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밖에도 동절기 강제철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1992년 1월 7일 또다시 철거용역 깡패와 경찰 약 5백여명이 투입되어 주민 7명이 다치는 부상을 당하기 하였으며 다음날 이에 항의하는 주민들에게 소주병을 던지는 등 쇠파이프와 각목을 휘둘려 주민 한명이 갈비뼈 5대와 엉덩이뼈가 부서지는 부상을 당하고도 옆에서 경찰들은 수수방관하거나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폭행과 폭력이 계속 이어지다 1992년 4월 3일 마침내 대대적인 강제철거가 또다시 시작된다.
전경 7개 중대와 포클레인 8대, 철거깡패 400여명이 동원이 되어 강제철거와 폭력이 이어졌으며 목동 14단지까지 밀려나도 주민들은 저항을 계속했다. 이 사건 이후 경찰들은 강제철거에 항의한 주민들 이춘복씨와 오정섭씨등을 폭행혐의로 구속하였다. 오히려 오정섭씨는 철거 용역 반에 구타를 당해 전치 6주의 진단을 받은 상태였으나 이에 고소당한 철거용역반원은 불기소 되는 형평에 어긋나는 법적용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2년 4월 30일 ‘신정동 강제철거 저지와 영구임대주택 쟁취를 위한 대책회의’ 주최로 약 3천여 명의 결의대회를 개최하여 구청을 항의 방문하기 위하여 오목교 쪽으로 이동을 하자 전경과 백골단이 투입이 되어 약 2시간 30분 동안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주민과 충돌하여 생후 14개월 된 아이를 업은 주민이 경찰들의 발에 밟히거나 연대투쟁에 참석한 학생 37명이 강제 연행이 되는 등의 투쟁이 전개 되었다.
이밖에도 1992년 6월 9일 또다시 행정대집행으로 전경차 6대와 철거 용역 반 1천여 명 포클레인이 동원된 철거가 강행이 되었고 이에 항의를 하며 주민 124세대는 뚝방위에 임시천막을 설치하고 농성에 들어가는 등의 투쟁을 전개 하였다.
- 끝없이 이어지는 철거민들의 죽음과 희생
88년 5월 3일 이창옥(남,73세) 양평동 강제철거 이후 오랜 천막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1989년 1월 11일에는 신정2동 295번지 세입자 황인출씨 집에 갑자기 강제철거가 들어왔다. 가옥주 하오석씨 외 5-6명과 철거깡패 4-5명이 아무런 사전 통고 없이 철거딱지를 부착하기 위하여 황인출씨 집에 들이닥친 것이다. 이들은 대문을 열어젖히고 딱지를 붙이려고 창문을 넘어오다 유리창을 깨뜨리게 되었다.
이 소란에 잠자고 있던 황경호군(당시 2개월 15일)이 놀라 울음을 터트렸으나 현장을 목격하고 있던 신정서 정보과 형사들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후 황군은 심한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몸에서는 열이 심하게 났다. 황군의 어머니는 목동 14단지에 있는 심소아과를 찾았으나 의사는 놀라면 누구나 일으키는 경기라고 하면서 약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경호군의 울음과 신열은 그칠 줄 몰랐다. 1월 13일엔 영등포 소아과를 찾았고 한강 성심병원으로 옮겨 입원하였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산소호흡기 없이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때였다. 다음날 오후 4시경 소생가능성이 없으니 퇴원하라고 하여 결국 산소호흡기를 떼어 낸 황경호군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89년 5월21일에는 강병채 씨가 일산신도시 계획에 반대하며 음독자살을 하였다. 사당2동 투쟁은 노태우 정권시기에도 이어졌다. 이혜영양은 철거민 이명식 씨의 딸로 당시 4살이었다. 이혜영양은 사고발생일인 1989년 6월 20일 오후 8시경 철거 촌에서 놀고 있었다. 이양은 재개발사업 이후 철거되었지만 완전히 처리되지 않은 철거가옥 위에서 놀다가 거꾸로 떨어져 정수리 부분이 함몰되고 뇌출혈 혼수상태에 빠졌다.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치료비조차 마련하지 못해 의식불명인 채로 성모병원에서 집으로 그리고 다시 서울대병원을 거쳐 또다시 서대문 적십자 병원으로 옮겨 다녔으나 결국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22일 오후 21시경 사망하고 말았다. 이혜영양의 사망은 기본적으로 닥지닥지 붙어있는 영세촌의 특징, 즉 한 집이 부서지면 인근의 집이 도미노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를 무시한 강제철거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밖에 89년 6월 24일 박용술(남, 당시 54세)씨가 신도시개발을 비관하여 목매 자살하였고 89년 9월 5일 한지영(남, 당시 31세) 씨도 ‘일산 송파신도시개발반대 투쟁위원회’ 투쟁에 앞장서다 ‘내가 죽어 신도시가 백지화된다면’이란 말과 함께 아들을 부탁하고 목매 자살하였다. 신도시 개발을 진행하는 과정 속에서 자살자가 속출하였다.
