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조를 지키며 하루하루 이기는 투쟁

[오늘, 우리의 투쟁] 금속노조 포레시아지회(1)

[편집자주]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너무 오래 싸우고 있다. 갈수록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아지고 벅찬 승리의 소식을 들은 기억은 오래다. 이심전심 통하는 마음으로 연대의 기운을 나누며 힘을 내지만, 지난한 싸움은 주체의 몫으로만 남아 외롭게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새롭게 결의하며 오늘도 내일도 싸우지만, 때로는 잊혀지고 때로는 외면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오늘, 우리의 투쟁]을 통해 ‘참세상’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함께 싸워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연대를 소망하며 전한다.

자본의 질주를 위한 , 민주노조를 깨기 위한 정리해고

포레시아는 유럽 최대의 자동차 부품사 중 하나로 세계 33개국에서 270여개의 공장과 40개 연구소를 가동하며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프랑스 자본이다. 2002년 한국에 진출해 2003년 경기도 시화공단 대기산업과 창흥정밀의 배기 부문을 별도의 법인으로 인수했고, 2008년 7월 지금의 화성 공장으로 이전했다.

포레시아가 위치한 경기도 화성의 장안첨단단지는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외국자본 투자 유치를 위해 조성한 외국인전용공단으로, 임대료와 법인세 감면 및 설비와 고용 지원 등의 파격적인 혜택을 누리는 특권지대다. 외국자본에게는 천국과 같은 이곳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은 지옥을 경험하며 고통을 당하고 있다.

포레시아 노사는 2008년 7월 공장 이전에 앞서 고용보장협약을 맺었다. 공장 이전 직후 터진 미국발 경제위기로 자동차산업 전반의 경기가 악화됐지만, 2009년 4월 이후 생산은 점차 정상궤도로 진입했고 2010년의 신규 차종 물량 계획도 확보된 상태였다. 그러나 2009년 초반 잠시의 위기 동안 사측은 현장을 들쑤시며 희망퇴직을 회유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조합원들에 대해서는 5월 26일, 정리해고를 강행했다. 정리해고의 기준은 1997년 8월 15일 이전 입사자 전원, 노조 전임자가 모두 포함되었다. 조합원 102명 중에 19명이 정리해고 되고 36명이 희망퇴직, 12명이 당시 같은 공장에 법인만 분리되어 있던 대기포레시아의 계약직으로 적을 옮겼다.

하지만 정말로 정리해고를 피할 수 없는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였을까. 희망퇴직을 공고한 이후에도 사측은 노동자들을 바로 내보낼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65%의 인원을 감축한 포레시아에는 납품을 맞춰야하는 생산물량이 차고 넘쳤다. 정리해고 공고 이후 몇 달 간 희망퇴직자들을 내보내지 않고 철야를 시켰고, 소속만 대기포레시아 계약직으로 옮긴 전적자들 역시 밤낮없이 기존에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렇게 주야로 공장을 돌리며 정상화된 공장에, 2009년 말에는 희망퇴직에 앞장섰던 노동자들이 신규로 채용되었고 모자라는 일손을 채우기 위해 일용직들이 채용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는 포레시아의 정리해고를 정당하다고 판정했다. 중앙노동위원회 판정이 나자 사측은, 용역깡패들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농성천막과 조합사무실을 침탈했고 2010년 1월에는 구사대를 동원해 아예 조합사무실을 폐쇄시켰다. 공장 밖으로 내쫓긴 노동자들의 천막은 행정조치에 의해 건너편으로 떠밀렸다. 정리해고 이후, 포레시아는 법인을 합병했고 2010년 하반기에는 경북 영천에 자동차시트프레임 공장을 준공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로만 채워진 영천공장에는 화성공장의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파견되어 일을 하기도 한다. 고삐 풀린 자본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힘인 민주노조를 파괴한 결과다.


사람으로 살기 위해 버텨낸 시간들

하지만 모든 것이 사측의 계산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찍어내기식 정리해고 이후에도 공장 안에는 금속노조를 지키는 조합원들이 남았다. 그리고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극소수에 불과한 금속노조 포레시아지회 조합원들이 당한 탈퇴 압박과 비인간적인 탄압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주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포레시아투쟁이지만, 현장 조합원들에게 가해진 갖은 폭력과 차별은 극단적 노조 탄압의 사례로 적잖이 회자될 정도였다.

금속노조 조합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잔업을 시키지 않았고, 이름 대신 욕설과 폭언이 일상이 되었다. 근무 시간에도 수시로 불러내 일대일로 금속노조 탈퇴를 회유하고 협박했다. 말을 듣지 않자 아예 일을 시키지 않고 현장 내 누구나 볼 수 있는 통유리 앞에 하루 종일 서 있게 하는 일을 며칠씩이나 반복했다. 그마저 통하지 않자 앉았다 일어났다 얼차려를 시키고 담배꽁초를 버린 후 줍게 하고, 한 명씩 불러서 얼굴에 침을 뱉고 입고 있는 금속노조 조끼를 찢고 몸에 라커를 뿌려댔다.

그런 일을 당한 날이면, 퇴근해 해고자들의 컨테이너에 들어서는 조합원들의 눈이 시뻘겋더라고 했다. 비록 한국노총과 금속노조로 나뉘어졌지만 오랜 세월 함께 일해 온 동료들이 직접 가하는 폭력이었다. 그 모든 상황을 배후조종하는 사측은 물론 거기에 없었다. 민주노조가 힘을 잃은 현장에서는 집단적으로 인간성이 마비되고 이성을 잃어버리는 참극이 벌어졌다.

