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미래를 묻거든 ‘충칭’을 보라? ‘우’를 경계하고 ‘좌’를 막는다

[주례토론회] 중국 충칭모델과 시진핑 시대

[편집자주-토론문]

중국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과 충칭모델에 대한 잘못된 오해

지난 11월 12일 중국의 18기 3중전회가 끝난 후, 각종 언론에서 이에 대한 평가가 쏟아졌다. 대부분의 평가들은 자유주의적 정치개혁의 부재에 대한 혹평과 시진핑으로의 권력집중을 우려하는 시각들 일색이었다. 삼권분립과 의회민주주의에 익숙한 우리에겐 중국공산당이 이끌고 가는 중국의 정치체제가 기형적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부터 서구적 정치체제의 시각에서만 바라보다보니 중국현대사의 중요한 주체인 중국공산당에 대한 평가는 그저 부패한 독재권력이란 틀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이런 시각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중진국함정론’인데, 이것은 일정한 수준까지 경제가 성장하면 성장률의 한계에 닥치게 되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체제의 질적인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속류 경제 이론이다. 우리나라의 우파들은 이를 중국에 대입하길 좋아한다. 중국의 경제발전을 부러워하고 중국에 대한 수출종속을 두려워하면서도, 우리가 IMF 외환위기를 겪었던 것처럼 중국도 뭔가 경제위기를 맞이할 것이라는데 은연중에 배팅하는 것이다. 정작 중국이 무너지게 되면 가장 큰 피해를 볼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중심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다른 또 한편에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G2로 부상한 중국에 대해 어설픈 낙관론이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많이 거론되는 미국을 대체할 새로운 소비시장과 도시화를 주문하는 중국의 자본주의적 성장발전론은 이미 식상한 얘기가 되었다. 위기론이든, 낙관론이든 우리가 바라보는 중국의 모습은 모두 자본주의적 성장과 정체, 시장개방과 정치개혁이라는 관점에만 치우쳐 있다.

그렇다보니 그들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장기적 전략과 선택의 핵심 뭔지 이해하지 못하며, 그들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미래의 중국에 대해서 무지할 수밖에 없다. 때론 왜곡된 정보와 이미지로 중국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소비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얼마 전 세상을 뜰썩이게 했던 보시라이 사건이다. 우리나라에선 진보와 보수를 떠나 대부분의 언론들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얽히고설킨 파벌싸움과 3류 치정극으로 지면을 장식했다.

그러다보니 보시라이가 서기장으로 있었던 충칭의 개혁모델에 대해서 마오주의적 색채를 강조하는 좌파적 사회경제모델이라고 소개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보시라이의 대중영합적 인기정책에 의해 덧씌워진 이미지까지 존재했다.

이번 3중전회에서 발표된 여러 사회경제개혁 조치들 중에서 오랜 갈등문제였던 토지제도와 호구제도 개혁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들 모두 앞서 언급한 충칭모델을 통해 이미 실험되고 있는 정책들이다. 그리고 이런 구조개혁은 전임 주석인 후진타오 시기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내용은 반시장적인 실험이 아니며, 개혁개방을 선도한 덩샤오핑 이래로 견지하고 있는 ‘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이라는 관점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하나의 중심이란 ‘경제발전’이고, 두 개의 기본점이란 ‘4개항의 기본 이념 유지’와 ‘개혁개방의 견지’를 중국공산당의 영도아래 이룬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칭모델은 이러한 덩샤오핑 노선을 이루는 과정에서 나타난 중국의 구조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이며, 그곳으로 수렴되고자 한다. 보시라이의 숙청과 함께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 내용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리고 거기엔 시진핑 체제가 만들고자 하는 2020년 중국의 미래상이 담겨 있다.

‘후진타오-시진핑’으로 이어져오는 충칭모델

구체적으로 충칭모델을 들여다보자. 중앙정부에 의해 의도되었던 충칭모델은 ‘사회주의시장경제’ 즉 공유제 중심의 시장경제의 발전 모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충칭모델은 상대적 저발전에 처한 서부 내륙지역의 경제성장을 위해 정부가 대대적인 재정 투입으로 시장경제를 육성하려는 ‘충칭판 정부주도의 시장경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부품을 수입하여 가공하여 다시 수출하는 방식의 기존 연해지역의 수출산업과 다르다. 많은 부품을 국내 생산에 의존하여 수출 시장은 물론이고 내수경제를 진작시키는 새로운 가공무역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를 위해 중앙정부는 대대적인 교통 인프라를 구축하였고, 이에 기반하여 거대한 산업단지 및 부품 생산체제가 조성되었다. 충칭은 GDP 성장률이 17%에 이를 정도로 초고속 경제성장을 하였고, 주민소득의 증대에 따라 새로운 내수시장이 형성되었다.

[출처: http://www.monthlymaritime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48,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김세원 김범중]

그런데 이러한 외형적 성장말고도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분배정책의 도입이다. 대표적으로 농민공들에 대한 임대주택공급과 호구제도 개혁이 있다. 2007년 충칭은 청두와 함께 도농 호구를 통합하는 시범지역으로 선정되었는데, 이로써 인근 농촌의 농민공들은 충칭시 호구에 통합되었고 충칭시로부터 주거, 취업, 교육, 양로보험, 의료보험 5가지 분야의 사회보장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2010년 말부터 도시로 유입되는 농민공들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제공함으로써 도시 주거권을 보장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런 정책으로 인해 충칭 인근 농촌의 잉여 노동력을 도시로 유입시켜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안지역으로 빠져나간 농민공들을 내륙 지역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사회주의적 소유권의 근간인 토지공유제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도시 정착을 위해 농촌을 떠나는 농민에게 토지사용권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토지지표거래제). 토지국유회사들이 매입한 보상금액의 80%가 농민에게 이전되었고 농민은 이 돈을 가지고 도시에서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20%는 지방정부 세수로 들어오게 하여 복지 인프라를 위한 재정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농민들로부터 받은 토지는 개발로 인한 경지면적 감소를 보완하면서 국유자산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분배정책의 일환이지만 동시에 전국 최초로 토지 거래 시장을 충칭에 형성시키려는 과정이었다. 여기에 국유기업 우량화를 통해 국유기업의 시장경쟁력 제고하고 이를 통해 얻어지는 수익을 정부 복지재정 활용하는 방식은 충칭모델의 선순환구조를 갖추는 핵심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시장경제’의 2.0버전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보시라이 숙청과 중국공산당의 안정노선, “‘우’를 경계하고 ‘좌’를 막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충칭모델에 대해 그것이 반시장적이고 마오주의로의 회귀 인양, 그것도 보시라이의 전유물로만 알게 되었을까? 여기서 잠시 충칭모델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전임 충칭시 서기장 ‘야심가’ 보시라이에 대해서 짚어보자. 그는 우리나라 언론에 알려진 것처럼 좌파적 이념의 정치가도 아닐 뿐 더러, 오히려 경제성장을 위해 시장 확대에 주력한 인물로서 개혁개방 8대 원로 ‘보이보’의 아들이다. 과거 중국 상무부의 장관을 지냈던 그는 상무부 재임 시절 자신의 정치적 업적을 쌓기 위해 중국의 FTA 체결을 적극 추진하였고, 그 전에 맡았던 랴오닝 성장과 따리엔 시장 시절엔 지역 경제성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탈마오주의 관료였다.

