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생산의 정치’와 왜곡된 ‘재생산의 정치’

[주례토론회] 노동자연대와 복지

[편집자주 - 토론내용]

생산의 정치 vs 재생산의 정치 : 임금 vs 복지의 잘못된 이분법

얼마 전 어느 학술대회에서 운동의 중심이 ‘생산의 정치’에서 ‘재생산의 정치’로 이동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의 정치’는 주로 공장 내의 임금투쟁을 말하고, ‘재생산의 정치’는 공장 밖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재생산 영역(교육, 보육, 의료, 주거 등등)에서의 투쟁을 의미한다. 이는 복지담론의 확대에 따라 재생산 영역에서의 민중적 요구가 많아지는 것을 반영한 주장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잘못된 구분 짓기를 통해 운동주체의 규정과 운동의 방향을 왜곡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 먼저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임금에 대한 잘못된 구분이다. 맑스도 자본론에서 언급한 바처럼 임금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얻는 대가이며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대부분 사용된다. 가족임금, 생활임금, 최저임금이니 하는 말들은 임금이 노동력의 재생산과 관련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임금의 대부분은 노동자를 비롯한 그의 피부양자들의 필수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해 대부분 소진된다. 맑스 뿐만 아니라 주류경제학의 국민계정 항등식에서도 노동자들이 벌어들인 임금은 남는 것 없이 대부분 소비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렇듯 재생산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임금(wage)이며, 임금이야 말로 복지와 함께 재생산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실제 복지제도를 통해 지급되는 돈의 양과 임금의 양을 비교해 보아도 압도적으로 임금이 많다.

이뿐만이 아니다. ‘재생산의 정치’의 영역에서 임금을 떼어내 ‘생산의 정치’라는 영역으로 넣어 버리게 되면 임금투쟁이 곧 ‘생산의 정치’의 모든 것 인양 오해된다. 그리고 곧 이러한 구분은 낡은 ‘생산의 정치’와 새로운 ‘재생산의 정치’라는 구분, 그리고 그 내용은 ‘낡은’ 임금투쟁 vs ‘새로운’ 복지투쟁이라는 허구적 대립을 만들고 만다. 그래서 이러한 인식이 그대로 운동주체의 구분 짓기로 이어져, 연대의 틀과 운동의 담론을 제약하는 관념적 장벽을 만들고 만다.

이번 주례토론회에서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이런 잘못된 구분 짓기와 그 후과를 비판하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진정한 쟁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재생산의 영역에서 임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복지담론의 확장 혹은 새로운 인식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실종된 ‘생산의 정치’

앞서 언급한 잘못된 이분법을 올바로 잡고 나면 바로 제기되는 질문이 ‘그럼 생산의 정치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생산의 정치’는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지에 대한 계획, 실행, 조정, 평가의 전체적 과정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노조가 그랬듯, 지금까지 ‘생산의 정치’는 임단협에서 작업장에서의 복지(?)를 요구하는 것에 맴돌았다. 가령 인력배치의 강도를 완화한다든가, 자녀교육비 지원, 체력단련비 등등이다. 대부분 노동력 관리와 임금에 포괄되는 상여금이다. 해고의 위협이 늘 상존하는 노동현장에서 가장 높은 수위의 요구는 고용보장이다. (물론 현재는 운동의 지형 상 이러한 요구마저도 따내기 어려운 상황임은 우린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열악한 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임금 문제를 제쳐둔 채 사내 복지를 얘기 한다는 건 뜬구름 잡는 일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운동주체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진정한 생산의 정치는 무엇이고,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생산의 정치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지난 주례토론회 5회에서도 살펴봤듯,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급성장해 온 민주노조운동의 역사 속에서도 기업별 임금투쟁 수준을 뛰어 넘는 ‘생산의 정치’는 발전되진 못했다. 노동조건과 고용조건 악화에 대항하는 전국적 연대파업(노동법 개악투쟁)이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가 ‘생산의 정치’와 노동자 스스로 정치주체로 나아가는 더 큰 지렛대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이렇게 정치주체를 만들어갔던 역사적 과정은 결국 양날개론(산별노조-진보정당)에 흡수되었고, 기업별 노조라는 한계에 갇힌 정치투쟁은 정당 및 정치사회단체의 이슈메이킹에 동원되는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앞서 지적한 바처럼 공장 내의 낡은 임금투쟁에서 운동의 중심성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래서 이젠 공장 밖 재생산 영역에서의 정치투쟁이 새로운 계급투쟁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며, 앞서 언급한 잘못된 이분법이 이러한 운동담론과 허구적 대립의 경향을 심화시키게 된다. 마치 과거 경제투쟁 vs 정치투쟁의 대립적 관념이 ‘공장 내 자기 방어적 경제투쟁’과 ‘공장 밖 사회 연대적 정치투쟁’이라는 대립구도로 왜곡된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노조에겐 임금투쟁을 비롯한 공장 내 투쟁이 가장 중요한 현안이다. 이런 이유로 조합원들의 정치는 한편에선 공장 안에서의 기업별 임금투쟁에 갇히게 되고, 다른 한편에서엔 공장 밖 정치사회단체의 선전에 동원에 되는 형태에 갇히게 된다. 또한 사회 연대적 정치투쟁이 법제도개선과 같은 정책대응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연대투쟁을 정당에 의존하게 되고, 전국의 중앙지도부가 정책개발연구소와 대정부 언론창구만으로 전락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과연 이런 식의 정치투쟁이, 분배의 요구에 매몰되었다고 비판하는 경제투쟁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반문을 하게 된다. 문제는 노동의 주체가 투쟁의 중심에 있지 못하는 대리주의의 현실이다. 그리고 ‘생산의 정치’와 ‘재생산의 정치’를 왜곡, 축소하여 구분 짓는 관념이 이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이것은 ‘재생산의 정치’라는 개념이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채 왜곡된 이분법에 근거한 편향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2. 왜곡된 ‘재생산의 정치’와 분배문제로 유폐된 복지