이영길 씨는 부산 문현1동 철거민으로 세대위 행동대장으로 활동하였으나 91년 3월28일 세대위 사무실에서 철거반원의 소행으로 보이는 이들에 의해 폭행으로 살해당하였다. 인불명의 변사사건으로 처리 되었다. 4월2일 하오8시 ‘문현동 세대위 주민장’으로 거행되었다.
1990.12.9 노량진2동에서 세입자 김효순 씨가 강제철거에 비관 목매달아 자살하였고 1990.12.27 노량진 재개발지구, 새마을 취로사업 반장인 송봉용 씨가 빨리 집을 비우라는 집주인의 독촉에 고민하다 쓰러져 끝내 사망하였다.
1991.5.11 월계동 택지개발지구. 생활보호대상자로서 주거문제를 비판해오던 이시현(46세, 남)씨가 목매어 자살하였다. 생활보호자용 영구임대주택이 주어진다는 통보를 방고도 보증금을 낼 돈이 없어 포기하고 앞으로의 막막한 주거대책에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1.5.15 노량진 재개발지구.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4만원을 내고 세 자녀를 돌보며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온 이종화씨가 39세로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였다. 이에 앞서 가옥주는 5개월 전부터 전기와 수도를 끊고 이주를 종용하였고, 5월 10일에는 조합 측과 가옥주가 뚜렷한 주거해결 방안도 내놓지 않은 상태에서 전면철거를 강요하였으며, 더구나 가옥 주는 재산세까지도 전부 납부하라고 하였다. 이에 세 자녀와 더불어 극히 어려운 살림을 꾸려오던 상황에서 생활을 고민하다. 5일간 식음을 전폐한 채 괴로움에 시달려왔다.
김선호(남, 당시32세) 씨는 부산 장림1동 철거민대책위를 주도적으로 결성하고 교육부장, 총무를 역임하며 앞장서서 투쟁을 하였다. 그러다 92년 ‘끝까지 투쟁하여 주거권을 쟁취하자!’고 외치며 강제철거를 저지하다가 철거용역들의 집단폭행으로 사망하였다.2)
범죄와의 전쟁과 노점상 탄압
1988년 4월의 총선 결과인 여소야대 에서 도저히 안정된 정국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한 정권은 때마침 발생한 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양의 방북사건을 계기로 주도권을 회복하고자 공안정국을 기획했는데 이러한, 공안정국과 맞물리면서 노점상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단속이 한층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노점상들은 스스로를 단결하고 전국적인 조직으로 거듭나기 시작하였다. 단속의 강도가 커질수록 이들의 조직력은 단단해져 갔다.
1990년 1월에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의 3당을 합당하고 보수 대연합을 구축한다. 뒤이어 정권 차원에서 기획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를 이용해 민중 탄압의 고삐를 바짝 쥐게 된다. 이러한 정세는 곧바로 노점상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선 정부는 각 시, 군, 구별로 노점상 절대 금지구역(노점을 하지 못하는 지역)과 상대 금지구역(노점을 허용하되 오후 6시 이후에만 영업할 수 있는 지역)을 확정한다. 이에 전노련에서는 고심 끝에 일차적으로 스스로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해서 시민들의 지지와 이해를 얻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다. 따라서 전노련 소속의 전체 노점상들 대상으로 손수레와 좌판을 크기를 규격화하고 질서를 확립하는 등의, 지역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노력을 전개했다.