이런 좌파적 이념과 거리가 멀었던 중앙정계의 스타 보시라이는 2007년 12월 충칭시 서기장으로 부임하면서 지역개발의 갈구하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더 중요한 건 이 무렵, 충칭이 지역간, 도농간 및 계층간 격차 해소를 위한 도농통합 및 재분배 정책 시범 추진지역으로 선정되었던 것이다.(발제문 참조)

이러한 중앙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보시라이의 개인적 포퓰리즘적 정치성향이 만나 소위 충칭모델이라 불리는 정책이 등장 하였고, 언론홍보를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여기엔 베이징의 중앙핵심 관료들까지 충칭을 방문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충칭의 개혁과 발전은 곧장 중국 전역의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되었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꿈꾸던 야심가 보시라이가 보기엔 충칭의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포장하기 위한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했다. 바로 마오주의 색채를 강조하고 이를 충칭모델에 덧씌우는 것, 그리고 부패 관료들을 척결하기 위한 ‘범죄와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간부들로 하여금 기층사회에 들어가 대중과 함께 먹고 함께 살고 일하는 경험을 강조하였다(‘싼진싼통’). 그러나 때론 이러한 포퓰리즘적 정책들이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런 차별화 전략은 각종 언론매체를 타고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2011년 인민일보는 1면 머리기사로 충칭시 정부가 중국 공산당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핵심 가치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고 높게 평가하였고, 홍콩매체와 해외언론들까지 이를 적극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각종 충칭모델에 관한 심포지엄에 중앙정계 인사뿐만 아니라 해외인사들까지 참여하는 등 보시라이의 영향력은 점점 넓어졌다.

이런 대중적 영향력 확대과정에서 매우 이례적인 특징이 발견되는데, 중국 내 좌파 그룹들의 지지였다. 마오주의적 전통을 강조하는 ‘유토피아’ 그룹은 2011년 말까지 충칭모델 관련 토론회를 세 차례나 개최하고 홈페이지에 충칭모델 관련 내용을 적극 홍보하였고, 보시라이의 지도력을 대대적으로 찬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 내 좌파 그룹들은 충칭모델을 보시라이와 동일시하여 보시라이를 중국 내 좌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적극 밀었고, 보시라이도 이를 통해 2012년 제18차 당대회 이후 정치국 상무위원회 복귀를 겨냥했다.

그러나 이러한 보시라이의 포퓰리즘적 선동과 극좌파의 지지는 문화대혁명 이후 극좌, 극우 모두를 배격하는 중국공산당의 안정주의 노선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요인이었다. 문화대혁명을 좌익맹동주의로 평가한 등소평이 말한 것처럼 “‘우’를 경계하고 ‘좌’를 막아야 한다”는 정치노선을 중국공산당은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입장에선 보시라이를 중심으로 마오주의 전통을 따르는 극좌파들이 결집하는 것이 매우 우려스럽게 보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앞두고 중국 내 극좌파 그룹은 헌법에 ‘매국노 처벌’ 조항을 넣을 것을 탄원하는 청원서를 발표했는데, 시장 개혁 주도자들을 겨냥한 이러한 청원은 상당한 대중적 호응을 얻음으로써 중국 당국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중국공산당이 가지고 있는 이런 우려는 문화대혁명과 천안문 사태로 이어져 오는 매우 뿌리 깊은 트라우마다. 그래서 개혁개방의 성과를 무위로 돌리고 집단지도체제의 안정성을 해치는 어떠한 정치적 시도도 용납하지 않는다. 실제 보시라이에 대한 중국지도부의 경고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2011년 7월1일 중국 공산당 창당 90주년 기념식에서 후진타오 총서기는 문화대혁명의 좌경화를 역사적 착오로 규정한 개혁개방 초의 정책 결정이 옳았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사실상 충칭에서의 보시라이의 정치활동을 겨냥한 것이었다. 후진타오는 당시 발언에서 문화대혁명이 진보적인 의의를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되풀이 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는데, 이는 보시라이에 대한 경고로 평가된다. 이러한 후진타오의 발언을 즈음하여 보시라이에 대한 중앙의 조사가 시작된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러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움직임에는 보시라이 개인의 야심가적 기질에서 나온 불법행동이 더해져 지도부를 경악케 만든 일이 발생했다. 보시라이가 중앙 경위국에 첩자를 심어둬 중앙지도자들에 대한 도감청을 벌였던 것이다. 장쩌민의 후원을 받을 정도로 인맥이 넓었던 보시라이지만, 시도 때도 없이 습관처럼 벌인 그의 도감청은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모든 이들을 분노케 했다. 결국 원자바오가 총대를 메고 보시라이 숙청 작업에 들어갔고, 이에 중국지도부의 모든 파벌들이 동의하면서 보시라이 숙청사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정리하자면 보시라이 숙청사건은 극좌파의 인기를 등에 업은 야심가 보시라이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안정주의 정치노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시진핑 시대와 충칭모델의 확대

