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람>, 누가 진짜 범인인가?

[칼럼] 짐승이 되어가는 시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

오늘도 나주에서 엄마가 PC 방에서 게임 하고 새벽에 들어온 사이 초등학생이 또다시 성폭행을 당해 대장이 파열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강풀의 만화를 원작으로 김 휘 감독이 만든 영화 <이웃 사람>이 전국적으로 개봉되고 있는 동안 영화와 똑같은 일이 현실에서 발생했다. 개그 콘서트에서 개그맨 박성광이 리얼 700%라고 말할 때 웃음을 머금듯이 웃을 일은 아니지만, 영화 <이웃 사람>은 말 그대로 레알 그 자체였다. 과거의 스릴러 영화 <살인의 추억>이나 <추격자>와 비교해 <이웃사람>이 다른 것은 그 레알의 강도가 더 강해졌다는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인간이 아니라 바로 이웃에 살던, 그것도 계단 한 개를 사이에 둔 짐승이 다른 생명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제 살인은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레알의 핍진성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폭력이 일상화되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다른 말로 말해 폭력의 핍진성이다. SJM 사태에 투입된 용역 깡패 컨택터스의 폭력에서 보듯이 오늘날 폭력은 산업화되어 있고 노동자들은 바로 자기 눈앞에서 폭력과 마주친다. 국가가 용산 남일당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을 죽이고 국가가 방조하는 가운데 자본이 쌍차 노동자들을 죽이면서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사회의 폭력으로 급속하게 전염되고 있다. 이제 그 전염의 강도는 <이웃 사람>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

거기다가 살인의 추억이 아니라 살인의 환경이 끊임없이 조성된다. 교육이 아니라 사육당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청소년들은 공부 아닌 노동으로 밤길에 방치되고 그 방치된 어두운 지대가 살인마들이 판치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준다. <이웃 사람>도 마찬가지다. 202호에 새엄마와 같이 살던 서연이가 야자를 마쳤는지 학원을 마쳤는지 비오는 날 밤 엄마가 배웅을 나오지 못한 사이에 어두운 지대에 서식하던 102호 살인마는 강아지풀같이 여리디여린 소녀 서연이를 죽인다. 그것도 태연하게 피자집에 피자를 시키고 그 피자를 뜯어 먹으며 어린 생명의 몸뚱어리를 뜯어내 냉장고에 보관한다. 피자 조각으로 변한 인간의 몸 조각에 납치당한 가방 가게 주인은 경악한다. 까치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자식들을 위해 전깃줄에 집을 짓는 사이 살인마의 두 번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나뭇가지 하나가 동네에 정전사태를 일으키고 살인하기에 기가 막힌 좋은 환경을 만들어준다.

  류승혁에게 유일한 감정은 죽인 서연이의 유령에 대한 공포뿐이다. 혹은 전과 7범의 안현모가 강자라는 사실에 놀란 동물의 감정일 뿐이다.

살인범 류승혁은 영화 <이웃 사람>에서 “왜 다들 나한테 지랄이냐”며 살인의 동기를 드러낸다. 류승혁의 이러한 불만은 어디서 왔을까? 석 달 후면 이사 가는데 재건축 서류에 지장을 찍으라는 부녀회장의 잔소리에 불만을 품은 것일까? 아니면 102동 수도세가 지나치게 많이 나온다며 전화로 잔소리하는 경비에게 불만을 품은 것일까? 무엇이 류승혁을 피자 조각 먹으며 인간의 몸뚱어리를 조각내는 짐승으로 변하게 만든 것일까?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의 말처럼 민주통합당이 분열을 조장하기 때문일까? 류승혁의 불만은 여의도, 수원에서 묻지마 살인을 벌인 짐승들의 불만과 닮았다. 인간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 세상이 이제는 너무나 리얼하고 핍진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동물로, 짐승으로 추락해 인간으로 회귀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는지 모른다. 살인범 류승혁의 동물화도 마찬가지다. 고기 정리하듯 태연하게 토막 살인을 저지르는 류승혁은 칼을 들고 말을 하는 짐승일 뿐이다. 그의 눈에는 잡아먹을 대상만이 들어오고 아무런 감정이 없다. 그에게 유일한 감정은 죽인 서연이의 유령에 대한 공포뿐이다. 혹은 전과 7범의 안현모가 강자라는 사실에 놀란 동물의 감정일 뿐이다.