1989년 명동성당 36일간의 노점상대투쟁
그러자 89년 6월부터 언론을 통해 기업형 노점상을 부각시키고 폭력배와의 연계, 금품 갈취 등의 문제를 확대하여 선전하게 된다. 극소수의 문제를 노점상 전체의 문제로 매도함으로써 노점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유포시키고 소위 절대 금지구역과 상대 금지구역의 설정을 통해 노점상 간의 분열을 조장하면서 단속분위기 조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대대적인 노점상 단속은 5공 청산과 광주문제의 해결, 중간평가 등 산적한 정치현안들을 무마하고 민생치안 부재현상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호도하려는 정치적인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1989년 봄에는 ‘전국 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는 등 전국의 대중조직이 발전의 선상에 있었으며 전노련의 회원도 전국적으로 1만여 명으로 늘어났고 학생단체 또는 사회단체와의 연대활동도 과거보다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89년 7월 마침내 서울시와 정부는 길거리 노점상들을 대상으로 한 일제단속을 시작하면서 굴착기와 차량 수천 대를 동원하고 용역 깡패와 경찰, 단속 공무원 등의 수만 명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전노련은 1989년 7월 20일 동국대학교에서 규탄집회를 열었으나 원천봉쇄가 되자 노점상 수천여명이 명동성당에 집결하여 36일 동안의 장기 농성에 들어간다.
그리고 집회와 거리 시위, 선전전 등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투쟁을 전개해 갔으며 하루 평균 인원 3~5백여 명이 모여 서울시청과 정부종합청사 진격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자 전투경찰이 노점상들이 농성을 하고 있는 농성장은 물론 성당 안쪽까지 취루 탄을 발사하였다. 당시의 노점상들은 뜨겁고 지루한 장마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런 와중에서 명동의 노점상 박호균(남) 씨가 분신하여 3도의 화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탄압으로 말미암아 당시 노수희 수석부회장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30여 명의 회원과 노점상들이 구속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격렬한 노점상들의 투쟁에 놀란 정부는 마침내 대책 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 1천여개 와 전국적으로 3천 개가 넘는 합법화된 가로판매대를 설치하고 노점상 융자나 농촌으로의 이주자금 지급, 직업훈련, 취로사업 등을 대책 안으로 내놓게 된다. 이러한 대책 안에 대해서 어떻게 볼 것인가? 이는 분명 노점상의 투쟁을 통해 관철된 성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가로가판대로 흡수된 합법화된 노점상과 기존의 일반 노점상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사회적으로 일반 노점상에 대한 단속의 명분을 만들었다.
이러한 대책이 있은 후 서울시는 가로가판대와 관련된 조례안을 최근까지 조금 씩 수정하기 시작해왔다. 급기야 2007년 개정된 ‘서울특별시 보도상 영업시설물 관리 등에 관한 조례’에 따르면 가로가판대에 대하여 점차적인 감소를 주장하고 있는 상태다 3) 1989년 명동성당의 투쟁이후 합법화 된 ‘가로가판대’ 노점상은 정부의 회유정책과 이에 따른 회원들의 이탈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가로가판대는 전체 노점상들의 생존권을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욱 다져지듯이 전망과 대안을 마련하고 앞으로 노점상운동이 나아가야 할 바를 진지하게 모색하는 데 있어서 많은 교훈을 남기게 된다. 이당시 가로가판대를 노점상들에게 던져준 당근은 이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채찍이 되어 돌아왔다.