보시라이 숙청 이후 더 이상 중국에선 ‘충칭모델’이라는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충칭모델의 개혁 정책은 전국화 되고 있다. 충칭의 개혁조치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90년 말부터 계획한 서부 내륙 개발을 통한 균형발전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개혁개방으로 심화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재분배 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기조는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의 연장선상에 있다. 실제 보시라이 숙청에 총대를 멘 원자바오도 전국인민대표대회 기자회견에서 보시라이를 비판했지만 충칭의 개혁은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보시라이의 정치적 색깔을 탈색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겠지만 충칭의 모든 개혁 기조는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일례로 현재 충칭모델의 경제사회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던 황지판 충칭시장은 보시라이를 따르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장 직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더구나 지도부에 시진핑 현 국가주석과 차기 정치국 상무위원이 확실시 되는 리엔차오 당조직부장, 왕치산 모두 후진타오와 가까운 인물로서 ‘후진타오-시진핑’으로 이어져오는 충칭식 개혁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지도부의 성향으로 볼 때, 충칭모델은 전국적으로 확대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실제 구체적인 경제정책을 봐도 충칭모델은 확장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작년 11월 18차 당대회 이후 부상한 ‘신형 도시화’이다. 이것의 핵심은 내수시장 육성이라는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라, 농촌인구의 도시로의 이전과 더불어 농민의 진정한 시민화를 실현하는 ‘인적 도시화’라고 할 수 있다. 즉 농민공의 시민화를 위해 호구제 개혁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호적제도개혁을 가속화하고 있는데, 2013년 6월 말 기준 전국 31개 성·직할시·자치구 가운데 14곳이 도농 단일호적 등록 제도를 마련했으며, 십여 곳이 구체적인 실시의견을 내놔 농촌인구의 도시 정착에 필요한 기반 구축을 시작했다.

중국의 국유기업 개혁도 전면적인 민영화보다는 국유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으로 국유기업 우량화를 통한 시장경쟁력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국유기업을 세분화하여 일반적 경쟁 업종의 국유기업은 사실상 민영화시키되, 전략적 경쟁 업종 등 중국경제의 주요 핵심 산업 분야는 국유주 지배의 경영권을 존치한다는 전제 하에 민간자본 참여를 단계적으로 허용한다. 그러나 탈국유화는 절대불가라고 못 박고 있다. 그 외에 주요 기간산업 분야에서는 민간자본 참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되 정부 통제 하의 지배구조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번 3중전회의 국유개혁조치에 대한 결과를 두고 실망스럽다고 평가하는 월가를 비롯한 외부적 시각은 이런 조치의 연장선 때문이다. 중국정부가 그리는 국유기업 개혁의 모습은 충칭모델에서 실험했듯, 외부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민영화나 국유기업의 축소가 중심축이 아니다. 국유기업의 우량화가 가장 큰 전제이다. 이 과정에서 경공업 분야의 국유기업의 숫자를 줄이더라도 핵심전략분야의 국유자산 규모를 확대하고 이윤은 더욱 늘려 재정수입을 증대시키는 것이 목표이다. 이렇게 늘어난 이윤은 도시화에 필요한 복지와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재원으로 활용된다. 실제 2011년부터 국유기업 세후 매출 수익 즉 당기 순이익 부분에서 지급하는 국가에 대한 배당금 비율을 5%p씩 높였는데, 석유화학, 담배, 통신, 전력 기업은 세후 매출의 10%를 15%로, 무역, 건설, 광산, 철강 기업은 5%에서 10%로 인상하였다.

이렇게 충칭모델을 확대시켜 가는데 있어서 위협요인이 발생한다면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 경제적 요인 때문일 것이다. 정부주도의 대대적인 투자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단기간 정부 부채가 상승하겠지만, 이것보다는 외부적인 경제위기가 중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중앙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 선택 가운데 하나가 민간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종 인센티브 정책을 취하고 있는데, 예컨대 금융시장 개방 확대와 같은 것이 있다. 중국 당국은 세계 경기 침체 국면에 대응하여 국유기업에 민간자본 투자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그러한 재원조달 구조를 사전에 만들기 위함이다. 상하이 자유무역지대 설치 등으로 외국인투자에 대한 우대 정책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출처: http://business.sohu.com/s2013/2962/s389072220/, <시진핑 개혁의 청사진>인천발전연구원 재인용]

‘이자제자, 자본주의로 자본주의를 제압한다?’ 열쇠를 쥐고 있는 중국공산당

이런 중국의 변화에 대해 그 성격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시선들이 있다. 분배기능 강화에 초점을 맞춘 중국판 사민주의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 국가주도에 의한 자본주의 관리체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시각도 있다. 마치 우리가 경험했던 박정희식 국가개발에서 재벌주도 경제로 재편되었던 과정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모두 자본주의를 전제하고 있는 평가틀이다. 사민주의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타협체제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볼 때, 노동운동의 힘이 존재하지도 않고 자본가 계급이 성숙되지 않은 중국에서 사민주의라는 표현은 왠지 부적절해 보인다. 분배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사민주의만의 유일한 성격이라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주도에 의한 자본주의라는 관점 역시 국가와 결탁하여 성장한 재벌들을 관찰했던 우리의 경험에서 나온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유기업의 민영화 보다는 우량화를 도모하여 국가재정의 중요한 재원으로 삼고자 하는 중국 지도부의 일관된 선택으로 볼 때, 국가권력을 매개로 대자본가가 육성된다고 보기에도 힘들다. 여전히 자본가는 중국공산당의 하위파트너일 뿐이고 공산당이 독점하고 있는 정치권력에는 털끝만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에선 민영화를 주장하는 것이 진보적인 시각으로 인식되며, 국유기업을 중심으로 공산당의 경제권력이 독점되어 있는 것을 보수적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이질적인 중국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중국공산당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이 집단을 무엇이라 규정해야 할 것인가? 그냥 쉽게 광의의 자본가 집단이나 특권관료 계층으로 단정하기엔 앞서 언급한 이들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부족해 보인다.

