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호 크레인, 그곳은 2009년의 용산이었다

[희망버스 탄압 불복종, 돌려차기](3) 새 인생 살게 해준 희망버스

2009년 1월. 대책 없는 재개발을 반대하며, 용역깡패에게 더 이상 맞을 수가 없다며 나의 시아버지와 남편은 건물옥상에 망루를 세우고 농성을 했다. 그러나 망루를 채 짓기도 전에 경찰과 용역은 한편이 되어 옥상에 있는 철거민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건물 아래에선 용역들이 불을 피워 철거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 후 25시간 만에 대테러부대인 경찰특공대의 무리한 진압으로, 철거민 다섯 명과 특공대 한 명은 싸늘한 주검으로 서른 두명은 그 자리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내 남편은 망루에 불이 다 꺼진 이후 극적으로 생존하여 중환자실에 옮겨졌지만, 일주일 후 부상이 체 낫기도 전에 병원에서 체포되어 바로 구속되었다.

솔직히 25시간 만에 모든 것을 잃게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 했다.

그곳에 올라가면 더 이상 용역깡패들의 폭력은 당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무엇보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사람’인 우리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리라 믿었다. 그 안에 있는 철거민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용산4구역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에 옥상까지 올라갔는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최소한 철거민도 사람이다, 사람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소리치고 싶었을 뿐인데, 한사람은 주검으로 한사람은 살인자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난 시아버지를 떠나보냈고 남편을 떠나보냈다.

355일 만에 치러진 장례가 편치만은 않았다. 진상규명이 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남편이 나의 곁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일당을 떠나고 다들 돌아갈 곳이 있었지만 난 돌아갈 곳이 없었고, 기다려 주는 가족이 있었지만 나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대했던 재판마저도 모든 잘못은 철거민들에게만 있다며 일방적인 판결로 내 남편은 5년형이 확정되었고, 그 후 증인출석을 하여 거짓진술을 했다며 위증죄를 적용해 4개월이 추가가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 얼마나 치졸하고, 야비한지 그제 서야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난 심한 우울증에 내 자신을 괴롭히며 살았다. 세상원망하며 나 혼자만 남겨둔 남편이 밉기도 했다. 그렇게 세상과 벽을 쌓고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을 무렵 한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원망과 절망으로 힘들어할 때 지인이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줬던 소금꽃나무의 주인공인 김진숙. 그녀가 150일을 넘게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35m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무조건 그곳에 가야만 했다.

희망버스. 그렇게 난 희망버스에 탑승 했다. 희망버스 안에서 한진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통보를 접했을 노동자들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절규가, 2009년 1월 우리가 외쳤던 절규였다. 버스타고 가는 내내 얼굴한번 본 적 없는 사람을 위해 기도 했다. 부디 살아서 내려오길 간절히 바랬다.

드디어 85호 크레인이 내 눈앞에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길게 줄지어 서있는 가족대책위 분들을 보니 너무도 가슴이 시려왔다. 2009년 내 모습과 같아서, 뭐라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이들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는데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리곤 지난 내 시간이 후회가 됐다. 바보처럼 세상원망하며 살았던 지난 시간이 부끄러웠다. 150일 동안 난 무엇을 하며 지낸 걸까? 이분들의 150일은 어땠을까? 생각하니 너무도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무조건 난 크레인에 가야만 했다. 그리곤 그곳에 갔다. 눈앞에 85호 크레인은 처다 볼 수도 없을 만큼의 높이였다. 그 순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곳은 2009년 용산이었고, 그 곳에는 나의 소중한 가족이 있었다.

크레인을 올라갔다. 물론 꼭대기까진 가진 못했지만 중간까지 올라갈 수 있기에 그곳까지 올라가 아래를 처다 봤다. 그 순간 난 알았다. 그곳은 용산이었지만, 용산이 아니었다. 85호 크레인 아래에는 용산의 처절함과 죽음에 문턱이 아닌 희망이 보였다. 용산에선 볼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의 힘이 있었고 희망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새까맣던 경찰들 대신 그곳은 전국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이곳에 다시 올 거라고. 그때는 저분을 꼭 땅에서 만날 수 있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렇게 난 희망버스를 통해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었다. 용산참사 유가족도, 구속자 가족도 아닌 인간 정영신으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 후 난 태어나 처음으로 소환장 이란 걸 받았다. ‘부산영도경찰서’. 웃음이 나왔다. ‘이제 유가족이란 약발도 떨어졌나’. 그 동안 용산에서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정작 우리 유가족들만은 경찰의 소환 남발에서 벗어났다. 오히려 우리가 한 행동도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뒤집어 쓰여 기소하고 재판받고 하는 일이 너무도 많아, 부산에서 온 소환장은 약간의 쇼크였다.