동물이란 무엇인가? 아프리카 벌판에서 동물들은 순간순간 죽고 죽이는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언제 표범이 덮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슴들은 귀를 쫑긋거리며 경계의 눈치를 보낸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몸뚱어리가 찢겨나가기 때문이다. 생태사슬을 유지하기 위한 죽음과 죽임의 경쟁 속에 방치된 아프리카의 짐승들처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그 누구든 생태사슬이 아니라 1%의 생면부지 인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죽음과 죽임의 경쟁 속에 방치되어 있다. 부모도 국가도 자본도 너도 이웃도 친구도 나를 어두운 지대에 방치하고 있다. 다른 짐승이 덮쳐 갈라먹든 찢어먹든 무감하다. 국가가 어두운 사각지대를 건사하지 못하는 사이 인간들이 “왜 다들 나한테 지랄이냐”며 짐승으로 동물로 변해 간다. 누가 진짜 범인일까? 한국 사회를 먹고 먹히는 정글 사회로 만든 주범은 누구인가? 태연하게 피자를 뜯어 먹으며 큼직한 칼자루를 쥐고 책상 위에서 인간의 몸을 능숙하게 조각내는 살인범 류승혁을 누가, 무엇이 짐승으로 만들었는가?

이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아니 약 2백 년 동안 개인의 이익이 사회 전체의 이익이라던 아담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에 따라 시장화가 진행되고 그 시장이 경제 주체들의 지나친 탐욕을 국가가 방조하는 가운데 사람이 사람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짐승 같은 시장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시장의 짐승화가 인간의 동물화를 촉진시켰다는 말이다. 이렇게 짐승으로 돌변해버린 시장 안에서 돈 놓고 돈 먹기 식으로 죽음과 죽임의 경쟁이 아무런 규제 없이 자유화되면서 한국 사회는 사이코패스 이전에 소시오패스sociopath들을 양산해 왔다. 사리사욕이나 성공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양심에 전혀 거리낌 없는 소시오패스들이 장악한 사회에서 자라날 것은 연쇄살인범, 성범죄자, 사이코패스들 밖에 없다. 불법, 탈법, 편법, 초법 등 어떤 강권을 이용해서라도 나와 내 가족의 탐욕만 보장하면 된다는 소시오패스들이 한국 사회에는 즐비하다.

아무것도 투자하지 않고 몇 개의 기업을 수중에 넣는 출총제, 순환출자의 기가 막힌 사기수법, 내부 거래를 통해 일감 물아주기 하는 재벌들, 신문사에 전달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횡령하는 신부들, 공천헌금으로 매관매직하는 국회의원들, BBK 사건, 부동산투기꾼, 사망자 신분으로 10년 동안 사기를 친 사기꾼 등 한국 사회에는 소시오패스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그런지 <이웃 사람> 영화를 봐도 무덤덤하다. 현실이 영화를 초월하는데 그까지 레알 700% 영화가 무슨 대수랴. 그나저나 난 인간인가 짐승인가. 박테리아가 인간의 몸 안에 들어와 미토콘드리아로 변한 마당에 나는 이제껏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불확실해진 지금 나는 인간으로 회귀할 수나 있으려나 모르겠다. 성범죄자만 나타나면 성 관련 질환자로 분류할 뿐, 그 인간이 짐승이나 사이코패스로 변하게 된 이유나 과정은 설명되지 않는다. 성범죄자의 직업이나 사회적 환경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질환을 드러낸 짐승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음 표를 보면 왜 한국 사회가 성범죄 3위의 나라가 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 정도 사는 꼴이면 살인마가 득실거리기에 최적의 환경 아닌가? 모든 것이 최소한 동메달 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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