이번 3중전회에서도 이들은 ‘시장’을 강조하였지만, ‘공평’, ‘화해’도 거론하였다. 그리고 GDP주의와 과잉생산, 지방의 단기적 실적주의, 환경문제에 대한 비판도 보도하였다. 국유기업 개혁 조치도 몇몇을 보면 신자유주의 정책과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시장화 확대로만 파악하기 힘들다. 개혁 개방 이후 형성된 기득권 구조를 재편하려는 시도로도 볼 수 있다. 이는 부정부패 척결과 국유기업에 대한 중앙통제를 강화하고 있는 최근 동향과도 맞아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3중전회의 결과에 대해서 엘리트 파벌이 승리하고 좌파가 패배했다는 관점이나, 발본적이지 못한 개혁으로 기술관료들의 승리했다는 식의 외부적 분석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드러낸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과연 누가 이기고 누가 졌다고 할 수 있나? 앞서 지적한 바대로 충칭모델의 역사적 배경은 짧게는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부터 멀게는 등소평부터 내려져 오는 중국공산당의 기본관점(하나의 중심 두 개의 기본)이다. 등소평이 ‘선부론(부자가 되자)’을 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는 ‘공부론(함께 부를 나누자)’도 같이 강조했다. 중국공산당의 안정적 정치기반만 해치지 않는다면 ‘평등한 부’를 이루는데 있어서 좌우갈등이나 개혁 대 보수의 대립은 부차적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건강한 긴장관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중국공산당의 행동이 외부적 시각으론 모순적일지 몰라도 내부적으로 보면 일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로 수렴된 수동적인 중국이라는 관점 대신, ‘자본주의로 자본주의를 제압’하려는 능동적인 중국으로 재해석 하려는 시각이 우리에게 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 제압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2020년 그들이 목표하는 시점에 변화된 중국을 평가하는 가운데 나올 것이라 판단된다. 그리고 그 열쇠는 중국공산당이 쥐고 있다. 내부적으로 터져 나오는 사상갈등과 점증하는 사회갈등을 어떻게 융화시키고 치유할 것인지 말이다.

이런 중국의 선택에 대해 실패와 성공을 미리 예단하기보다, 그것이 가져올 동아시아의 변화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이해하려는 시각이 필요할 것이다. 일부 경제성장론자들의 바라보는 시각처럼 중국내수시장 확대라는 낮은 수준의 경제적 접근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지경학적 헤게모니의 변동으로 넓게 이해하려는 것이 훨씬 유용한 태도일 것이다. 이 변화에 우리와 가장 큰 긴장관계를 갖고 있는 북한이 어떻게 조응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중국이 걸어왔던 길을 똑같이 밟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마오시절 핵개발 후 죽의 장막을 거두고 미국과 일본과 수교를 맺었던 길을 북한은 그대로 걸어오고 있다. 그리고 경제개혁조치를 단계적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인력시장을 북한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중국의 대북투자가 급증하는 현상들은 보면, 어느덧 역사의 모멘텀이 조금씩 가까워져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토론문 끝]

아래는 발제문 전문이다.


충칭모델과 시진핑 시대


◌ 이 발표문은 보시라이 사건이 3류 치정사건으로 마무리된 현 상황에서, 보시라이(薄熙来)가 추진했다는 충칭모델(重慶模式, Chongqing Model)이 시진핑 시대에 주는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 고안

- 보시라이 사건은 표면적으로 중국 최고위 권력층의 3류 치정사건이며 그 배후에는 중국 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종결
* 바람둥이의 부패한 권력자 보시라이와 미모의 사악하고 부정한 부인 구카이라이 그리고 보시라이의 왼팔이었다가 구카이라이를 연모한 왕리쥔 사이의 치정극?

* 한국 언론은 보시라이 사건의 배후를 중국공산당 내 치열한 권력투쟁으로만 묘사

- 보시라이 사건의 종결로 보시라이가 추진했다던 극좌파적(?) 충칭모델도 종결된 것으로 평가됨
* 실제 보시라이 사건이후 중국에서 ‘충칭모델’은 금기어가 됨

- 그러나 본 발표는 충칭모델의 실체, 보시라이 사건의 본질 그리고 시진핑 시대와 충칭모델의 관계 등에서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자 함.
첫째, 충칭모델의 본질은 후진타오 집권기의 개혁 방침을 새롭게 실험한 것, 다만 충칭의 개혁을 보시라이가 주도하여 자신의 치적으로 확대
둘째, 보시라이 사건의 본질은 극좌세력을 등에 업은 야심가 보시라이에 대한 숙청으로 자유주의 세력 지지를 받은 자오쯔양 숙청과 마찬가지로 중국 공산당의 안정주의 정치노선의 발효포장.
셋째, 시진핑 시대는 후진타오 시대의 경제사회정책을 승계한 만큼, 충칭모델의 기본 정책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음. 다만 충칭모델이란 표현은 여전히 금기시될 것이며 경제적 상황에 따라 다소의 변동은 불가피

Ⅰ. 충칭모델의 실체

◌ 충칭모델의 배경은 중국공산당의 지역균형 발전 전략인 서부대개발(西部大开发)

- 중국 정부는 지역 불균형과 지역 간 빈부격차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이미 90년대 말부터 서부대개발 프로젝트를 계획, 2000년대부터 이를 추진.

- 충칭은 서부대개발의 중심도시이자 서부대개발의 대표적인 지역 발전 사례
* 충칭은 최근 몇 년 동안 초고속 경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은 2008년 이래 더욱 뚜렷해져 2010년 기준으로 충칭의 GDP는 전년 대비 GDP 증가율은 17.1%로 톈진(天津)에 이어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초고속 성장

〇 충칭이 더욱 주목된 것은 충칭에서 추진되어 온 다양한 개혁 실험 때문으로 대체로 그 주요 정책은 주로 네 가지 측면.

