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역사를 다시 써가자

[진보논평] 노동이 노동을 배신하는 역사

현대 정규직 노조에 더 희망을 걸 것인가? 현대 비정규직 노조 파업에 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찬반 투표를 할 때부터 알았어야 할 것 아닌가. 비정규직 노조 파업을 접게 만들 것이 현대 정규직 노조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야 할 것 아닌가. 이제 과감하게 결별하자. 노동이 노동을, 노동자가 노동자를 배신하는 시대에 더 이상 정규직에 미련을 두지 말자, 깨끗하게 끝내자.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본과 협상하고 야합하는 시대에 비정규직 노조가 누구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정규직 노조와 그리고 자본과 결별하자. 현대 정규직 노조의 역사를 더듬어 보자. 남성 정규직 보장노동자에게 무슨 미련을 가질 것이고 무슨 기대를 품을 것인가.

노동 현장만 그런가. 정규직 교수 노조원이 심적으로는 다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외적으로 건네는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관심이 형식적이고 의례적으로 끝나는 마당에, 언제 정규직 교수들이 비정규직 교수들의 절절한 사연, 아니 조선대 서정민 교수의 죽음에까지 이른 그 기막힌 사연에 대해 언제 정규직 교수들이 집단적이고 법적인 행동을 보였단 말인가. 이 시대의 수많은 비정규직 교수들이 오랜 만에 찾아온 이 추운 겨울에 경북대에서 조선대에서 벌이는 투쟁에 어느 정규직 교수들이 집단적으로 도움을 주고 연대했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총선 때에는 총선대로 대선 때는 대선대로 거대한 정치판으로 진보 연대니 진보대연합이니 몰려다니면서 정작은 소수의 정치적인 행동에 무슨 연대를 했단 말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집안사람들』에서 알료샤와 조시마 장로가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을 보자. 바로 옆의 사람이 죽어 가고 자살하는데, 바로 이웃이 무너지고 있는데 저 먼 곳, 저 천상을 바라보라니? 노동자 민중들이 바로 우리 옆에서 몸에 신나를 뿌리고 투신하고 자살하는 이 세상에서 어느 정치가 도대체 진보적이란 말인가. 좌파는 바로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팔, 기가 막힌’ 수많은 사태에 대해 온 몸으로 싸우지만 그 싸움을 협상으로 대화로 종용하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우리가 모든 곳에서 이기지는 못했지만 목숨을 건 도약을 통해 그나마 가까스로 노동권을 지키고야 마는 이 시대에 누가 파업을 중단시키고 누가 투쟁을 접게 만드는가.

민주노총에서 밥 먹고 사는 간부들 중 상당수가 민주노총이 싫다고 하는 이 시대에, 민주노총이 노동운동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자임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 민주노총이 대동단결로 비정규직과 연대 투쟁을 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 남성적인 민주노총이 성희롱을 해도 유야무야 넘어가는 이 시대에, 정규직 노동에, 마초적인 남성 노동에, 정규직 보장 노동자에 무슨 희망을 가질 것인가. 결별하자. 노동 안에서 약한 자와 약한 계급부터 하나씩 배신해 나가는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결별을 선언하자. 깨끗하게.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 노동운동의 역사를 다시 써 나가자. 대학교 건물 계단 컴컴한 구석퉁이에 숨어 쥐새끼도 아닌 멀쩡한 인간이 밥을 먹어야 하는 청소노동자들로부터, 노동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나가자. 비정규직 민주노총이든 비정규직 전노협이든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대동단결로 노동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자. 정규직 노조가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부분집합 논리에 더 이상 매몰될 이유도 기대를 품을 이유도 없다.

결별하자. 결별하지 못 하겠다면 2010년 달력을 넘기지 말자. 노동이 노동을 배신하는 역사가 쓰일 2011년을 위해, 근로자에 의해 노동자가 억압당하고 노동자에 의해 노동자계급이 착취당하고 모멸당하는 2011년을 위해 달력을 넘길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이십 년 배반의 노동운동이 반복될 2011년이라면 2010년으로 노동이 노동을 배신하는 역사를 끝내자.

눈이 내리지도 쌓이지도 않은 거리는 가까워 보이지만 눈이 내려 쌓이고 빙판으로 변한 거리는 멀어만 보이게 마련이다. 언제 저 빙판 길을 걷다가 넘어지고 낙상 할지 모르겠지만, 눈이 내리고 눈이 쌓여도 새로운 길을 갈 도리 밖에 없다면 그렇게 가자. 어긋난 노동의 모든 형태들을 버리고 빙판 길을 조심조심 걸어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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