그렇다면 이번엔 ‘재생산의 정치’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재생산하는 것인가? 그것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라면 앞서 우리가 정정한 분석에 따라 재생산에 필요한 두 요소는 임금과 복지이다. 일차적으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요소가 임금이기 때문에 임금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임금을 소비한다. 그런데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노동력 재생산이 장기적으로 이뤄지려면 재생산의 대상이 임노동자 개인만 해당되어선 곤란하다는 걸 금새 깨닫게 된다. 개인이 아프거나 늙으면 이를 대체할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비노동자들에 대한 양육과 교육이 필수적이며 이것은 절대적으로 가사노동에 의존한다. 이러한 관점은 자본의 입장에서 바라본 노동력 재생산이다. 자본의 끊임없는 축적과 확장을 위해서 신축적이고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을 책임지는 광범위한 산업예비군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계(가족)가 안정적으로 재생산되기 위한 임금제도와 복지제도는 자본축적의 역사에서 체계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래서 복지를 ‘자본의 피조물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난 자본주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자본이 모든 걸 미리미리 계획하여 노동자에게 베풀지 않았다. 아동노동 착취금지와 8시간 노동제는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복지를 ‘노동의 창조물’이라고도 부른다. 노동자 스스로 일어나 투쟁하여 얻은 결과물이다. 그래서 이런 결과물들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단결하기도 하고 더 큰 연대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투쟁의 결과물의 성격도 개별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노동자들 간의 연대를 확장하기 위해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쟁취하기도 했다. 심지어 노동과정을 변화시키거나 작업일수와 생산량을 조정하기도 했다. 계급투쟁의 역사는 단순히 노동자의 노동력만을 재생산하기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그 격렬한 투쟁은 자본의 모순을 더 극명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드러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기획하는 사회주의 전망과 조응하면서 국제적인 노동자연대운동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이렇게 노동자가 획득한 복지는 앞서 말한 생산의 정치가 발전하는 가운데 창조된 것이기도 하다. 이로서 왜곡된 ‘재생산의 정치’와 복지에 대한 관념이 벗겨진다. ‘재생산의 정치’는 ‘생산의 정치’를 전제로 이뤄지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생산이 있어야 재생산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생산의 영역을 생산과 분리시켜 생각하게 되면, ‘재생산의 정치’는 생산의 영역과 유리된 채, 철저하게 생산물을 소비하기 위한 문제로 한정된다. 그래서 자본은 재생산 영역을 재상품화하기도 한다. 신자유주의적 복지공급시스템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은 의료, 주거, 보육, 교육 등등을 철저하게 시장논리로 흡수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 신자유주의 관리정책의 시초였던 영국의 대처정권 시절에서도 복지의 총량을 줄이지 않았다. 복지 공급체계를 바꿈으로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구조에 조응시켰다.