- 첫째, 내륙개방 정책의 추진: 가공무역 중심의 기존 연해지역의 개방체제와는 달리 많은 부품을 국내 생산에 의존하여 수출 시장은 물론이고 내수경제를 진작시키는 새로운 가공무역 체제 구축
* 충칭이 중앙 정부의 서부대개발 전략의 핵심 도시로 지정됨에 따라 교통 인프라가 대거 구축되고 이에 기반하여 거대한 산업단지 및 부품 생산체제가 조성
* 이에 따라 충칭에는 거대한 요소시장이 형성되었고 충칭의 초고속 경제성장에 따라 주민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충칭에는 새로운 내수시장이 형성

- 둘째, 국유자산 보존을 통한 선순환적 혼합경제 구축: 충칭은 민영화 없이도 국유기업을 개혁하여 국유기업의 우량화를 도모하고 공유제 토지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토지지표거래제 시행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제사회 체제를 구축
* 충칭은 8개의 대형 국유 투자 기업을 건립하여 국유기업 우량화 자금 제공1), 국유자산관리공사가 국유기업의 불량채권을 매입한 뒤 우량화 이후에 다시 되파는 방식, 국유기업의 이전을 통해 생산원가 감축 등으로 국유기업 구조조정 추진
* 토지지표거래제란 농민공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며 방치한 농촌의 주택 및 시설용지를 경지로 전환하여 개발로 인한 경지면적 감소를 보완, 대신 농민공들에게 토지어음(地票)을 발행하여 토지거래소(土地交易所)에 거래하여 얻은 수익의 80%는 농민(공)에게, 20%는 정부에 보상하여 농민공의 도시정착과 국유자산 증대
* 2002—2008년 사이 충칭 국유기업의 수익성이 제고되어 충칭의 국유자산 총액이 4배 증가한 동시에 민영경제 역시 12개 성 가운데 가장 빨리 발전2). 이는 충칭 국유기업의 수익을 정부 재정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 충칭 정부가 기업소득세를 높게 부과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민간기업의 수익도 늘어났기 때문3)
* 이로부터 얻은 국유 수익을 국가재정으로 귀속시켜 사회인프라 투자와 복지 구현에 사용

- 셋째, 호구제 통합과 임대주택 정책 등 양극화 해소를 위한 민생 정책 추진
* 2007년 중앙정부는 충칭을 청두(成都)와 함께 이른바 ‘전국 도농통합 종합개혁 시험지역(全国统筹城乡综合配套改革试验区)’로 선정, 이를 기화로 충칭은 인근 농촌의 농민공등을 충칭시 호구에 통합시켜 충칭시로부터 주거, 취업, 교육, 양로보험, 의료보험 5가지방면 사회보장혜택을 얻도록 함.
* 충칭의 호구제 개혁은 농촌의 잉여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으며 도시화를 진전시킬 수 있으며 도시로 유입된 농민의 농지를 활용할 수 있는 대신 이들에 대한 공공서비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평가
* 충칭은 2010년 말부터 농촌을 떠나 도시로 유입되는 농민공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제공함으로써 농민공의 도시 주거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는 정책을 함께 추진
* 이러한 민생정책으로 2020년까지 충칭시 인근의 농민 호구 인구 1000만명이 충칭의 ‘시민’으로 변화할 것으로 예상됨

- 넷째, 충칭은 동시에 사회주의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행사와 활동 전개
* 충칭 TV 프로그램에서 상업광고 방영을 금지하고 혁명시대 선전영화를 상영.
* 충칭 전 주민에게 사회주의 혁명 시대의 문화를 상기시키고자 했던 혁명가요 부르기(唱紅) 전개4)
* 당 간부들의 정치적 순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패 관료들을 처벌했던 범죄와의 전쟁(打黑) 전개
* ‘싼진싼통(三进三同)’ 정책: 충칭의 간부들이 ‘기층사회에 들어가고 시골 촌락에 들어가고 농가 속으로 들어가서(进基层、进村子、进农户) 농민 대중과 함께 먹고 함께 살며 함께 일하는(同吃、同住、同劳动) 경험 강조.

〇 충칭의 개혁정책과 발전은 호평을 받으며 중국 전역의 관심과 주목을 받음

-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직간접적으로 충칭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평가
* 후진타오 국가주석 시기에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9명 가운데 6명이 충칭의 발전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충칭을 방문5).
* 언론에 완전히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원자바오 국무원 총리와 리커창(李克强) 부총리 역시 충칭을 시찰함으로써 사실상 후진타오 총서기를 제외한 모든 정치국 상무위원 들이 충칭에 관심을 표명한 셈
* 사실, 보시라이는 후진타오와도 간접 연결. 2010년 11월에 상하이에서 “충칭모델 고위층 심포지엄(重慶模式高層硏討會)”이 개최되었는데 이 심포지엄의 주최자가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친밀한 친척 동생이었고 그가 충칭모델을 극찬

- 충칭의 범죄 소탕 및 관료부패 척결은 대중적인 호응을 받았고 그 결과 충칭의 사회적 안전도가 대폭 상승한 것으로 조사됨. 실제 충칭의 주민 체감안전 지수는 2008년 전국 19위에서 2009년 13위로 상승한 데 이어 2010년에는 1위로 나타남
* 보시라이는 물론 범죄소탕을 직접 지휘한 왕리쥔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음

- 중국의 주요 언론들도 충칭모델에 대한 찬양 일색을 표명
* 2011년까지만 해도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3000자에 이르는 1면 머리기사에서 길게 할애하여 충칭시 당위원회와 충칭시 정부가 중국 공산당 중앙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핵심 가치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고 높게 평가
* 충칭모델에 대한 관방 언론매체들의 보도는 물론 펑황(鳳凰)TV 등 홍콩매체와 해외언론의 보도 등도 지속적으로 이어짐

○ 보시라이에 대한 좌파의 적극적인 지지와 충칭 당국의 적극 홍보를 통해 충칭모델은 보시라이의 치적으로 선전됨

- 중국 내 좌파 그룹 ‘유토피아(乌有之乡)’세력은 이후 2011년 말까지 충칭모델 관련 토론회를 세 차례나 개최하고 홈페이지에 충칭모델 관련 내용을 적극 홍보, 이들은 또한 보시라이의 지도력을 대대적으로 찬양
* 이후 충칭모델의 등장을 보시라이 개인의 성향과 정책비전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고 ‘충칭모델’은 보시라이의 충칭 당 서기 부임 이후 등장한 것으로 간주6)

- 충칭시 당국도 ‘충칭모델’의 홍보에 적극적이었고 보시라이의 명성이 높아짐
* 2010년 9월 충칭에서는 “충칭의 실천과 새로운 아시아모델 심포지엄(重庆实践与新亚洲模式研讨会)”이 개최, 충칭 시 당위원회 소속 인사들도 다수 참석한 이 심포지엄에는 파키스탄, 네팔 등의 주중 대사가 초청됨
* 2011년에 들어서 충칭 당국이 충칭모델에 대한 홍보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6월, 7월, 11월 충칭 당국 주도의 충칭모델 관련 심포지엄이 세 차례 지속개최