이재식 열사“이 한 몸 바쳐 노태우 정권에 경고한다”
▲ 이재식 열사의 모습 |
“노점상을 시작한 것이 7월이었어요. 거리는 몹시 뜨거웠어요. 며칠 일하자 저는 실신해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한두 달은 쉬웠습니다. 그리고 9월 22일경부터 일수 돈을 빌려 손수레를 고치고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얘들 아빠는 저한테 “단속이 와도 걱정하지 말고 일을 계속하라.”고 하곤 했어요. 일을 계속한 지 한 달도 못 되었는데 제가 있던 곳도 단속반이 나타났습니다. 10월 13일부터 14일까지 아수라장이었어요. 도청에서 나온 단속반은 닥치는 대로 좌판과 손수레를 뒤집어엎고, 아주머니들은 울부짖고, 그런데 16일 아저씨는 괜찮다고 하시면서 반죽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오토바이에 반죽을 실어 나가셨습니다. 조금 후에 제가 나갔는데 단속반 15명이 둘러서 있었습니다. 반죽은 쓰레기 위에 버려져 있었고, 아저씨는 안 보이고, 그런데 그놈들이 저를 쓰레기 더미에 몸을 눕혀 버렸어요. 그러더니 그놈들은 “‘그 폼 좋다. 사진 잘나 오겠다.” 하며 실실 웃는 거예요.
저는 거제읍 사무실로 갔어요. 그랬는데 조금 후에 아저씨가 왔어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기에 씩씩거리고 있어요. 그때 직원들이 점심때가 되니깐 슬슬 빠져나가고 있었어요. 아무 말 않고 아빠가 밖에 나갔다가 약 20분 후 웬 사이다 큰 병을 사들고 들어왔어요. 저는 사이다인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 없었다면 목이 마르던 참이라 한 잔 달라고 하려던 참이었어요. 아빠는 의자 밑에 그 사이다 병을 놓아두었어요. 그때 계장인지 과장인지 하는 놈이 나타났어요. 그때 아빠가 일어나며 “대체 법이라 것이 무엇이냐. 물같이 바람같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거냐.”라고 다그쳐 물었더니 “장사를 하고 못하고는 당신들의 사정이니 마음대로 해봐라.”라고 외쳤어요.
그때 아빠가 무슨 쪽지를 그놈에게 던져 주고 밖으로 뛰어나갔어요. 그런데 밖에서 “여 봐, 어어!” 하는 아우성이 났어요. 깜짝 놀라 뛰어나가 보니 몸이 휘발유로 흠뻑 젖어 있었어요. 그때 몇 사람이 아빠 쪽으로 달려들었는데 아빠가 라이터를 켜며 자기 몸에 불을 댕겼어요. 순간 펑하고 불길이 치솟고, 순식간에 아빠의 몸은 불기둥이 되고, 저는 악 하며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과장에게 준 쪽지가 유서였어요.”
유서에는 이몸 불살라 노태우 정권에게 경고한다고 쓰여 있었어요. 노점상 단속과 관련하여 수많은 열사투쟁이 전개 되었으나 이재식 열사의 투쟁은 전노련의 역사가 짧은 상태에서 개별 노점상의 이해와 요구를 뛰어넘어 연대의식을 확장시킨 중요한 투쟁이 아닐 수 없다.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의 노점상들이 거제로 몰려가 항의투쟁을 전개했으며 이재식 열사의 시신을 서울로 모셔와 정권을 상대로 강도 높은 투쟁을 전개 해 나갔다. 중앙의 집행부가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투쟁에 임하느냐에 따라 그 조직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
- 92년 선거시기와 노점상투쟁
이전까지 단속과 생존권의 위협이 있을 때마다 야당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던 노점상들은 도시빈민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진보적 정치세력과 연대하여 빈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대내외적으로 전파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수많은 생존권 투쟁을 전개 하지만 이를 궁극적으로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실감하였지만 이들의 정치적인 요구를 받아 안고 승화 시킬 수 있는 진보적인 정치세력은 아직까지 가시화 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노점상들의 출신지역이 호남사람들의 비중이 많으며 그나마 자신들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바꿔 줄 수 있는 사람들은 민주당이라는 생각에 그쳐 있는 실정이었다.