또한 재생산의 영역을 생산과 분리시키면 재생산의 두 가지 요소인 임금과 복지는 ‘자본의 피조물’이라는 관념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래서 자본이 제시하는 각종 경제경영지표들, 가령 이윤율, 노동생산성, GDP 성장률 등등에 임금과 복지를 둘러싼 계급투쟁이 유폐된다. 흔히 신자유주의적 우파들은 복지를 공격하기 위해 이런 논리를 자주 사용한다. “나눠줄 게 별로 없는데 무슨 임금이고 복지냐?”라고 말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편향은 운동주체들에게도 등장한다. 하나는 경제위기론을 빙자한 협박에 움츠러들어 노동자들의 요구투쟁을 억누르는 역할에 동조하는 경우다. IMF 외환위기 당시 노동권 후퇴에 동의했던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의 직권조인도 그러한 협박에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관념적 편향에 일부 기인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전혀 다른 정치적 맥락인데,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하는 현재 국면에서 ‘과연 무엇을 따낼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 역시 스스로 방점을 찍었던 자본주의 위기분석과는 다른 층위에서 실천적 무능력을 노출하곤 한다.

또 다른 한편에선 적극적이고 보편적인 복지를 요구하면서 생존권을 확장하는 시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생산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은 채 똑같이 재생산영역에서의 배분문제에만 골몰하다 보니, 자본의 논리처럼 각종 경제경영지표의 틈새를 찾아 실현가능성을 설파한다. 가령 부자들이나 대기업들로 부터 돈을 거둬들이면 복지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소득의 양극화가 심한 현재 정세에서 볼 때, 일면 옳은 말이다. 그래서 지난 몇 년 간 부자증세 논의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다시 경제가 침체에 빠져 기업들이 도산하기 시작하면 이런 주장은 곧바로 곤란함에 빠지고 만다. 기업들을 구제하는 들어가는 천문학적 구제금융 비용에 대해서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다. 이들이 되살아나야 고용도 다시 늘고 또한 이들이 수익이 나야 돈을 거둬들여 복지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앞서 비판한 첫 번째 경우(IMF 외환위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것들 모두 재생산의 영역을 생산의 영역과 분리시켜 생각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생산의 정치’를 임금투쟁으로만 한정했던 왜곡된 이분법을 깨고 새롭게 ‘생산의 정치’가 무엇인지 ‘재생산의 정치’는 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생산과 밀접한 노동의 문제가 중요하며, ‘개별적 노동’이 아닌 ‘집합적 노동’에 기반한 ‘생산의 정치’가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집합적 노동’이 중요한 이유는 실제 자본주의에서의 생산 과정은 모두 집합적 노동과정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자동차와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그 수많은 부품들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된다. 개별노동들이 한데 모여 집합적 노동으로 어우러질 때, 자본주의의 생산물은 만들어 진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노동이 이렇게 이미 사회화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생산도 사회화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과정과 생산과정에 대한 개입과 조절은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어 있다. 이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생산의 정치’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화 전략과 맞닿을 수밖에 없다. (이후 논의과제는 다음 토론으로)

그래서 복지를 이야기 할 때도, 배분의 문제가 아닌 생산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과연 우리에게 복지라는 건 뭔지, 어떤 복지를 생산하고 누구에게 얼마나 줘야 유용한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동의 창조물’로서 복지는 이렇게 생산과 노동과 결합될 때, 사회변혁을 진척시키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정리하면 아래 그림처럼 ‘생산의 정치’와 ‘재생산의 정치’는 따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한쪽을 키우기 위해 다른 한쪽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임금투쟁 vs 복지투쟁’ 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은 ‘생산의 정치’와 ‘재생산의 정치’ 영역을 극히 좁게 만들고 자본주의적 주류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생산과 노동의 문제를 전면화 시키지 못하면, 임금과 복지는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자본의 피조물’이라는 논리에 계속 갇히게 될 것이다.

3. 노동의 정치, '배타적' 연대와 '포괄적' 연대

우리가 생산과 재생산에 개입할 수 있는 이유는 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산과 재생산의 정치는 노동의 정치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채택하는 노동의 관점이 개별노동이 아닌 집합노동이라면, 당연히 노동자 연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연대의 문제는 운동의 발생초기부터 아주 중요한 화두이자, 운동을 지속시키고 확대시키기 위한 핵심이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지난 30년간의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노동자들은 계속 분절화 되었고 노동운동은 후퇴했다. 그러나 보니 노동자연대를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에 퇴행적 변화가 생기되었다. 마치 전통적 방식의 노동자연대는 현재 맞지 않는다는 가정이다. 현대사회에선 노동계층이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과거와 같은 방식의 노동자 연대는 굉장히 힘들게 되었다는 논리이다. 마치 근대화에 대한 인식 틀과 비슷하다. 전근대를 극복하고 근대화를 해야 한다는 논리처럼, 구식연대를 바꾸고 새로운 운동과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당연히 새로운 운동을 발굴하고 발전된 연대를 추구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마치 과거 자본주의 초기엔 노동자들이 단일해서 뭉치기 쉬웠고 지금은 아니다 라는 논리는 성급한 결론이다. 과거에도 노동자들은 단일하지 않았다. 남성노동자/여성노동자, 정규직노동자/비정규직노동자, 내국인노동자/이주노동자 등등 여러 가지 분할선들로 가득 차 있었다. 끊임없는 노력들도 연대를 조직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마치 자연발생적으로 이들이 뭉쳐서 노조를 만들고 집단투쟁을 벌인 게 아니었다.