- 결국, 중국 내 좌파 그룹이 충칭모델을 보시라이와 동일시하여 보시라이를 중국 내 좌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적극 밀었고, 보시라이도 이를 통해 2012년 제18차 당대회 이후 정치국 상무위원회 진입 등 중앙 정치무대 복귀를 겨냥했음을 시사

〇 그러나 충칭모델의 주요 개혁안은 사실 중앙 지도자 주도로 제시된 것

- 충칭은 후진타오 시대의 ‘과학 발전관(科學發展觀)’에 입각하여 지역간, 도농간 및 계층간 격차 해소를 위해 도농통합 및 재분배 정책을 시범 추진하는 실험지역

○ 충칭모델도 反시장적인 것이 아니며 보시라이도 본래 좌파가 아님

- 충칭모델은 ‘사회주의시장경제’ 즉 공유제 중심의 시장경제의 발전 모델
* 충칭모델은 상대적 저발전에 처한 서부 내륙지역의 경제성장을 위해 정부의 대대적인 재정 투입으로 시장경제를 육성하는 ‘충칭판 정부주도의 시장경제’
* 충칭모델에서 분배정책으로 지칭되는 임대주택제도와 호구제 개혁은 충칭 인근 농촌의 잉여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연안 지역으로 빠져나간 농민공을 내륙 지역으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필요한 정책
* 토지공유제의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도시 정착을 위해 떠나는 농민의 토지사용권을 거래시켜 보상금을 제공하는 토지지표거래제도는 분배정책의 일환이지만 동시에 전국 최초로 토지 거래 시장을 충칭에 형성시키려는 과정
* 국유기업 우량화를 통해 국유기업의 시장경쟁력 제고와 이를 통한 수익의 정부 복지재정 활용은 ‘사회주의시장경제’의 2.0버전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임

- 보시라이는 경제성장을 위해 시장화의 확대에 주력한 개혁개방 정권의 후계자
* 보시라이는 충칭시 당서기 임명 전까지 중국 시장경제의 확대를 주관하여 온 정부 부처인 중국 상무부의 장관을 지낸 인물로 상무부 재임 시절 그는 자신의 정치적 업적을 쌓기 위해 중국의 FTA 체결을 적극 추진
* 상무부 장관 역임 전에 맡았던 랴오닝 성장과 따리엔 시장 시절의 보시라이는 지역 경제성장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脫마오주의 관료의 모습7).
* 그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는 문화대혁명 때 주자파(走资派)로 탄압받다가 개혁개방과 함께 복귀한 인물로 개혁개방 정권의 8대 원로 중 한 사람

Ⅱ. 보시라이 사건의 본질

○ 보시라이 사건은 파벌 투쟁이 아니라 야심가 보시라이에 대한 의도적인 숙청

- 중국 공산당 내 파벌 간 갈등과 권력투쟁은 상존. 그러나 보시라이 사건은 워낙 막중한 사안으로 보시라이의 해임은 사실상 모든 파벌의 합의로 결정
* 단 이 사건은 야심가 보시라이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 사이의 권력투쟁의 성격은 있었음. 단 상하이방(上海幇)-태자당(太子黨) 연합 對 공청단(共靑團) 세력 사이의 파벌투쟁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

- 보시라이 숙청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공식 보도 처럼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의 부패 문제나 영국인 사업가 헤이우드 독살이 아니라 중앙 지도부와 원로들을 모두 경악케 했던 다른 문제일 가능성이 높음.
* 이와 관련하여 홍콩의 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보시라이에게 적용된 ‘7가지 죄목’을 보도9). 이러한 차원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중앙 지도자들에 대한 도감청 등으로 비롯된 문제인 듯함10)
* 2012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 기간 까지만 해도 보시라이의 여유있는 태도는 중국 최고 권력층의 분노를 크게 야기한 것으로 추정. 따라서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을 하루 앞두고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공개적으로 보시라이의 반성을 촉구하는 중국 정치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바로 다음날 중국 당국은 보시라이 충칭 시 당서기의 해임을 전격적으로 발표

- 보시라이 숙청은 당내 야심가를 제거하여 당내 최고 지도자 집단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
* 원자바오는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문화대혁명이 재현될 수 있다고 경계했는데 이는 사실 보시라이의 음모를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것
* 중국의 권력 지도부는 집체적 결정에 반대하는 자가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대신 ‘타협형’의 지도자가 선호되어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이 유지
* 실제 보시라이의 정치적 야심이 지나치다고 판단, 보시라이에 대한 중국 공산당 중앙의 경고가 2011년부터 나타남11).

- 보시라이 숙청은 상술한 차원에서 중국 당국이 향후 정국 운영에서 극우 노선은 물론 극좌 노선의 영향을 차단하여 이른바 ‘실용주의 노선’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
* 보시라이 숙청은 단순한 독살 사건이나 부패 사건에 대한 처리나 단순한 파벌 투쟁이 아니라 중국의 개혁 방향을 둘러싼 뿌리 깊은 정치적 노선 갈등과 연관
* 역사적으로 중국 당국은 극좌파와 극우파 모두를 지도부에서 배제하고 지도부 전체의 색채를 최대한 중도적으로 만드는데 주력. 보시라이 스스로는 조심해 왔지만 중국의 극좌파 그룹은 보시라이를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할 지도자로 옹위.
* 특히 이번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앞두고 중국 내 극좌파 그룹은 헌법에 ‘매국노 처벌’ 조항을 넣을 것을 탄원하는 청원서를 발표했는데, 시장화 개혁 주도자들을 겨냥한 이러한 청원은 상당한 대중적 호응을 얻음으로써 중국 당국을 긴장시킴

- 중국 공산당 중앙으로서는 보시라이 숙청을 통해 당국의 입장을 명확히 표현
*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입장은 사회주의 정치체제의 지속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노선과도 양립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추구하는 시장화 개혁에 반대하는 극좌 노선과도 양립할 수 없는 것

Ⅲ. 시진핑 시대와 충칭모델의 관계

○ 충칭모델의 이름은 사라져도 충칭모델의 개혁 정책은 오히려 전국화 될 가능성이 높음

- 보시라이와 충칭모델을 동일시할 경우 보시라이의 정치적 낙마로 충칭모델은 소멸한 셈.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충칭의 개혁조치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현실적 필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