전노련은 1992년 대선과 2월 총선에 대한 논의하면서 총선에서 빈민 후보의 출마를 결의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또한, 3월 5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열린 ‘도시빈민 생존권쟁취 결의대회’에 1,500여 명이 참여하면서 도시빈민 통일 대오 건설을 위한 ‘전국도시빈민협의회 발기인 대회’를 계획하였고 소순관 도시빈민후보에 대한 지원을 통해 선거투쟁과 대중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도시빈민 생존권 요구를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반민자당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한편, 총선기간에도 포장마차 등 조리 노점상에 대한 전면철거가 진행이 되었다. 여전히 단속의 양태는 전면적이고 싹쓸이 단속이었다. 그러자 전노련에서는 도시빈민 후보를 내세워 총선에 대응하는 한편 ‘노점상탄압 저지를 위한 대책위’를 구성하여 3월 24일부터 37일간 명동성당 안의 농성장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하였다. 물론 선거 결과는 미비했으나 독자적인 도시빈민 후보를 내세움으로써 노점상도 정치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선거기간에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진보적이며 변혁적인 정치세력의 필요성을 대외적으로 알려냈다. 그리고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병행함으로써 노점상들의 자율질서를 조건으로 일시적이나마 단속유보 방침을 내올 수 있었다.
이밖에도 송파구 신천역 현장 투쟁으로 수배 중이었던 노수희 의장과 노점상들이 구속이 되었다. 다시 7월 3일에는 여의도에 평화적으로 계획됐던 집회가 공권력의 원천봉쇄와 무자비한 탄압으로 저지되면서 2천여 명의 노점상들이 무차별적으로 구타당하고 연행돼 갔다. 특히 격분한 노점상들이 여의도 민자당으로 진격투쟁을 하자 경찰은 백골단을 앞세운 채 최루탄과 물대포로 쏘며 이를 저지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노점상 수십 명이 실신하거나 부상당하면서 여의도 성모병원 주변은 부상당한 노점상들로 넘쳐나기도 했다. 심지어 노점상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여의도에서 상반신 나체시위를 벌여 울음바다가 된 사건은 한국에서는 언론이 통제되어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CNN언론을 통해 다른 나라에 타전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점상 김창룡 씨의 분신과 박승학 씨의 자살은 노점상 투쟁의 열기를 더욱 촉발하는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1992년 8월 5일에는 ‘노점상 문제 시민의 의견을 듣는다’라는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규격 손수레 전시회를 종로에서 열면서 시민들을 상대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대 시민 홍보전도 병행해갔다. 그해 9월과 10월에도 계속된 규격 손수레 사업은 노점상 자립화· 합법화 사업과 맞물려 진행되었으며 특히 10월에는 국회와 서울시의회 청원 작업에 돌입하기도 했다. 92년은 총선과 대선이라는 시기와 맞물려 일 년 내내 노점상들에 대한 단속으로 점철된 한 해였다.
노태우정권시기 도시빈민운동
1990년대 초반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의 몰락과 문민정부의 등장은 운동진영의 방향에 커다란 혼란을 안겨주게 된다. 우리사회의 주택보급률은 계속 증가하면서 93년 69%로 증가하였으나 오히려 자가 보급률은 49.5%로 1985년도의 53.6%에 비해 하락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아래 철거투쟁은 정부의 순환식 개발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철거지역의 세입자에게 대한 임대주택 등이 보장되면서 세입자를 중심으로 한 철거민 운동은 과거에 비해 회원 수가 감소하게 된다.