그래서 ‘배타적’ 연대와 ‘포괄적’ 연대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 연대의 시작은 ‘배타적’ 연대에서부터 시작한다. 노동자가 자신이 노동자로서의 인식이 있어야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도모할 수 있는 것처럼, ‘배타적’ 연대는 ‘포괄적’ 연대의 전제가 된다. 처음부터 ‘포괄적’ 연대부터 시작한 적은 없다. 요즘 현대자동차와 같은 고임금 노동자의 파업에 대해서 많은 비판이 있는데 이들이 ‘포괄적’ 연대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 ‘배타적’ 연대이기 때문에 문제라고만 진단해선 곤란하다. 그러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배타적’ 연대마저도 배척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연대는 ‘포괄적 연대’를 지향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공동의 이해관계를 찾고 공동의 존재이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맑스는 노동하는 인간을 가장 중요한 인간의 특징으로 보았고, 현실적으로도 대부분의 인간은 노동을 하면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의 정치가 중요한 것이고, 노동의 정치는 작업장의 정치를 포괄하는 더욱 크고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노동의 정치가 ‘생산의 정치’와 ‘재생산의 정치’의 뿌리가 된다.

4. 남겨진 과제

이렇게 정리해 볼 때, 앞으로 제기되는 몇 가지 과제들을 추출해 볼 수 있다.

1> 실종되었던 ‘생산의 정치’를 복원하고 거시적인 사회변혁으로 나아가기 위한 ‘생산의 사회화’는 어떻게 구체화 될 수 있는가? 과거 국유화만으로 상징되었던 ‘20세기 사회화’와 달리 ‘21세기 사회화’를 위한 새로운 전망이 필요하다.

2> 생산의 영역과 연동될 수밖에 없는 재생산 영역에서의 사회화는 무엇인가? 복지국가를 거치면서 발전되었던 복지요소들을 ‘자본의 피조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사회화’ 더불어 ‘재생산의 사회화’로 이를 재구조화 시키고 사회변혁이 필요하다.

3> 분절된 노동을 다시 접합시키고 ‘포괄적 연대’로 전진하기 위한 노동정치의 전략과 구심은 무엇인가? 앞선 사회변혁 전략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토론문 끝]

아래는 발제문 전문이다.


노동자 연대와 복지

1. 노동력 재생산의 두 요소: 임금과 복지

- 맑스의 임금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은 일차적으로 임금제도를 통해서 이뤄짐.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한 노동자는 노동력 상품의 구매자인 자본가로부터 임금을 받게 됨.1) 임금으로 받은 돈으로 노동자는 시장에서 여러 생활수단을 구매하여 소비하면서 자기 자신과 가족의 노동력을 재생산.
- 특히, 가족 내에서 주로 여성에 의해 무상으로 제공되는 재생산노동(가사노동, 양육 등) 없이 임금제도를 통한 노동력 재생산 과정은 불가능. 임금과 재생산노동의 결합을 통해서만 개인적 차원에서의 노동력 재생산(노동을 수행한 후에 다시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상태로 신체적 · 정신적 · 감성적으로 reset하는 것) 물론 새대간 재생산이 가능.
-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범위와 수준은 시기에 따라 변하고, 나라마다 다름. 따라서 임금 역시 다를 수밖에 없음. 또한, 숙련-비숙련, 남성-여성과 같은 여러 차이 등에 따라 임금 수준도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음. 중요한 것은 임금의 수준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에 영향을 받으며, 정치적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 이 같은 특징이 일반 상품의 가치 또는 가격과 다소 다른 점.