언제까지고 당할 수만은 없어 증거들을 모아 고소고발을 하자 자본의 하수인을 자임했던 몇몇이 기소되어 벌금형을 받았고 서서히 잠잠해졌다. 이후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괴롭힘은 사라졌지만, 금속노조 조합원들에 대한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차별은 계속되었다. 명절이나 행사 때 지급하는 선물로도 심지어 체육대회로도 차별을 했다. 이 역시 참다못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했지만 증거부족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기든 지든 지속적인 대응을 통해 조합원들은 조금씩 당당해질 수 있었다.

사람의 얼굴이 지워진 현장에서 탄압에 시달리는 조합원들은 공장 밖에 동지들이 있다는 생각으로 참담함을 견뎠다. 철옹성 같은 공장 담벼락을 넘을 수 없는 해고자들은 안에서 버티는 동지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더욱 꿋꿋이 투쟁을 이어갔다. 양심과 의리로 선택한 민주노조를 지키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으며, 공장 안팎의 동지들은 믿음과 의리로 서로를 지키며 투쟁해왔다. 자본이 가하는 끝없는 모멸을 묵묵히 견디며 사람으로 살고자 싸워온 시간들이 더디게 쌓이며 흘러갔다.


하루 하루 이기고 있다

그렇게 싸우며 4년 반이 지났다. 19명의 정리해고자 중 몸이 아픈 2명을 제외하고 절반은 늘 농성장을 지키며 투쟁을 이어왔다. 생계를 내려놓을 수 없는 절반 역시 농성장을 마음 한 켠에 두고 일을 하면서 투쟁기금을 보태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탈하는 사람 없이 투쟁을 이어오는 게 신기한데, 그렇다고 투쟁이 술술 풀려온 것은 결코 아니다. 지노위, 중노위, 행정소송까지 모두 패소한 후 처음으로 들려온 기쁜 소식이 정리해고 2년 2개월이 지난 후 고법에서의 승소였다.

2011년 7월 21일, 서울고등법원에서는 포레시아의 정리해고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공장 이전을 앞두고 맺은 고용보장에 대한 단체협약이 인정되었고, 정리해고를 할 만큼 긴박한 경영상의 어려움은 인정되지 않았다. 참으로 간만에 맛보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포레시아 사측은 해고자들에 대한 복직을 이행하는 대신 항소했다. 소송대리인을 로펌 김앤장으로 바꿔 적극적인 공세를 펴면서 사건은 지금껏 2년 반 가까이 계류 중이다.

물론 판결은 법원의 몫이지만, 투쟁으로 일궈낸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을 만큼 포레시아 노동자들은 꾸준하고 묵묵하게 싸워왔다. 매일 아침 공장 앞 출근투쟁을 진행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농성장을 지키며 현장 조합원들과 함께 한다. 장안공단 투쟁사업장들이 모여 함께 시작한 경기도청 앞 수요 아침 선전전은 몇 년째 계속되면서 언젠가부터 도맡아 하고 있다. 정리해고 사업장들이 모여 함께 시작한 영등포역 앞 수요 점심 선전전도 몇 년째 이어가는 중이다. 목요일에는 제대로 된 대법원 판결을 촉구하는 일인시위를 진행한다.

초반에는 조합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나오기도 했고, 선전전과 일인시위로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가 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본은 언제나 지켜보고 있고 중요한 건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게 이슈가 되거나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중단 없는 싸움으로 민주노조를 깨기 위한 정리해고의 본질이 드러났고 투쟁에 확신이 더해졌다.

물론 결의와 정신력으로만 모든 게 가능할 수는 없다. 금속노조 깃발을 지키며 안팎에서 싸우는 조합원들에게 닥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경제적인 부분이다. 교섭이 진행되는 도중 일방적으로 강행한 정리해고로 현장을 지키는 조합원들은 지금도 2008년 기준의 임금을 받으며 각종 복지와 처우에서도 현저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투쟁에 전념하는 해고자들은 경기지부가 연대하는 소액의 활동비로 생활하다보니 언제나 빠듯하다. 그래서 아침, 저녁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고 농성장에서의 점심은 밥과 김치로 해결하며 식비는 지출하지 않는 게 원칙이 되었다. 해고 이후 놀러간 거라고는 부산의 풍산 집회에 참여하며 광안리 바다 한 번 보고, 함께 투쟁하던 시그네틱스 덕분에 유명산 한 번 올라간 게 전부다. 고육지책이기도 하겠지만 장기투쟁의 긴장과 결의를 일상적으로 이어가는 방편이기도 할 것이다.

계산하지 않고 욕심 내지 않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1600일이 넘는 날들을 그렇게 싸워왔다. 이따금 누군가는 흔들리고 누군가는 주저앉고 싶었겠지만 묵묵히 서로를 일으켜 세우며 다져온 시간들일 것이다. 포레시아 동지들이 오는 금요일, 수원에서 투쟁기금 마련을 위한 후원주점을 연다. 11월 29일, 따뜻한 연대의 마음으로 승리의 밑불을 함께 지피자!

태그

정리해고 , 포레시아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신순영(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