이밖에 노점상의 경우에도 1990년대 초반 일시적으로나마 실업률이 낮아지고 대대적인 노점단속이 병행이 되면서 절대금지구역 상대금지구역 설정, 그리고 합법화된 노점상인 가로가판대의 등장, 정부의 관리아래 놓여있던 ‘환경개선협의회’ 라는 단체 구성 그리고 법과 제도적으로 벌금과 과태료 부과 등의 영향을 받아 1980년대 초중반 보다 노점상들의 규모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서울시 공식 발표로 노점상의 숫자가 서울지역만 1만 8천여 개의 노점상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고 보도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1990년대 노점상과 철거민을 중심으로 한 도시빈민운동 진영은 당사자들의 철거투쟁과 노점상의 단속투쟁을 넘어선 전체 운동의 전망과 빈곤문제의 일반적인 의제로까지 지평을 넓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90년대 경실련과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 진영은 빈곤을 둘러싼 일반적인 사회적 의제라 할 수 있는 교육과 주택, 보건의료등의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이를 추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정책전문가 중심의 입법청원 활동과 사회여론화 작업을 전개하면서 일정한 성과를 남겼으나 대중투쟁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하는 한편 IMF 환란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신 빈곤층과의 정책적·조직적 결합을 이루는 데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90년대 도시빈민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전국빈민연합과 전국도시빈민협의회
1989년 전노련과 서철협 등의 대중조직이 중심이 되어 ‘전국빈민연합(전빈련)’이 결성이 되고 이후 좀 더 확대된 틀로 1992년 7월 10일에는 전빈련(전노련, 전철연)과 천도빈(천주교도시빈민회), 기독교도시빈민선교협의회(기빈협), 지탁연(지역사회 탁아소 연합회), 서울지역공부방연합(서공연)이 모여 전국도시빈민협의회(전빈협), 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전빈협은 도시빈민운동단체로 가장 폭넓은 연대 단위를 아우르는 상시적인 공동 투쟁 기구였다. 그러나 전빈협은 전체 도시빈민운동 진영을 하나로 통합하여 제대로 조직할 만한 구심점이 되지 못했다. 80년대 이후 도시빈민운동은 크게 발전했지만 그 수준은 여전히 미흡했다. 전빈련을 중심으로 한 전노련, 전철연의 대중조직과 천도빈, 기빈협과 같은 종교와 빈민운동 지원 단체 그리고 지탁연과 서공연 같은 지역을 근거로 한 아동 혹은 교육 지원 단체 간의 도시빈민운동 외의 공통점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항상 불협화음이 내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빈곤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발생의 원인이나 빈민운동의 성격 규정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이 반복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밖에 대중조직을 중심으로 한 부문 주의적 사고와 대중출신의 지도자와 활동가들과의 정서적인 틈이 있었다. 독선적인 상층지도부의 품성과 일방적인 조직운영으로 인하여 내부 소통과 민주적 조직운영이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탁상공론이 맞물리면서 전빈협의 활동은 유명무실해지다가 결정적으로 1992년 대선을 둘러싸고 전개된 정치적 입장과 선거 방침에 따른 단체 간의 차이로 말미암아 그동안 잠재된 갈등이 적극적으로 표면화되면서 조직은 존폐 위기 까지 몰리게 되었다. 전빈협에 소속되어 있던 전빈련도 92년 당시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의 의장단 선출과정에서 전국노점상연합의 탈퇴와 철거조직의 분화, 기타 종교단체들의 역할과 전망 부재 등의 문제로 말미암아 활동이 위축되었으며 결국 전빈협은 조직이 해소되면서 이후 ‘빈민지원 센터’와 같은 활동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사실상 1990년대는 빈민운동의 침체기이자 각각의 활로를 모색하는 시기였다. 철거지역도 가수용단지를 쟁취하거나 임대주택을 확보한 이후의 전망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의 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즉 일반 빈민지역에서 진행되는 주민들의 일상 활동과 철거민들이 당면한 철거투쟁이라는 처지는 다르다는 것이 일반적인 고민이었다. 또한, 노점상들의 경우에도 단속에 맞서는 생존권투쟁을 벌이는 방식 등에서 철거조직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단속이 없으면 일상적 생활에서의 노점상들은 소소유자의 의식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다른 빈민운동단체와 잘 융합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일부 기업형 노점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이들을 도시빈민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까지 대두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도시빈민 당사자들의 문제의식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현장에서 다급하게 벌어지는 철거와 단속에 대응하기도 바쁜 처지였다. 