부산에서 조사받기가 힘드니 관할서로 이송해달라고 했고 결국 난 용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용산경찰서, 치가 떨리는 곳이지만 죄 없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어떻게 조사를 했을까 궁금도 하여 시간을 정해 갔다. 물론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나를 보고는 한 두 명은 슬금슬금 사라지기도 했다. 그들도 아마 다시 나를 보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조사를 받는 내내 조사관은 내 눈치를 보며 질문을 했다. 그리곤 작은 목소리로 “그동안 많이 힘 드셨을 텐데 이젠 그만 편히 사시죠” 라며 나를 위로하듯 말을 전했다. 순간 참았던 분노가 터져버렸다. 나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편히 살라고? 그래 편히 살게 그럼 그날 왜 그랬는지 얘기 좀 해봐라. 니들도 사람이면 알거 아니냐? 아버지 죽고 아들은 감옥이 있는데 뭐 나보고 편히 살라고? 라며 한바탕 소동을 부리니 그 안에 있는 경찰들은 하나둘 다 나가버리고 날 조사했던 조사관만 진땀을 흘리며 나에게 물 한잔을 권하며 죄송하다며 사과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대답 안하셔도 된다면서 저 혼자 조서를 꾸몄다.

그렇게 나의 첫 경찰서 방문이 끝나고 얼마 후 법원으로부터 통보를 받았다.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공동주거침입)”으로 벌금 2백만원을 내란다. 또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희망버스를 타고 85호 크레인에 간 것이 불법이라고 말하는 이 나라 경찰과 사법부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나의 남편도 많은 죄 중에도 ‘공동주거침입’이 있었다. 남일당을 점거하고 들어간 것을 주거침입이라고 했다. 우리가 왜 그곳에 갔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철거민이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해고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크레인에 오른 이유를 그들은 외면하고만 싶어 했다. 그 사람에게 살아서 내려오라고 말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을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 취급을 한다. 무조건 법의 잣대를 세우며 범법자를 만들어 버린다. 결국 이명박 정권이 우리부부를 범법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만 죄를 묻는 건가? 용산에서 철거민들을 위협하려 불을 지른 용역들에게는 그 어떤 한 처벌도 하지 않았고, 여섯 명의 국민이 죽었는데도, 현장을 지휘한 그 어떤 경찰관들도 처벌받지 않았다. 무리한 진압을 지시한 책임자들은 법정에 단 한 번도 서질 않았고,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구사대들에게는 그 어떤 죄도 묻지 않으면서, 사람이 목숨을 걸고 35m크레인 위에서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외치는 사람에게 부디 살아서 내려오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불법이라고 말하는 이 나라가 정녕 대한민국이란 말인가? 수 십 명의 밥줄을 하루아침에 끊어버리고 본인들의 배만 불리는 한진중공업 사주들은 죄가 없고 농성을 하는 해고자들에게만 죄를 묻는 이 나라가 그동안 내가 믿고 살았던 대한민국이란 말인가?

지금도 대한문에는 22명의 동지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있다. 1600일이 넘게 비정규직투쟁을 하는 재능동지들이 있다. 기타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기타를 치며 투쟁하는 콜트콜택동지들이 있고, 단식 46일 만에 쓰러져 내려온 전북고속 노동자들이 있다. 북아현동 철거민은 천막하나에 의지하며 대책 없는 강제철거 반대를 외치고 있다. 일산 덕이 철거민, 부천 중3동 철거민, 용산3구역 철거민, 상도4구역 철거민... 이렇듯 수많은 곳에서 아직도 “여기 사람이 있다, 함께 살자” 를 외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을 외면하고 나만 살면 된단 말인가? 이 사람들에게 힘내라며 함께 하겠다고 말하면 그것이 불법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난 계속 불법을 하며 살 수 밖에 없다. 자본과 권력만 중요시 하는 세상, 철거민과 노동자들을 사람으로조차 보지 않는 세상, 노동자들의 죽음을 숫자로 나열하게 만드는 이 파렴치한 세상이 뒤바뀌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탄압이 와도 난 희망버스를 탈 것이다. 나이 마흔 살 여자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준 희망버스, 난 오늘도 새로운 희망을 만드는 버스에 탑승하기 위해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덧말]

후원 계좌 / 국민은행 702102-04-052110 문정현(희망버스)
문의
- http://cafe.daum.net/happylaborworld
- 070-7168-9194 / hopebus@jinbo.net / 트윗 @hopebus85

희망버스 참가자들에 대한 무차별적이고, 반사회적, 비윤리적인 탄압으로 현재 100여분의 탑승객들이 벌금형 등을 받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탑승객들이 이런 탄압에 맞서 정식 재판을 청구하고 있습니다.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에게 그러했듯 외롭게 법정투쟁에 나선 희망버스 승객들을 함께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희망버스 운동을 지지해주셨던 많은 이들의 공동 대응이 필요합니다. 먼저 기소된 분들이 자신의 의지와 희망버스 운동의 사회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기고활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인권단체연석회의에서는 지금껏 공동변호인단과 대책모임을 구성해서 함께 해주시고 있습니다.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조만간 법률비용 마련을 위한 각종 기금 마련 등 모금 운동도 계획 중입니다. 작년에 함께 나누었던 연대의 마음 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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