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는 제치고 그냥 웃어라

[명숙의 무비,무브](10) <남쪽으로 튀어>와 리얼리티

영화를 봐도 끌리는 영화가 없었다. 아니 설(說)을 풀만큼 매력적이거나 눈여겨 볼만한 소재의 영화도 별로 없었기도 했지만 최근의 여러 상황이 글을 쓰기 어렵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라는 게 원래 단순 오락영화만 봐도 쾌락을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 우리가 영화적 완성도나 소재만으로 영화를 보지는 않지 않는가. 그냥 웃기만 해도 성공인 게 코미디 영화가 아닌가. 웃기만 해도 본전을 찾는 영화 <남쪽으로 튀어> 얘기를 해볼까 한다.

원작과는 다른 묘미, 한국적 재현의 성공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재미있게 읽었던 독자였던 나로서는 이 영화는 끌리지 않았다. ‘원작만큼 재미있을까? 무정부주의를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 인물들의 매력이 잘 드러날까?’ 하는 우려로 별로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가,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보고 싶다고 해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런데 영화 보는 내내 웃었다. 웃음의 코드가 상업영화답게 곳곳에 심어있기도 하고,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가 자연스럽게 웃게 만들었다.


특히 이 영화의 장점은 원작의 상황과 인물을 한국적으로 잘 재현해놓았다는 점이다. 무정부주의가 모든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이기에 주민등록증 문제나 개발 문제는 한국적 상황과도 잘 맞아 떨어졌다. 다만 2013년을 사는 우리에게, 주인공 최해갑의 행동이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읽히기보다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와 일탈로 읽힐 수 있는 현실에 살고 있다는 점은 난점 중 하나였다. 사실 저항과 일탈은 교집합이 많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난점이라고 일컫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각종 매체의 시선이나 국가기관의 공공예절 교육은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동을 사람 귀찮게 하는 일탈로 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최해갑의 TV 수신료 납부 거부나 국민연금 거부를 국가시스템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일탈로 읽히기도 해 씁쓸하기만 하다. 예전보다 더 강력한 이데올로기에 우리는 길들여지고 있는 것일까? 사실 TV 수신료거부 운동은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80년대에도, 그리고 최근에도 있었던 운동이다. 그리 과격하거나 무책임한 운동이 아닌 셈이다. 물론 이렇게 비치는 것은 아마도 그것을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최해갑의 언행, TV를 던지는 등의 행동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고 주인공의 개인적인 행동으로만 그려지는 극 구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지로,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와 같이 소설에서 문장으로 드러난, 주인공 이치로(영화에서는 최해갑)의 저항의식이 영화에서 대사로라도 드러났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깨알 같은 한국 인권의 현실 묘사

인권운동을 하는 나로서는 웃음코드 못지않게 그려진 한국인권의 현실이 눈에 띄었다. 영화감독이 직업인 주인공 최해갑은 주민등록 지문날인을 거부한다.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는 실제 이마리오 감독이 찍은 영화일 뿐 아니라 2000년대 초반에 있었던 운동이다. 모든 국민을 통제하고 지문을 찍어 개인정보를 보관할 뿐 아니라 범죄인 취급하는 주민등록증 지문날인 거부운동의 문제의식은 지금은 많이 약화되었지만 문제점은 국제사회에서도 지적될 정도의 인권침해 사안이다. 그래서 2008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1차 한국인권상황정기검토(UPR)에서는 주민등록제도의 재검토를 한국정부에 권고했다. 당시 한국인권활동가들이 보여준 주민등록증의 뒷면에 찍힌 지문을 보고 놀라워했던 다른 나라 정부관계자 모습이 선하다.(그는 어떻게 범죄자도 아닌데 모든 국민에게 지문을 찍게 하냐고 물었다.)

정부의 민간인 사찰도 그렇다. 이명박 정권 시절, 민간인 사찰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이에 대한 처벌을 전혀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선기간에도 크게 쟁점화되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사찰을 한 정부요원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졌을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양심선언을 해, 심각하지 않게 보여졌지만 현실은 심각하다. 사찰로 인해 자살까지 할 정도로 일상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찰당하며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한 인간의 삶을 뒤흔드는 심각한 인권침해이다. 그 외에도 학벌위주의 차별, 학교비리 등 깨알 같은 묘사가 나에게 작은 볼거리를 줬다.

운동권 내 가부장적 관습

원작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역시 다양한 인물들의 개성이다. 원작에서는 이치로의 아들 지로(영화에서는 나라)의 성장이 학교폭력과 가출 속에서 잘 드러났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약하다. 소설과 다른 시간의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두 권에 이르는 장편을 어찌 영상에 다 담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영화를 보는 나를 답답하게 한 것은 주인공의 아내 안봉희의 모습이었다. 그녀도 최해갑과 함께 운동권 출신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 식당을 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고, 최해갑은 영화를 찍는다고 하지만 사실 생계는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한 운동권내 남녀의 관계 설정은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많이 접하는, 그야말로 ‘생얼’이기에 답답했다. 그가 감독이기에 한량으로 비쳐진다기보다 한국에서 많은 운동권 남녀들이 결혼을 하면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대부분 여자-아내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둘의 자발적인 선택이고 합의이지만 그렇게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운동권 내 가부장성과 이성애가족 내의 묘한 가부장적 타협이 만들어낸 것이 결혼한 운동권의 젠더역할의 고정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남성은 운동을 하고, 여성은 그를 뒷바라지하는 의미로 생계를 책임지는 방식은 386시대 때보다는 지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마지막에 그녀가 동지로서, 투사로서 화염병을 던지며 싸우는 장면은 조금 위로가 된다.)

리얼리티는 제치고 웃어라!

이 영화가 현실을 조금씩 보여주기에 영화의 결말을 보며 씁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국회의원을 인질로 삼냐, 도피밖에 없냐 등등. 하지만 앞서도 얘기했듯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옆으로 살짝 밀쳐두고 코미디로 본다면 충분히 재미있다. 부패한 권력을 물리치는 통괘한 웃음은 아니더라도, 대안적 투쟁방식이나 삶의 방식이 보여주는 흐뭇한 웃음은 아닐지라도, 권력의 자중지란을 보여주는 풍자로 인한 웃음이 있지 않은가. 웃기는 등장인물의 설정도 있으니 요즘처럼 웃을 날이 별로 없는 날에 한 시간 넘게 웃을 수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렇게 웃고 나면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갈 기운이, 싸울 힘이 조금은 생기지 않겠는가하고 위로해볼만 하다. 더구나 김윤석 외에도 주인공의 고향 후배로 나온 만덕 역을 맡은 배우 김성균의 순박한 표정과 연기만큼 여러 배우들의 연기력도 괜찮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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