그러나 빈민운동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측면에서의 체계화를 시도하려 노력했던 일부 활동가들의 고민은 현장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투쟁과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 시키는 작업 사이에 갈등과 고민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 단체들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지역 (재개발, 철거, 주민, 환경)에 따라 또는 직업 (노점상, 일용노동자)에 따라서 철거민조직이나 노점상조직 등으로 각각 분화되어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서철협의 조직운영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새로운 돌파구로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우선 일부 철거조직은 서철협을 탈퇴하여 1990년 6월 3일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주거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 도시빈민 지역운동
1987년 6월 투쟁을 통하여 거리로 나온 민중들의 투쟁은 1960년 4월 혁명 이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물론 민중들에게서 분출되는 힘이 일반 민주주의적 한계를 넘지 못했으므로 6.29선언과 같은 몇 가지 계기로 말미암아 운동 상황은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도 계급적·정치적으로 의식화되고 조직화하지 않으면 모든 투쟁이 사상누각으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따라서 6월 항쟁과 7~8월의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진 대중투쟁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각각 지역단위의 활동을 통해 거점과 진지를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90년대 한국 사회의 변혁과제를 수행하고자 각계각층이 광범위한 대중의 의식화와 조직화를 이루고 이에 따라 정치적 요구를 끌어내는 것이 운동의 선결과제라는 것이었다. 나아가 생산의 영역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생활조건과 요구조건을 결합하는 지역운동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지역에 대중적 기반을 둔 주민조직의 발전을 통해 정치세력화의 기초조직이 만들어 져야 한다는 입장을 토대로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도시빈민운동 단체들은 지역위원회와 지역협의회라는 틀을 새롭게 결성하여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밖에도 지방자치제가 본격화되면서 ‘우리 마을 발전추진회’, ‘지역주민단체 협의회’와 같이 지역의 선거에 대응하는 대중정치조직들이 생겨나거나 지역단위의 다양한 현안을 중심으로 환경운동과 공동체지향 운동 등의 실천으로 이어지게 된다. 철거투쟁이 끝난 이후 이들의 역량을 어떻게 보존할지를 고민하면서 주거연합과 기빈협 등 철거이후의 주민들을 상대로 공동체 사업을 일구거나 시도하는 일들을 모색해 나간다. 4)
그러나 지역운동의 또 다른 편향이 나타난다. 그것은 운동주체인 지역주민들은 지역 내에서 파생되는 현안에만 집착하게 될 뿐 전체 운동차원에서 요구되어지는 빈민운동의 계급적 연대와 대중투쟁을 소홀히 하게 된다. 결국 지역의 운동과 국가권력에 대응하는 전체운동을 통합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운동방식으로 귀결되고 이러한 운동방식으로 이후 김대중 정권들어 대두되었던 ‘생산적 복지정책’이나 노무현 정권의 ‘참여복지정책’의 일환인 ‘거버넌스’와 ‘제3섹터’를 강조하는 일련의 과정들에 편승하게 된다. 지역과 공간으로 확대되는 자본과 권력의 횡포에 맞선 광범위한 대응이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지만 지역에 안주하는 또 다른 편향이 지역운동에는 엄연히 존재하였다.
각주)-----------------
1) 서철협 소식지 ‘삶의 소리 호외’ 1989년 10월 16일
2) 전국빈민연합 열사추모제 ㅡ 자료집 98년
3) 한겨레, 2009년 6월 16일
4) 지역 활동에 있어서 이론적 배경은 사회학자 미뉴엘 카스텔과 데이비드 하비 등으로써 국가는 전체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유지를 위해 지배의 억압적 수단일 수 밖에 없지만 단기적으로는 계기에 따라 상대적인 자율성을 발휘한다. 따라서 국가에 의한 도시개입은 상호 모순적인 기능을 갖게 되는데 국가는 토지이용 계획이나 지역지구제 도시집적 과정을 촉진시키고 합리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게 되거나 자체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양한 집합적 소비수단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재정위기와 복지문제에 있어서 사회적 지출을 낮추는 문제가 생기고 소비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 되는 등 사회구조를 이루는 여러 층위 간의 모순들이 파생되거나 결합함으로써 도시사회운동이 나타난다고 함 / *도시사회운동 및 지역운동에 대해서는 참고문헌으로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