- 충칭모델은 反시장적이기는커녕 국가주도적 시장경제 육성이라는 중국모델의 전형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개혁개방 확대로 야기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 재분배 정책이 선순환적으로 이루어지는 개혁을 추진한 것으로 이러한 기조는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으로 대표되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정책비전의 연장선상에 존재
* 원자바오도 전국인민대표대회 기자회견에서 보시라이는 비판했지만 충칭의 개혁은 긍정12)

- 따라서 보시라이가 숙청된 마당에서 충칭의 개혁은 보시라이의 정치적 색깔을 탈색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겠지만 충칭의 제반 개혁 기조는 소멸되는 것은 아님
* 보시라이가 무리하게 추진된 홍색이념의 고취는 중단되고 초법적인 범죄 소탕은 위법적인 것으로 평가되었고 충칭 TV 채널에서 그동안 중단되었던 대중 연속극 방송이나 상업광고가 재개
* 충칭 시의 여타 경제사회적 개혁 조치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었음. 충칭의 개혁은 중국 공산당 중앙과 중앙정부의 장기적인 비전하에서 추진된 것이기 때문.

- 충칭의 개혁에 대해 제5세대 지도부의 핵심인사들인 시진핑, 리위안차오(李源潮), 왕치산(王岐山) 등도 지지를 표명한 만큼, 충칭의 개혁안은 오히려 시진핑 시대 들어 전국적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더 높음
* 단, ‘충칭모델’이란 표현은 보시라이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여전히 금기어

○ 시진핑 시대의 등장 이후 충칭의 정책 확대를 연상시키는 개혁안이 대두

-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추진된 경제발전방식의 내수 중심으로의 전환은 시진핑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화

- 내수확대의 중요한 카드는 지난해 11월의 18차 당대회 이후 핫이슈로 부상한 ‘신형 도시화’
* 핵심은 농촌인구의 도시로의 이전과 더불어 농민의 진정한 시민화를 실현하는 ‘인적 도시화’, 즉 농민공의 시민화를 위해 호구제 개혁이 최우선으로 등장하여 중국 정부는 도시화를 위해 호적제도개혁을 가속화, 2013년 6월 말 기준 전국 31개 성·직할시·자치구 가운데 14곳이 도농 단일호적 등록 제도를 마련했으며, 18곳이 구체적인 실시의견을 내놔 농촌인구의 도시 정착에 필요한 기반 구축을 시작

- 중국의 국유기업 개혁도 전면적인 민영화보다는 국유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으로 국유기업 우량화를 통한 시장경쟁력 강화에 주력
* 일반적 경쟁 업종의 국유기업은 사실상 민영화시키되, 전략적 경쟁 업종 등 중국경제의 주요 핵심 산업 분야는 국유주 지배의 경영권을 존치한다는 전제 하에 민간자본 참여를 단계적으로 허용하나 脫국유화는 불가
* 그 외에 주요 기간산업 분야에서는 민간자본 참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되 정부 통제 하의 지배구조를 견고하게 유지

- 국유기업 비중은 줄어들고 있는 아래 <그림>에서도 보듯이 국유기업의 자산 규모나 이윤 규모는 오히려 지속적으로 크게 증가하고 있음


- 2011년부터 국유기업 세후 매출 수익 즉 당기 순이익 부분에서 지급하는 국가에 대한 배당금 비율을 5%p씩 높여 이로부터 확보한 재원은 사회보장 혜택 제공을 위한 재정으로 편성
* 석유화학, 담배, 통신, 전력 기업은 세후 매출의 10%를 15%로, 무역, 건설, 광산, 철강 기업은 5%에서 10%로 인상

○ 충칭모델의 개혁안이 전국적으로 만약 표류하거나 중단된다면 이는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 경제적 요인 때문일 것

- 세계 경제위기가 재현되거나 최소한 세계 경기가 침체되면 중국의 경제상황도 악화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정부 투자에 의지해야 하는 충칭모델의 개혁안은 단기간 정부 부채율을 상승시켜 경제적 리스크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음

○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중앙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 선택 가운데 하나가 민간자본의 유동성 활성화를 위한 각종 인센티브 정책 예컨대 금융시장 개방 확대

- 중국 당국은 세계 경기 침체 국면에 대응하여 국유기업에 민간자본 투자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상하이 자유무역지대 설치 등으로 외국인투자에 대한 우대 정책을 강화하고 있음.


* 주

1) 2002년부터 국채발행 수익금, 토지보유 수익금, 보유 자산, 수수료, 세수 반환금 등 5가지 국유 자금으로 충당하여 8개의 대형 국유 투자 기업을 구축

2) 추이즈위안에 따르면, 2002년에서 2008년 상반기까지 충칭의 국유자산은 1700억 위안에서 7000억 위안으로 증가했고 2009년에 이르면 9000억 위안을 돌파했고 2010년에는 1조 위안을 초과했다고 한다. 이는 2002년에서 2008년까지의 경우 중국 전체 국유기업(국유주 지배 기업 포함)의 공업생산액 증가율이 3.7%인데 반해 충칭의 증가율은 19%였던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崔之元, "重庆“十大民生工程”的政治经济学" , 中共中央党校学报 第14卷 第5期(2010), pp 5-6; 崔之元, "国资增值与藏富于民并进, 地票交易促城乡统筹发展―“重庆经验”探索" , 探索 2010年 第5期, pp84-85.