- 임금제도와 마찬가지로 복지제도 역시 노동력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위해 필수적.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의 첫 번째 역할은 노동력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
- 자본주의적 축적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임금노동자의 존재와 재생산. 이를 위해서는, 1)노동자들이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유지되어야 함 → 자본이나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없어야 하고), 동시에 신분상이나 법적으로도 자신의 노동력을 다른 누구가에게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어야 함.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임노동자들의 존재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수적인 사회적 전제조건. 2) 노동력의 지속적인 재생산이 이뤄져야 함. 자본주의의 유지는 임금노동자 계급의 끊임없는 재생산이 이뤄져야만 하고, 이는 특정한 형태의 계급관계, 즉 노자관계가 재생산을 통해서만 가능.2)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축적의 과정 = 임금, 재생산노동, 복지를 통한 노동력 재생산 과정 = 노자 간 계급관계의 재생산 과정.
- 노동력의 지속적인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복지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경험과 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음. ex) 공장법, 임금보조정책, 주택정책, 보육과 같은 다양한 복지서비스들, 각종 사회보험제도, 근로연계복지 등.
- 복지의 두 번째 역할은 실업자, 어린이, 노인, 환자, 장애인 등과 같은 비노동인구의 부양. 물론 노동인구와 비노동인구 간의 경계는 모호한데, 이 경우 복지의 첫 번째 역할(노동력의 지속적인 재생산)과의 명확한 구분이 어려움.
- 주목해야 할 점은 비노동인구의 일부가 ‘산업예비군’으로 형성되어 자본주의적 축적의 지렛대 역할을 한다는 것. 1) 산업예비군은 임금 상승에 대한 압력을 억제. 2) 생산 규모의 갑작스런 확대가 발생할 경우 산업예비군은 지체 없이 노동인구로 전환 자본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 이런 의미에서 맑스는 산업예비군의 유지와 관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존재조건이라고 주장(MEW 661).

- 이 같은 복지의 두 가지 역할을 고려해 보면, 복지제도 역시 임금제도와 마찬가지고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자본주의적 경제와 축적에 기여 → 복지는 자본의 피조물(a creature of capital)
-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복지가 자본의 피조물로서 자본 독재의 유용한 수단으로만 전락하기 않도록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계기가 마련 → 복지는 노동의 창조물(the creation of labour)
- 복지제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1) 자본주의의 시녀, 2) 계급투쟁의 산물. 네오맑스주의자 이안 고프(Ian Gough, 1979)는 이 같은 두 가지 시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가 지니는 모순적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음. 어느 한 시각에만 고정될 경우, 후자는 복지(국가)의 한계를 보지 못할 것이고, 전자는 그 잠재력을 간과하게 된다고 경고.

2. 노동과 복지의 갈등: 사회임금론, 재생산의 정치, 사회연대전략

- 노동자운동이 복지제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로 복지 급여가 노동자에게 ‘사회임금’(social wage)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음. 이때 사회임금은 노동자들이 노동력 판매의 대가로 기업으로부터 직접 받는 ‘시장임금’(market wage)과 비교되는 개념. 세금이나 사회보험료를 재원으로 국가에 의해 지급되는 복지는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과 지출을 절약 → 실질적으로 임금 또는 소득을 인상시키는 효과가 있음. 사회임금론에서 복지는 제공 방식만 다를 뿐 내용 면에서는 임금과 같은 성격이라고 간주.
- 문제는 사회임금, 즉 복지가 임금만큼 중요하다는 인식을 넘어서 직접적인 임금의 인상보다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임금의 인상, 복지제도의 확대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종종 이어지고 있다는 것. 직접적인 임금 인상보다는 복지를 통한 간접적인 사회임금의 확대를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은 노동운동의 일부와 시민사회운동의 요구에서 종종 등장.
- 대표적인 예로 IMF 위기 때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부와 자본이 내세운 ‘경제위기론’에 밀리면서 경기침체를 고려해 임금 인상의 폭을 낮게 요구하는 대신 복지 확대에 대한 요구를(사회개혁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전면에 내세워 국가경제도 살리고, 국민의 지지도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 당시 민주노총 내 영향력 있던 한 지도위원은 사회임금의 인상을 통해 전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생활옹호투쟁’을 제시하기도 함.

- 1998년 2월 노사정 위원회에서 민주노총 대표자의 직권조인으로 체결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서도 역시 노동과 복지는 서로 대립. 이 협약의 핵심은 자본이 줄곧 요구해 왔던 정리해고의 도입, 파견노동의 법적 허용과 같은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들의 도입이었음. 고용보험의 적용 확대와 실업자 구제 대책과 같은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이 민주노총의 ‘제도적’ 합법화와 함께 노동 측에 반대급부로 주어짐.

