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현대 문명에 의해 잃어버린 인간 본래의 모습을 지향했으며, 자기의 철학을 현대의 정신적 상황에 명백히 연결지어서 수립하였다. 야스퍼스는 근대 이후의 의학이 질병의 객관화에 몰두한 나머지 환자의 고통과 이야기를 듣지 않고 질병만을 대상화해 ‘환자의 역사’를 ‘질병의 역사’로 바꿔버렸다고 질타하고 있다. 또한 기술 시대의 의사와 의학에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 책은 야스퍼스의 의철학적 사유와 정신분석/심리치료 비판과 관련된 강연과 논문 5편 <의사의 이념>, <의사와 환자>, <기술 시대의 의사>,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 <심리치료의 본질과 비판>을 모은 것으로, 정신의학·의학·정신분석·심리치료·철학 등의 다양한 영역을 관통하며 현대 의학의 한계 및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문제점 등을 철학적으로 검토하고 대안을 찾는 통섭적 사유를 보여준다.
<의사의 이념>, <의사와 환자>, <기술 시대의 의사> 세 편은 의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야스퍼스는 의사의 이념을 철학적으로 점검하고,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성찰하며, 현대에 실종된 의사의 인격과 휴머니티를 문제시한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기술 시대인 현대에 와서 의료 행위는 전문화·조직화·기능화되었고, 의사는 전문 기능인으로 변질되었으며, 의사와 환자의 관계 역시 비인격적 관계로 전락했다. 의료적 이념 없이 조직 운영에만 관심을 두는 병원, 환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질병에만 관심을 갖는 의사, 휴머니티 없이 자연과학적 지식에 기초한 치료에만 몰두하는 의술 ― 이것이 현대 의학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이러한 야스퍼스의 진단은 의술이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과 <심리치료의 본질과 비판> 두 편은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야스퍼스는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뇌 신화학(정신병을 뇌 질환으로 보는 가설)을 정신의학적 선입견으로 보고 정신병리학적 방법의 한계를 규정하고자 하며, 프로이트의 이론적 가정을 정신의학이 맞서 싸워야 할 편견으로 여긴다. 야스퍼스가 보기에 정신분석은 인과적 설명과 의미 이해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으며, 치료 효과도 의심스럽다. 심리치료 역시 자유롭고 실존적인 결단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대상화하고 객관화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철학적으로 성찰해야 하는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의철학/정신의학이라는 야스퍼스 철학의 숨은 광맥을 소개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하며, 실존철학에 대한 관심이 퇴색된 오늘에 야스퍼스의 철학을 ‘문제적’으로 읽을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동기로 해서 읽힐 책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의철학을 바탕으로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프로이트를 좋아하는 내공이 있어야만 독해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심리학과 의학, 철학을 두루 섭렵하고 싶다는 야심을 가진 독자라면 도전해 볼만 하다. 초록색의 하드커버는 다소 눈에 거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