3) 실제 다른 서부지역에선 33% 세율로 부과되고 있는 기업소득세를 충칭에서는 15% 수준으로 유지

4) 홍색가요 부르기를 통해 마오쩌둥 시대의 순결한 정신을 기억하자는 ‘창홍(唱红)’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전후해서 쟝시(江西) TV에서 개최한 홍색가요 경연대회가 예상외로 대중적 관심을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이러자 보시라이는 충칭 시민들에게 27곡의 혁명가요를 추천하면서 이러한 혁명가요가 중국 공산당의 혁명 역정과 중화민족 부흥의 여망을 담고 있어 개혁개방 추진의 긍지와 의욕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이후 충칭에서는 각 기관, 학교, 기업, 농촌, 도시 구역, 공장 그리고 심지어는 길거리와 논두렁 등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행사의 시작과 종료 시에 혁명가요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2009년 10월 국경절 기간부터는 충칭시 간부들과 충칭 소속 40여개 구(區)와 현(縣)의 당정 간부들이 혁명가요 친목회를 조직하여 혁명가요 부르기는 이제 충칭의 상징처럼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2010년 충칭은 ‘중국혁명가요회(中國紅歌會)’를 2년에 한번 충칭에서 영구적으로 주최하기로 중국 문화부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이후 ‘창홍’은 3년 여 기간동안 시민의 97.3%가 참여하였고 홍콩에까지 소개됨으로써 충칭 모델의 트레이드마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5) 시 충칭시의 발전을 공개적으로 칭찬한 정치국 상무위원은 중국 공산당의 공안분야 사령탑으로 중앙정법위원회 서기인 저우융캉(周永康), 간부에 대한 부패 척결을 주도하는 기율검사위원회 서기인 허궈창(賀國强), 당 공식 서열 2위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우방궈(吳邦國), 당 공식 서열 4위인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자칭린(賈慶林), 당의 이데올로기 선전 부문을 관장하는 리창춘(李長春), 그리고 국가부주석 시진핑(習近平) 등이다.

6) 예컨대, 홍콩의 대공보(大公报)는 상무부 장관이던 보시라이가 충칭시 당서기로 부임한 2007년 이후 충칭의 새로운 발전 기회가 열렸다고 극찬했다. 중국 중앙정계 스타인 보시라이가 충칭에 올 때 많은 충칭 사람들이 기대를 가졌으며 그 기대에 부응하여 보시라이가 중앙정부의 충칭시 발전 방침을 이끌어냄으로써 충칭 발전의 청사진이 마련되었다고 평가했다(大公报 2009年3月30日).

7) 보시라이는 따리엔(大连) 시장과 랴오닝(辽宁) 성장 시절, 어떤 장소에서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지역 브랜드를 마케팅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랴오닝 성장 시절 했다는 “언론매체가 나를 인터뷰하면 선양(沈阳)이나 따리엔(大连) 등 랴오닝의 도시의 장점을 잘 부각하여 이야기해서 투자가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다.” 라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래서 2001년말 “랴오닝-광둥 상품 전시판매 경제협력 협의회”의 개막식 자리에서 랴오닝의 한 대표는 “돈을 벌려면 보시라이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证券时报网 2012年3月15日).

8) 사람들은 이번 사태를 중국 공산당 당내의 3대 파벌로 인식되는 상하이방(上海幇), 태자당(太子黨), 공청단(共靑團) 사이의 파벌 투쟁으로 보거나 혹은 보시라이를 둘러싼 좌파와 왕양(王洋)을 둘러싼 우파 간의 일대일 노선 투쟁으로만 해석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상황은 본래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좌파적인 인물로 분류되는 보시라이는 태자당에 속하는 셈인데 이런 보시라이를 중국의 시장화 개혁을 주도한 상하이방의 장쩌민이 후원해왔다. 반면 우파적 정책을 펴 온 왕양 광둥성(廣東省) 당서기는 성장과 분배의 결합을 주창해온 후진타오(胡錦濤)의 공청단파에 속한다. 상하이방처럼 결속력이 강한 파벌이 존재하는 반면, 공청단 내에는 좌우 노선이 공존하고 있으며 태자당은 사실 하나의 파벌이 아니며 다양한 노선이 공존한다.

9) 즉, 첫째, 뇌물 수수, 헤이우드 살해 등과 관련한 보시라이 일가족의 부정부패 문제. 둘째, 지난 2월 2일 중앙 공안부의 동의 없이 충칭시 공안국장인 왕리쥔을 임의로 면직하는 등 공상당 중앙의 조직 기율을 위배한 것. 셋째, 지도자로서 해외 정보 조직과 연계된 외국 사업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국가안전을 위협한 것. 넷째, 인터넷 여론과 해외매체 조작을 통해 당과 국가지도자를 공격한 것. 다섯째, 당 중앙 경위국(중앙지도자 경호 업무)에 첩자를 두고 중앙지도자들을 도청 및 감청한 것. 여섯째, 조직폭력과의 전쟁을 내걸고 법률 시스템과 시장경제 질서를 파괴한 것. 마지막으로 문화대혁명 방식의 정치 선동으로 중앙 노선을 위배한 것 등이 꼽혀졌다.(亞洲週刊 2012年4月22日)

10) 아주주간은 보시라이의 7가지 죄목 가운데 중앙 지도부 등 중국 권력층에 대한 도감청 문제는 앞으로도 공식 보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중국의 권력 엘리트의 부패 문제나 사생활등이 전부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亞洲週刊 2012年4月22日)

11) 2011년 7월1일 중국 공산당 창당 90주년 기념식에서 후진타오 총서기는 문화대혁명과 좌경화를 역사적 착오로 규정한 개혁개방 초의 정책 결정이 옳았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사실상 충칭에서의 보시라이의 정치활동을 겨냥한 것이었다. 후진타오는 당시 발언 중에서도 또한 문화대혁명이 진보적인 의의를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되풀이 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는데 이는 보시라이에 대한 경고로 평가된다. 이러한 후진타오의 발언을 즈음하여 보시라이에 대한 중앙의 조사가 시작된 것으로 예측된다(参与网 2012年4月17日)

12) 원자바오 총리는 2012년 3월14일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을 앞둔 내외 합동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랫동안 충칭시의 역대 정부와 많은 인민 군중들은 개혁 건설 사업을 위해 매우 큰 노력을 기울였고 또한 뚜렷한 성과를 얻어왔다. 그러나 현 충칭시 당 위원회와 시정부는 반드시 반성해야 하고 진실로 왕리쥔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人民网 2012年3月14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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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의 , 보시라이 , 중국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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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규(동서대 국제학부)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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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인호

    한국 지식의 최전선, 주례토론회 너무 유익하게 자알~ 보고있습니다. 다들 고생하셔유^^

  • 송명관

    감사합니다.~^^ 주례토론회는 내년에도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기대해주세요~

  • aliek62

    중국은 문제가 많은 나라지만 100년안에 미국을 따르겠다느결심만으로도 뱡향은 이미정해져다 백성들은 불만이 많으나 이전에그런식으로 돌아간다면 그건정신나간 사람들이나 좋아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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