- 최근의 ‘생산의 정치’에서 ‘재생산의 정치’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도 노동과 복지는 항상 갈등관계에 놓여있음. 여기에서 말하는 ‘생산의 정치’란 아마도(?) 공장 안의 노동조건이나 임금을 둘러싼 요구들과 관련이 있음. 이 같은 요구들은 주로 현장 투쟁을 통해 관철되어 왔는데, 이 같은 요구와 투쟁이 더 이상 힘들고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함. 반대로 노동의 재생산 및 보호의 영역, 다시 말해 복지의 영역으로 이동하여 ‘재생산의 정치’를 개시해야 한다고 함. ‘생산의 정치’와 ‘재생산의 정치’라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복지운동은 임금투쟁이나 노동현장투쟁과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고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음.

- 2006년에서 2007년 사이에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서 전개된 ‘사회연대전략’은, 국민연금의 사각지대(비정규직이 큰 비중을 차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조 원 규모의 재원을 조성하여 저소득층에게 5년간 국민연금 보험료를 지원하자는 제안. 이를 위해 정규직 노동자들이 솔선수범하여 약 4조 원을 부담하고, 정부에게 6조 원, 자본에게는 7조 원을 요구하는 내용이었음. 사회연대전략의 가장 큰 문제점은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문제를 직접 접근해서해결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복지를 통해 우회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 최근에 비정규직이나 영세사업장의 저임금 노동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보험료를 일부 지원해 주고 있는 정부 대책과 거의 유사. 이런 경우 복지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지원하는 기제로만 작동.

- ‘복지국가 혁명’ 주장하는 시민운동진영에서는 ‘노동의 중심성’에 대한 거부감 → 노동문제보다는 각종 신사회문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구사회문제라고 간주하는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방관자의 모습을 취함.
- 지금까지 언급한 여러 주장이나 제안에서 ‘임금’과 ‘복지’ 또는 ‘노동’과 ‘복지’는 항상 대립하고 대체하는 관계로 변함. 이 과정에서 복지운동은 노동에 무관심하게 되고, 노동운동은 복지를 의심하게 됨.

3. 노동자에게 연대란 무엇인가?3)

- ‘연대’에 대한 개념 구분: 공동체 연대와 투쟁 연대(독일의 도덕철학자 Kurt Bayertz) → ‘공동체 연대’는 하나의 그룹에 속해 있는 개인들 간의 상호 관계와 의무를 상징적으로 나타낼 때 사용. 이때 언급되는 대상은 모호하고 실체가 불분명한 ‘집단’이라기보다는 삶의 조건이 동일하거나 공통된 가치나 신념을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점이 중요. ‘투쟁 연대’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집단의 권리를 위해 나설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개념적으로 사용.

- 노동자 연대의 개념: ‘노동자 연대’는 노자관계를 축으로 하는 특수한 형태의 연대. 노동자 연대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해와 권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사회적 적대’에 맞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을 의미(투쟁 연대). 이들 노동자는 자본주의적 임노동 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삶의 토대와 경험들을 공유, ‘임노동자’라는 동질성은 연대의 결정적인 뿌리(공동체 연대).

- 노동자 연대를 조직하는 일은 모든 노동조합의 존재 이유이며, 노동자 연대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가 바로 노동조합. 노동조합이 조직하는 연대는 핵심적으로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님.(베를린 자유대 정치학과 교수 Bodo Zeuner)
- 첫째, 노동조합의 연대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을 차단하거나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에서 고용주의 수요에 개별적으로 맞설 경우, 경쟁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헐값에 내놓거나 덤핑 처리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노동력 상품을 공급하는 측의 입장에서 카르텔을 형성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가격일 땐 공급을 중단하고, 노동력이란 상품에 대한 최소한의 가격이나 조건을 집단적으로 관철하려 한다. 노동조합이 연대를 형성해 공동으로 맞서야 하는 이유는 불안정한 임노동 관계 자체에 내재되어 있고, 극복해야 할 사회적 상대는 노동력의 구매자이며 생산에 투입,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고용주이다.
- 둘째, 모든 연대는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 ‘같다고’ 규정되는 사람들이 연대의 순간에 다른 차이들은 부차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깨달게 될 때 마침내 실현된다. 예를 들어, 북미 사람들이 버마 국민에게 자행되는 인권유린에 항의하며 데모할 때을 보면, 그들에겐 인권을 중심으로 한 ‘같음’이 다른 대륙의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다름’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노동조합의 연대에서도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사이에 형성되는 연대적 관계의 중심에는 자신과 가족의 재생산을 위해 ‘임노동’ 관계로 편입,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동질성’이 자리 잡게 되고, 다른 여타의 ‘비동질성’, 즉 남성/여성, 내국인/외국인, 청년 노동자/노령 노동자, 숙련 노동자/비숙련 노동자라는 차이는 중요하지 않거나 덜 결정적인 요소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조합 조직화 자체가 그 본질에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성별, 연령별, 국적별, 신분별 차이를 극복하고, 이 같은 차이들이 연대나 단체행동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활동인 것이다.

4. ‘배타적’ 연대와 ‘포괄적’ 연대

노동자 연대를 조직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핵심 문제는 “누구의 어떤 이해를 포함하고, 동시에 반대로 누구의 어떤 이해를 배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노동자들에게 연대는 항상 포괄적인 요소와 배타적인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들에게 연대는 무한정 포괄적일 수 없는데, 예를 들어 일반적인 경우 고용주의 이해에 대해서 배타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누구를 포괄하고, 누구를 배제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지금까지 거의 예외 없이, 1) 지난 과거의 노동자 연대에서 그 전형을 찾을 수 있는 ‘같은’ 사람들, 혹은 ‘우리’라고 인정되는 사람들 간의 연대와 2) 새로운, 그전보다는 훨씬 복잡한 형태를 띠는 ‘같지 않은’ 사람들, ‘우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간의 연대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초해 다뤄져 왔다. 독일의 노조연구자 라이너 쫄(Rainer Zoll)은 『오늘날 연대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연구에서 임노동과 자본 간의 불평등과 갈등이 주 전선을 형성했던 과거의 계급사회에서 노동조합에게 노동자들을 연대로 묶어내는 것은 상대적으로 수월한 과제였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노동자들 간에 임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있는 처지에 기초한 사회경제적 동질성이 강하게 존재. 하지만 오늘날 급속히 진행되는 사회적 분화 과정은 임노동 중심의 동질성을 해체, 임노동자들 간에 존재하는 다른 차이들이 연대의 가능성을 제약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차이들이 임노동자라는 유사성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며, 이 같은 노동자 계급의 탈연대화 과정은 노동조합의 연대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가 오늘날의 노동자 계급 내부에 존재하는 여러 사회경제적 차이들을 고려하며 새로운 버전의 형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에 대해선 이의를 달 필요는 없음.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 같은 집단이나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 또는 이방인들과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위기에 처한 노동자 연대성을 회복시키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이해방식은 철저히 근대화·발전이론식의 단순화된, 즉 사회가 변했으니, 구식(old) 연대는 신식(new) 연대의 형태로 대체해야 한다는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

이 같은 이해는 하지만 현실의 발전을 반영하지 못함. 지난 과거의 노동자 연대는 강한 동질성이나 소속감에 기초, 연대를 조직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운 과제였다는 주장은 과거에도 노동자 계급의 연대 과정은 탈연대화 경향과 동시에 진행. 산업자본주의초기에도 노동자 내 다양한 종류의 분절이 존재; 남성 노동자 대 여성 노동자, 내국인 대 외국인, 블루칼라 노동자 대 화이트칼라 노동자. 이 같은 분절은 한편에서 연대의 방해물로 작용하였지만, 다른 한편 노동자조직이나 노조는 의식적인 노력과 시도들을 통해 차이를 극복하고 노동자 계급 간의 연대를 촉진. 다시 말해, 과거에도 노동자들 사이에 연대를 조직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으며, 매시기 노동자운동이나 노동조합운동의 끊임없는 연대적 탈경계화(solidarische Entgrenzung) 활동과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노동자 연대 또는 노동조합의 연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포괄성과 배타성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Bodo Zeuner(2004)는 근대화 이론이나 발전이론 방식의 개념적 틀에서 탈피, 포괄적 연대와 배타적 연대의 ‘변증법적’ 발전을 강조한다.
쫄(과 뒤르껭)에게 "같은 사람들 사이의 연대"라 불리며 도덕적으로 평가 절하되는 연대를 나는 “배타적 연대”라 칭하다. 그와 다른 이들에게 있어 “이방인들과의 연대”라 불리고 것을 나는 “포괄적 연대”라 한다. 포괄적 연대는-철저히 변증법적으로-배타적 연대의 대립물이지만, 동시에 배타적 연대의 이후 가능한 발전이기도 하다.(쪼이너, p. 332)

배타적 연대는 포괄적 연대의 출발점이고, 포괄적 연대는 배타적 연대의 완성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특정 이해를 토대로 하는 배타적 연대를 자신의 정책과 운동에 관련시켜야 하며, 동시에 이 연대가 임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나 자본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민중이나 사회계층으로 확대해야 하다.

5. 노동자 연대의 관점에서 복지운동 관련 쟁점들

첫째, 노동자운동과 복지운동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 지난 시기 두 운동은 부분적으로는 서로 보완하며 발전하기도 했지만, 주로 서로 경쟁적이거나 대립하는 관계에서 진행. 예를 들어, 임금이나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투쟁이나 파업에 대해 조직 노동자들의 특정한 경제적 이해를 대변하고 그 성과와 혜택은 주로 노조가 잘 조직되어 있는 대기업의 상대적 특권층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배타적’ 연대로 간주. 반면 복지운동은 이 같은 노조운동의 배타성을 극복하고, 국가적 차원의, 국민 전체의 이해를 추구하는 수준 높은 연대성의 표현이라고 강조되곤 했다. 이 같은 이분법적인 인식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연대’의 발전을 철저히 근대화이론 · 발전이론 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때문. 이 같은 이해는 오히려 현실운동과 괴리, 노동자운동과 복지운동의 조화로운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중요한 건 “배타적” 연대는 “포괄적” 연대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이고, “포괄적” 연대는 “배타적” 연대의 완성으로 두 형태의 연대 중 단순히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경제투쟁이나 파업 없이는 포괄적 연대를 지향하는 노조의 복지운동은 언제나 한계를 노출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같은 복지운동의 성과는 노조 내 정책생산/정책참여 능력 외에 기층 조합원들을 동원할 수 있는 조직력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특히 조합원들이 사회복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신들의 문제로 인식, 관련 요구들을 실현하기 위해서 연대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그 어떤 다른 방법보다도 현장과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노조사업이나 활동, 파업에 직접 참여, 경험하면서 가장 잘 깨달을 수 있다. 임현장에서 진행되는 노동자투쟁과 복지운동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 속에서 양자택일의 문제로 인식하는 한계를 넘어, 상호 보완적이며 상승 발전하는 관계로 설정해야 한다.

둘째, 노동자운동이나 노조가 복지운동에 개입하고 실현하고자 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테마가 코포라티즘 정치체제에 참여하는 문제. 물론 이 같은 형태의 정치체제가 유용한 공간이자 조건일 수 있는가의 문제는 각각의 정치 지형이나 역사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활용 가능한 공간인가 아닌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같은 이해대표 정치체제 하에서는 주로 노조 상층부 활동가들의 역할이나 몇몇 전문가의 정책생산 능력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기술관료주의적 정치의 흐름을 노동운동 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기층 조합원들의 역할은 수동적이고, 참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노조 중앙의 역할이나 정책개발이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현장의 참여나 동원능력 없이는 제도정치 공간에서 결국에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즉, 제도정치를 지향하고 의존하는 복지운동보다는 현장의 조합원이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복지운동을 실천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핵심이다.

셋째,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층 조합원들을 복지투쟁에 관심을 두고 참여, 동원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조합원이나 노동자들이 현장이나 지역에서 직접 참여하며 느낄 수 있는 사업을 개발하고 활동을 기획하는 것이 시급하다. 총연맹이나 산별 중앙에서 마련된 정책이나 결정된 요구를 ‘위에서 아래로’ 교육시키는 사업 이상의 ‘어떤 것’이 요구된다. 이 때 그 ‘어떤 것’이란 외국의 사례에서 배워 온다든지, 어느 한 조직가나 연구자의 아이디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총연맹, 산별연맹, 지역본부, 단위노조 내 모든 주체가 민주적인 토론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상상해 보고, 함께 기획하고, (더러 실패가 있을지라도) 끊임없이 실험해 보고, 이 같은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작업을 의미한다.
덧붙여 복지서비스의 전달체계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문제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회복지노동자는 복지수혜자와 직접 접하고 사회복지의 문제나 열악한 현실을 피부로 느끼며 복지운동의 맨 앞에서 선진노동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주

1) 일반 상품과 마찬가지로 상품으로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 → 노동력을 유지하는 필요한 일련의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과 같음.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 내지 가격의 현상 형태. 임금이라는 현상 형태 때문에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으로 변형. 임금의 형태에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지불노동과 부불노동으로 분할되는 모든 흔적을 사라지고, 모든 노동은 지불노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임금이라는 현상 형태가 지니는 이 같은 비밀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을 위해 필수적 → 임금물신.

2) 맑스는 『자본』에서는 일단 계급을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과 위계에서 어느 ‘위치’에 속해 있는지에 관한 문제로 상정. 계급 분석의 다양한 주제들, 특히 계급의식의 문제에 대해서는 극히 제한적으로 서술하고 있음.

3) 이하의 내용은 사회공공성연구소에서 진행한 『21세기 노동의 대안 복지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작성한 보고서 “노동조합의 연대와 사회정책”의 일부를 축약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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